천재는 없다 지은이:류태영 차례 책 머리에 1.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일기, 소중한 마음의 친구 나 후따 벤조와 포레스트 검프 넘어지려는 아이는 왜 부축해 주는 거요 그래, 넌 청소를 잘 하잖니 김치가 훨씬 맛있는 걸 엄마한테 해도 되나 물어보고 너는 몇 단지에 사는데? 똑똑한 게, 영락없이 판사감이구먼 2. 그 뒤에는 반드시 부모가 있다. 자네, 아침 밥은 얻어먹고 있나 왜 다르게 받아야 해요? 엄마, 난 다른 걸로 주세요 잘 제발 좀 내버려 두세요 네가 알기는 뭘 안다고 그래 너는 구구단도 하나 못 외우니? 너, 정말 잘했어, 네가 최고야 그 뒤에는 반드시 부모가 있다 3. 권위주의는 몰라도 권위는 살려줘야 이러다가 또 나라 빼앗기고 말지 댁이 뭔데 그래요 아빠, 나 학교 갖고 가 물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헤엄을 칠 수가 없다 절대도 주눅 들면 안 되네 선생이 알긴 뭘 알아? 너는 가서 공부나 해 떠날 때, 심어놓고 떠나는 건데 4. 이제는 어머니가 일어설 때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신화가 있다 죽은 조상 여행시켜 드리기 용돈도 주지 않으려면 무엇하러 낳았어 나는 형이 아니라구요 그렇지만, 반드시 애는 낳아야 한단다 엄마, 나 얼마 주고 사왔어? 머리를 두 배로 활용하는 법 어머니가 일어설 때다 5. 사회와는 떨어져 살 수 없는 교육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나는 이제야 불가능함을 알았다 누구보다도 휴지를 잘 주음 사브라와 사람의 아들 인간 개발 교육을 최우선으로 젊음은 그렇게 길지 않다 싸라기 한 알만 하거늘 누구를 위해 살아왔는데 사회와는 떨어져 살 수 없는 교육 지식을 팔아먹는 장사꾼이어야 하는가 저자 소개 류태영 류태영 박사는 1936년 전북 임실에서 출생하여 건국대학교와 한국 성서신학교를 졸업한 후, 1968년 덴마크 정부 초청으로 덴마크 노딕 농과대학에서 유학하고 이스라엘 정부초청으로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에서 연구하여 사회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이스라엘 국립 벤구리온 대학에서 교수로 강의했으며, 건국대학교 학생처장, 농과대학장, 부총장을 역임한 후, 지금은 건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리고 대산농촌문화재단 이사장, 도산 아카데미 연구원 원장, 한국 이스라엘 친선협회 상임 부회장 등 사회 봉사 활동에도 바쁘게 참여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잘 사는 작은 나라' '이스라엘 그 시련과 도전' 'Cooperative Farming In Israel' 'Village Development Pattern From Above And From Below'가 있으며 전공 분야 논문 60여편을 국내외 학계에 발표하였다. 책 머리에 '교육은 믿음에서 비롯된다.' 1995년 1월 하순, 오랫동안 아이들과 함께 이스라엘에서 생활한 경험과 나름대로의 연구를 바탕으로, KBS 2 텔레비전 '어머니 여러'에서 '탈무드와 이스라엘의 자녀 교육'이라는 주제로 한 시간의 특강을 했으며 그 후, 시청자들의 반응이 너무 좋다고 하여 2월 초에 다시 한 시간의 특강을 속강으로 방영했다. 그리고 4월에 KBS 1 텔레비전 '아침 마당'에서도 강의를 하게 되었다. 곧이어 대구 MBC 텔레비전에서도 일요특강 '부모 역할 다시 한 번 생각합시다'라는 프로그램에 응했다. 시청자들로부터 걸려온 전화만도 100여 통이 넘었다. 서울은 물론 부산, 광주, 대구 심지어는 제주도에서까지 걸려왔다. 감사하다는 말, 격려하는 말로부터 실제 아이들 문제에 대한 다양한 질문이나 상담의 전화도 있었다. 그 중에는 그러한 내용의 책을 구입하고 싶으니 소개해 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 자신이 불민한 관계로 방송한 내용과 똑같은 책을 출판한 일이 없어 그분들에게 상당히 송구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와 비슷한 책을 출간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절판된 지 오래다. 아무리 바빠도 책을 써달라는 요청이 시청자뿐만이 아니라, 출판사측에서도 답지됐다. 그러나 그러한 요청만 있다고 해서 선뜻 책을 쓸 수도 없어 무척 망설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아이들의 교육을 말하기에는 많은 두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망설임 속에서 책을 출간하기로 결심한 것은 우리의 교육을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는 교육자적인 양심에서였다. 그리하여 우선, 그동안 강연한 강의 내용과 신문, 잡지에 기고한 원고들을 정리하고, 절판된 책 "이스라엘 그 시련과 도전". '잘사는 작은 나라' 등에 실린 글도 발췌하고 새롭게 보강할 부분들을 추가하여 이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살을 에이고 뼈를 깎는 고통과 슬픔으로 점철된 2천 년의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불모의 사막에 이스라엘 공화국을 건설한 불사조와 같은 생명력과 1억 5천만 아랍 민족의 끊임없는 전쟁 위협 속에서도 굳건히 그들만의 역사를 지키고 발전시켜 온 유태인의 민족 정신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탈무드"를 통하여 전승해 온 그들의 신앙과 교육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종교와 교육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엄격히 말한다면 그들의 종교 또한 그들의 교육과 아주 밀접한 관계여서, 교육과 종교를 나누어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그들이 행하는 교육의 실체를 나름대로 우리의 정서에 어울리도록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그들을 이해하고 우리의 교육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자녀 교육에 작으나마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집필의 방향을 설정하였다. 단순히 이스라엘의 가정 교육을 통한 자녀 교육과 학교 교육만을 소개하는 것은 별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교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내 자신이 학생들을 지도하며 겪은 경험이나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 그리고 사회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을 예화로 사용하였다. 가능하면 구체적인 상황들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이 읽고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 뜻에서였다. 여기에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갖은 고난을 겪으며 성장한 나의 이야기도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이것은 한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그리고 교육 중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역설하고자 함이었다. 우리 민족이 살아나갈 길은 오직 바람직한 자녀 교육에 있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사람다운 사람을 양육하고 교육해 내는 일만이 미래 한국 사회에 밝은 빛을 주는 지름길인 것이다. 나는 유태민족을 연구하면서 그들의 교육을 알게 되었고, 그중에서도 아이들의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교육의 근본은 정신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신앙을 근본으로 한 정신이라는 것을. 내가 성장한 과정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앙이 무엇보다 중요했었다. 그리고 내 미래의 생애를 보내는 데에도 신앙은 항상 그 중심에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는 속에서 모든 의지와 지혜의 샘이 끊임없이 솟아난다. 그 속에서 포기하지 않는 백절불굴의 용기도 생긴다. 아이들의 교육에는 종교와 같은 믿음이 필요하다. 아이들에 대한 믿음, 선생님에 대한 믿음, 이러한 것이 진정한 인간 교육을 하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아무쪼록 이 작은 한 권의 책이, 자라는 아이들과 그들을 교육하는 부모, 선생님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끝으로, 이 책을 낼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많은 독자 여러분, 졸고를 기꺼이 출판해 주신 성현출판사 조유성 사장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1995년 10월 류태영 1.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일기, 소중한 마음의 친구 얼마 전에 한 손님이 연구실로 찾아왔다. 아이를 동반하고 온 그 사람은 아이에게 교훈이 될 만한 말 한마디를 나에게 요청했다. "아이가 올해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아이에게 어떤 전기도 되는 시점이고 하니 박사님께서 좋은 말씀을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나이답지 않게 조숙하여 심지가 깊다는 아이는, 책을 가까이 해서인지 정서적으로도 무척 안정되어 보였다. "글쎄요, 갑작스레 그렇게 요청하시니 좋은 길라잡이 될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군요." 사실, 학생들을 대하는 것이 내 직업이어서 제자들에게는 공부 이외에도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얘기들을 곧잘 해주곤 했는데, 너무 갑작스런 요청이라서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삶의 중요한 시점에 서 있는 아이에게 한 마디의 말은 그의 일생을 좌우할 수도 있어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아이까지 동반한 사람의 요청인지라 거절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창 밖으로 눈을 돌려 짐짓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아하, 바로 이거구나.' 그것은 일기장이었다, 지나간 세월을 정리도 할 겸하여, 그동안 써온 일기장들을 옮겨 놓았던 것이다. 나이만큼이나 수북하게 쌓인 책들 가운데 한 권을 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래, 네 이름이 현태라고 했지? 책을 좋아하니,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겠구나. 그런데 일기는 쓰니?" "... 가끔씩요." "그렇구나, 이것 좀 한번 볼래? 자, 한번 볼까!" "아니, 이게 무엇입니까. 일기장 같은데 무슨 금전출납까지 쓰여 있는 것 같군요." "예, 이건 제 중학교 때의 일기장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사십 여년 된 일이장이군요. 다른 일기장과 다른 것이 있다면, 보신 것처럼 금전출납부가 달려 있는 거지요." 네 스스로도 기억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려고 애쓰며 말을 하면서도, 나의 그 시절이 퍽 궁금했다. 나의 삶은 어떤 것이었던가.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의 내가 존재하고 있는 그림은 어떤 모습일까. 겉장을 넘겨보았다. 거기에는 1년 동안의 생활 목표가 적혀 있었다. 1. 하나님을 신봉하여 주 안에서 살아야 한다. 2. 민족을 사랑하고 국가를 위하여 일하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3. 부모님을 공경하고 효를 실천하는 된사람이 되어야 한다. 4. 친구를 잘 가려 사귀어 장래에 같이 일할 수 있는 동료를 지금부터 모으고 희망 속에 힘을 길러야 한다. 5. 일할 수 있는 힘은 지, 덕, 체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그 다음 장에는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방법들이 적혀 있었다. "참, 대단하십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물론입니다. 이것은 제 인생의 나침반인 걸요." 사실, 일기는 나의 스승이요, 친구이자 지도자였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나 자신의 약속의 다짐이요 기록이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쓰기 시작하셨습니까." "아마도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산골 마을에서 자라다보니 친구가 많지도 않았지만, 저는 워낙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시간도 없었지요. 학교에서 파하면 곧장 지게를 지고 나무도 하고 꼴도 베어야 했으니까요.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 하던 시절 아니였습니까. 그러니 일기야말로 내 가장 친한 친구요, 마음의 위안이었지요. 밤마다 일기장을 마주하고 얘기도 하고 하소연도 하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 내가 대할 수 있는 것은 산과 개울 그리고 한없는 노동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읽을 만한 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일기와 친해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계획하고 반성하는 것은 쉬운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을 텐데요." "물론입니다. 작심삼일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너무 거창하지 않게 계획을 세운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지요. 모든 게 마음 먹기에 달려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저 같은 경우에는 1년 계획을 세운 다음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1주일의 계획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주에는 '거짓말을 하지 말자.', 또 다음 부에는 '하루에 한 가지 이상 착한 일을 하자.' 이런 식이었지요. 아이도 있고 하니 제가 기억나는 것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지요, 대학에 다닐 때였습니다...." 그 주의 내 실천 목표는 하루에 한 가지 이상 착한 일을 한다는 거였다. 그 당시 나는 양평동에서 청소부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양평동에서 파고다 공원 뒤편에 있는 학교까지 통학할 버스비도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생각다 못해 비용면에서 훨씬 저렴한 기차 통학을 하기도 작정했다. 그러니까 양평동에서 영등포 기차역까지는 걸어서 가고, 영등포에서 서울역까지는 기차로, 그리고 다시 서울역에서 낙원동까지 걸어서 등교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항상 무슨 착한 일 할 만한 것이 없을까, 반드시 착한 일을 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져먹곤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울역 육교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기차에서 내린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난 시골에서 올라온 듯한 할머니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그 할머니는 보따리를 이고 들고, 무척 힘들게 난간을 붙잡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할머니를 발견한 내 모습을 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함박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바로 그거였다. 착한 일이 어디 큰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얼른 달려가서 할머니의 짐을 들어주었다. 몇 번이고 고맙다는 할머니를 뒤로 하고 학교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정말 하늘로 날아갈 듯했다. 그런 일은 아침마다 계속되었다. 그것은 그 주일에만 끝나지 않았다. 그 주일의 목표는 대학 생활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가지고 착한 일을 했다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아주 작은 일들이 모여 따뜻한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빗방울이 모여 시냇물이 되고 시냇물이 모여 강물이 되듯, 이렇게 세상이 각박해진 것도 따지고 보면 작은 일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데서 온 것 아닌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내 자신에게 약속을 지켰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러한 약속은 계속되었고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 그러니까, 목표를 세우고 실천함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결산을 해야 하는 거지요. 그 주의 결산, 그리고 그 달의 결산, 그 해의 결산, 그러면 구체적으로 반성도 되도, 다시 새로운 결심이 생기고 그러더군요." 내가 얘기하고 있는 동안 아이는, 문화비 2,500환, 뭐 몇 환하고 쓰여 있는 금전출납 기록이 더 신기한 듯, 그것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다가 좀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아이의 아버지가 물었다. "어린 시절부터 일찍 돈을 아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아이들을 한번 보세요.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도 돈의 의미를 몰라요. 심지어는 직장인들도 돈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이 요즘의 젊은이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장가를 가야만 돈을 모을 수 있다는 말도 나오는 거지요. 어려서부터 스스로 돈을 관리하는 방법을 익힌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지요." 그러면서 나는 이스라엘의 교육을 예로 들었다. 이스라엘의 아이들은 엄격히 말해서 용돈이 없다. 집안 일을 돕든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하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는 것이 이스라엘의 아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려서부터 돈의 소중함을 배운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치와 낭비를 모른다. 항상 그들은 어려서부터 지출 계획서와 사용 내역서를 작성함으로써 금전 관리를 생활화하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돈의 사용처를 확인함으로써 돈을 절약할 수도 있겠지만, 써야 할 곳에 틀림없이 돈을 사용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지난 달에 문화비가 적었다고 생각되면 그에 따른 생활의 반성을 하고 바람직한 문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규모를 조정하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정서 함양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문화 생활에는 매우 소극적인 것 같아요. 아직도 어려웠던 시절의 습관 때문인지 문화비의 지출은 사치라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는 것 같구요.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도 생활의 계획이 없고 게으른 때문이겠지요." 대학 시절까지 나의 생활은 시간과 경제적인 면에서 무척이나 쪼들린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문화 생활을 통한 정서 함양에 소홀함이 없도록 스스로 많은 배려를 했다. 문화비의 지출을 미래에 대한 투자로 여겼던 것이다. 그렇지만 남들처럼 문화비 지출을 늘릴 수도 없었던 것이 그 시절 나의 고달픔이었다. 그래도 방법은 있었다. 영화 관람이 계획에 들어 있으면 동시 상영관을 찾았다. 음악 감상이 필요하다 싶으면 지금의 카페와 비슷한 음악 감상실로 갔다. 그리고 선열들의 넋이 어린 묘지를 찾아 성묘도 하고 묘비명을 베껴 오기도 했다. 명사들의 강연이 듣고 싶으면 대중 강연회를 찾아 한강 모래밭을 찾았고 부흥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한 번은 미술관에 들른 적이 있다. 하지만 신문팔이에 구두닦이를 전전하고 청소부가 고작이던 나에게 그림이라는 것은 도무지 낯선 곳에 존재하는 신선놀음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그림이 무엇을 말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길로 나는 서점으로 향했다. 그러나 책을 살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몇 시간 동안을 나는 미술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서점을 나올 때에는 허기도 지고 다리도 아파왔지만 뿌듯한 성취감으로 허기진 배고픔도 달랠 수 있었다. 그러나 돈이 많이 들어가는 여행은 문화비로 충당하기가 어려웠다. 무리해서 그렇게라도 하는 날에는 그야말로 깡통을 차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품목은 사업 계획서를 작성했다. 그리하여 1년이면 1년, 기간을 정하여 돈을 모아 여행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일기를 쓰는 사람은 결코 곁길로 새는 법이 없다. 자기에게 한 약속과 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곁길로 새다가도 곧 제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일기를 제대로 쓰는 사람은 자기 삶을 누구에 의해 끌려 다니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운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기 쓰는 습관은 어려서부터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삶의 참의미를 되짚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나이 들어 사람이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은 추억이다. 추억이 많은 사람일수록 삶을 풍요롭게 산 것이다. 요즘은 아이들에게도 성인병이 많이 발병한다고 한다. 모두가 비만에 원인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 비만의 원인은 무엇인가. 물론 식생활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스트레스에 더 근본 이유가 있다고 한다. 마음껏 뛰어놀고 싶어도 학교성적과 가기 싫은 학원에 매달려야 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인 것이다. 아이들에게 일기는 스트레스 해소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일기장에 대고 마음껏 불만을 토로하다 보면 웬만한 스트레스는 금방 해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아이들의 일기는 보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스트레스에 빠져들게 된다. 누군가가 자신의 일기장을 보고 있다고 생각할 때, 아이들은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아예 일기쓰는 것을 포기하기도 하고 보여주기 위한 일기는 진정한 자아와 나누는 대화나 반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 그러니까, 아이들의 일기장은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는 소중한 마음의 친구 하나를 잃게 되는 것이지요. 정 걱정이 되면 아이가 일기를 쓰고 있는지 확인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만하면 아이에게 도움이 되었나 모르겠군요." "물론입니다. 아이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돌아가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마음 속으로 바랐다. 소중한 추억을 충실히 쌓아가길. 그리하여 풍요로운 인생이 되길. 나 후따 벤조와 포레스트 검프 이스라엘에서 돌아온 후, 우리 가족에게는 한 달에 한두 번씩 치르는 새로운 행사가 하나 생겼다. 그것은 이름하여 '염하미시팍하'라는 가족의 날인데 이 날만큼은 말 그대로 온 가족과 함께 보낸다. 가까운 곳으로 여행도 떠나고 박물관을 견학하거나 공원을 산책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가끔씩은 무관심해지기도 하는 가족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느껴보곤 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온 가족이 집에 모여 비디오 한 편을 보았다. 아카데미 상도 타고 매스컴에도 많이 다루어진 영화 "포레스트 검프"였다. 내용을 조금 요약하면 이렇다. 주인공은 아이큐 75의 포레스트 검프라는 남자로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 그는 선천적으로 저능아이인데다 척추 이상까지 있어 양다리에 보조물을 달고 다닐 수밖에 없다. '너는 남과 다르지 않다. 저능아란 단지 다른 사람보다 지능이 좀 모자라는 것뿐이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는 항상 용기를 심어준다. 친구도 있을 리 없다. 친구라고는 딸아이를 성추행하기 일쑤인 주정뱅이 아버지와 함께 사는 제니라는 여자 아이만 있을 뿐이다. 그에게는 세상에서 자기를 인정해 주는 어머니와 제니의 말만이 전부였다. 그런 그는 학교에 입학하는 일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학교에서는 그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입학을 거부하는 학교 관계자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리하여 결국은 특수 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에 아이를 입학시킨다. 그러나 포레스트 검프는 친구도 하나 없이 아이들에게 항상 놀림만 당한다. 그런 포레스트 검프에게 하루는 그의 일생을 완전히 뒤바꿔버리는 일대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 날도 포레스트 검프는 아이들로부터 심한 구타와 놀림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에게 신의 계시가 내린 것이다. "포레스트, 달려! 무조건 뛰란 말이야!" 그것은 제니의 목소리였다. 무거운 척추 보조물을 달고 있는 그는 달린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제니의 눈빛과 마주치자 그는 있는 힘껏 달린다. 아이들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그러자 또 한 번 구원의 소리가 들려왔다. "포레스트, 뛰어! 더 빨리 뛰어!" 그 순간, 놀랍게도 그의 다리에 운명처럼 달려 있던 보조물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바람처럼 달릴 수 있게 된다. 그 후 포레스트 검프에게 달린다는 것은 곧 기도와 같은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는 여전히 아이들의 놀림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 날도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쫓기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달리던 포레스트 검프는 미식 축구 경기가 열리고 있는 운동장 한가운데로 뛰어들어간다. 오직, 아이들로부터 피하기 위한 그의 달리기는 그칠 줄을 모른다. 그는 미식 축구 감독의 눈에 띄어 대학에 입학할 자격을 얻게 된다. 그리고 4년 내내 미식 축구 선수로서 달리기만 한다. 그리고 졸업식 날, 그에게는 또 한 번 인생의 커다란 갈림길에 서게 된다. 군 입대 홍보를 하러 온 군인들로부터 감명을 받은 것이다. 포레스트 검프는 곧바로 군대에 자원입대를 한다. 이때부터 그와 제니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져 간다. 그리고 포레스트 검프는 월남전에 참전하게 된다. 거기에서 그는 돈을 벌어 새우잡이 배의 선장이 되기를 꿈꾸는 흑인 동료를 만난다. 그는 프레스트 검프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러나 처음으로 전투에 참전한 그의 부대는 크게 패하게 된다. 그는 부대원들을 구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물론 항상 마음 속으로부터 들려오는 무조건 달리라는 제니의 격려 덕분이었다. 그는 부상 당한 동료들을 둘러메고 사지를 뚫고 달려나온다. 그러나 그가 온 힘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까이 지냈던 흑인 동료는 죽고 만다. 부상으로 제대한 포레스트 검프는 그 흑인 동료와 한 약속대로 새우잡이 배 한 척을 구입해 선장이 된다. 그러나 새우는 잡히지 않는다. 그러던 중, 그가 구해준 소대장을 만나게 된다. 그 소대장은 하반신 불구가 되어 세상을 원망하며 폐인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포레스트 검프는 찾아온 소대장을 새우잡이 배의 갑판장으로 채용하고 함께 새우잡이에 나선다. 그러나 여전히 새우는 잡히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어느 날, 엄청난 태풍이 몰아친 것이다. 둘은 온갖 고통을 당하고서도 좌절하지 않고 항해하여 마침내 배를 구해낸다. 하지만 그 지역에 있던 배는 모두가 침몰해 버렸다. 남은 배라고는 포레스트 검프의 배 한 척뿐이다. 그리고 한 마리도 잡히지 않던 새우가 엄청나게 잡히기 시작한다. 둘은 많은 돈을 벌게 된다. 배도 수십 척을 갖게 된다. 포레스트 검프는 그 많은 돈을 자선 단체에 기부한다. 월남전에서 죽은 흑인 동료의 가족에게도 그의 몫이라며 꾸준히 돈을 보낸다. 그러나 그에게 좋은 일만 일어날 리는 없었다. 신과 같은 존재였던 어머니가 죽은 것이다. 그는 새우잡이 배를 비롯한 모든 재산을 소대장에게 위임하고 자신은 잔디를 깎는 정원사로 일을 하게 된다. 아무 의욕 없이 온종일 잔디 깎는 일로 소일하던 그는 어느날 갑자기 달리기를 시작한다. 몇 년이 계속되는 그의 달리기에 온 매스컴이 집중한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도 생긴다. 수많은 인터뷰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터뷰에 대한 답변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나는 다만 달리고 싶기 때문에 달린다.' 그리고 그는 중얼거린다. '달리는 것은 모든 과거를 정리해 준다.' 그만큼 어머니의 죽음과 사랑하는 사람의 떠남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달리기를 함으로써 오히려 그 역경을 딛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마음의 정리가 끝나자, 그에게서 무슨 말인가를 기다리는 수많은 추종자들 앞에서 그는 말한다. '이제 지쳤다. 난 집에 가야 한다.' 집으로 돌아오자 그를 반긴 것은 그동안 수없이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한 제니의 편지였다. 그제서야 활기를 찾은 포레스트 검프는 그 길로 제니를 찾아간다. 제니를 만난 그는 그녀가 자기의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포레스트 검프는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던 제니와 결혼, 그 후 행복한 날들을 계속한다. 그러나 항상 어둡기만 했던 가정으로부터 벗어나 새가 되고 싶어했던 제니는 포레스트 검프와 아들 포레스트만을 남겨둔 채 새가 되어 세상을 떠난다. 이것이 대략의 영화 줄거리다. 헐리우드 영화치고는 모처럼 대하는 감동을 주는 영화였다. 다들 그랬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빠, 이 영화 어떻게 생각해요?" 조금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싶더니, 대학원 졸업반인 아들과 결혼한 딸이 동시에 나에게 소감을 물어왔다. "......글쎄다." 물론,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람보나 터미네이터로 막강한 힘을 과시하던 미국이 왜 하필이면 좀 모자라는 주인공을 선택했을까 하는 사회학적인 견해가 아니다. 그렇다고 톰 행크스의 연기력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그들의 사랑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저능아를 둔 어머니의 교육에 관한 것이다. 사실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착잡한 심경이었다. 만약 그러한 상황이 우리에게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저능아를 둔 우리의 어머니는 그 아이를 어떻게 했을까. 고아원에 방치한 아이들 중에는 저능아, 지체 부자유자가 상대적으로 많다고 한다. 그것은 입양을 원하는 국내의 가정들이 대부분 잘 생기고 똑똑한 아이를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언론의 보도를 통하여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정상에 못 미치는 아이들은 해외에 입양되거나 그대로 방치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면서도 '너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너는 다만 지능이 조금 모자라는 것뿐이다.'라는 단 한 마디의 말로써 자칫 열등감에 휩싸일 수 있는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낸 포레스트 검프의 어머니에게 박수를 보낼 수 없었던 것은 1등이 아닌 대부분의 우리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아이들 지능은 세살 때부터 비롯된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아이는 중학생 나이에, 심지어는 20대가 훨씬 넘은 나이에 머리가 트이는 경우도 있다. 절대로 조급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아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친구 중에 '나 후따 벤조'라는 친구가 한 명 있다. 그 때는 일제시대라 모든 교육은 일본어로 진행되고 있었다. 어느 나른한 늦은 봄으로 기억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일본인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졸고 있을 때 갑자기 "센세이('선생'이라는 뜻의 일본어)!" 하는 큰소리가 들려왔다. "센세이! 나 후따 벤조!" 모든 학생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일본어를 말할 줄은 물론 자기 이름조차 쓸 줄 모르는 아이였다. 일본인 선생님은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히려 역정을 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더 이상 말을 못하고 허리춤만 잡고 안절부절할 뿐이었다. 보다 못했는지 한 아이가 거들고 나섰다. "선생님, 저애 급히 변소에 가고 싶은가 봐요." 그제서야 아이는 구세주를 만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아마도 아는 일본어는 없고 그렇다고 참을 수는 없으니까 온몸으로 그렇게 말했을 터였다. 그러니까 '나'는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의사 전달을 할 수 있었지만 급하다는 말은 찾을 수가 없어 '후딱'을 연이어 발음하고, 그래도 '벤조'는 우리의 변소와 비슷하니까 갖다 둘러댄 것이 '나 후따 벤조'가 된 것이다. 그렇게 통역을 통해 아이는 위기를 모면했지만 그 아이는 평생을 '나 후따 벤조'라는 별명을 짊어지고 다녀야 했다. 요즘에도 동창 사이에서 '나 후따 벤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렇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를 구박한 적이 없었다. 구박한다고 해서 아이의 머리가 좋아진다거나 성적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실력으로는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빈둥거리는 아이를 보고 동네 사람들이 걱정하는 투로 그의 아버지에게 조언을 하곤 했다. "어디, 기술이나 가르치지 그러십니까."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절대로 조급해 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머리가 트이겠지요." 결국 그의 아버지의 기다림은 보람이 있었다. 해방이 되자 각급 학교에서 대대적으로 보결생을 모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논 팔고 소도 팔아 그를 중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고등학교만은 달랐다. 진학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영부영 아버지를 따라 농사를 거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의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늦게 팰 옥수수인가 보지요." 동네 사람이 걱정하는 척하면 그의 아버지는 항상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한 대에 나고서도 일찍 패는 옥수수가 있고 늦게 패는 옥수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한술 더 떠서 늦게 팬 옥수수가 햇볕도 많이 받아 당분도 많고 더 쫄깃하다고까지 덧붙였다. 아버지의 믿음대로 그에게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왔다. 바로 6.25가 터진 것이다. 피난과 사망으로 한 차례 보결생 모집이 있었다. 그는 곧바로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공부를 못해 놀림을 받던 그가 고3이 되자 갑자기 실력이 향상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머리가 트인 것이다. 급기야 그는 지방 국립 대학에 장학생으로 진학,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지방 유지가 되었다. 이런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상대성 이론'으로 세계 물리학계를 발전시킨 아인슈타인은 바보 천치에 말더듬이, 천성적인 게으름뱅이였다. 오죽하면 선생님이 제발 학교를 그만 둬 달라고까지 했겠는가. 그 시절 그의 학적부에는 '아무런 가망이 없는 아이'라고 적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1921년. '전기 소량 광전 효과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것도 뒤에서 사랑과 믿음으로 그를 가르친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넘어지려는 아이는 왜 부축해 주는 거요 아내가 친정집이나 여행을 떠나 며칠이라도 머물게 되면 집에 있는 남편들은 대개가 한편으로는 불구가 된다. 아침 준비를 하려고 부산하게 주방을 들락거려 보았자 그릇들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고, 겨우 찾았다해도 이놈의 압력 밥솥은 또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라면 몇 봉지 사다가 아이들과 대출 때우고는 출근 준비를 서두르는데 그것 또한 보통 일이 아니다. 속옷은 물론이고, 와이셔츠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아무 옷이나 대충 차려 입고 출근했다가는 회사 직원들에게 책잡히기 일쑤다. "과장님, 어제 댁에 못 들어가셨나 보죠?" "왜, 내가 그렇게 보이나?" "거울 한번 보십시오. 와이셔츠도 그렇고, 어디 그게 어울리는 넥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거, 자네는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아침부터 이렇게 생트집인가.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자네 일이나 잘하게." 그래도 이렇게 부하 직원하고 농담까지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얼렁뚱땅 넘어가버리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뒷소리를 들어도 할말이 없게 된다. '과장님, 바람났나 보지?' '밤일이 시원찮은가 봐.' '하기야, 그럴 때도 됐지.' 이쯤 되면 아예 하루 일과는 엉망이 되어버리고 만다. 사실, 중년이 된 우리의 남편들처럼 불쌍한 세대도 없을 것이다. 어려서 잘 먹길했나, 아니면 무슨 문화적 혜택을 잘 받았나.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겨우 먹고 살만 해지니까, 이제는 신세대니 여성 해방론자니 마구잡이로 등장해 직장에서는 상사 눈치에 부하 눈치까지 봐야 할 판이고, 집에서도 아내 눈치에 점점 설 땅이 좁아지는 것이 우리 중년의 남편들 아닌가. 오죽하면 웃지 못할 '겁없는 남편 시리즈'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겠는가. 그렇다고 자식들을 시켜 먹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치마폭에서 빙빙 돌던 자식들이 집안 살림을 제대로 아는 바 없겠지만, 설사 안다고 해도 솔선하여 아버지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옷을 챙겨주는 자식은 많지가 않다. 오히려 그런 자식 하나만 있더라고 그는 엄청나게 축복받은 사람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퇴근을 해도 아이들 코빼기를 보기가 힘든 실정이다. "애들아, 아빠 왔다." 마지못해 먼저 큰소리로 일벌레 돌아왔습니다 하고 외쳐도 아무 반응도 없다. 대충 샤워를 하고 식탁을 둘러보니 아침에 라면 끓여 먹은 그릇들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다. 화가 나서 큰 딸아이 방으로 뛰어가 문을 벌컥 열자 오히려 아이가 먼저 호통을 친다. "아빠! 아빠는 노크도 안 해요?" 어이도 없고 기까지 한풀 꺾인 우리의 남편은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오히려 빌어야 할 판이다. "난 네가 방에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너는 아빠가 그렇게 불렀는데 아무 기척도 없는 거냐?" "보시면 몰라요? 내일 모레면 시험인데 공부래야 하잖아요." "그래, 열심히 해야지. 그런데 동생들은 다 어딜 간 거냐?"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때가 되면 들어오겠지요." "음, 그렇겠구나. 그럼, 밥은 먹었니?" "밥 생각 없어요. 아빠, 이제 그만 물어보시고 제발 나가주세요, 네?" 그렇게 쫓겨나오자 어디 갔다 오는지 막내아이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오며 소리친다. "아빠, 배고파 죽겠어요. 우리 자장면 시켜 먹어요." 결국, 그날 저녁밥을 대신해 자장면 한 그릇으로 시장끼를 때우고 만 우리의 남편은 지친 몸으로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생각한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거지?'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거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한 대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뼈빠지게 돈 벌어 키워준 대가가 겨우 이런 것인가 하는 회한에 빠져들게 된다. 그런 노여움은 마침내 아내에게로 향하고 만다. '집구석에 하루 종일 쳐박혀서 도대체 뭘 한 거야. 애들 교육을 제대로 시켰나, 어디 살림을 제대로 했나. 어디 돌아오기만 해봐라. 내 요절을 내고 말 테니.'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아내가 돌아오면 남편은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화를 일순간에 폭발시킨다. 하지만 어디 요즘 아내들이 인제 나 죽었소 하고 가만히 있겠는가. 결과는 너무나 명백하게 아내의 승리로 끝나기 마련이다. "그러는 당신은 뭘 잘했다고 큰소리예요! 매일 회식이다 야근이다 하면서 밤늦게 들어와 아이들한테 해준 게 뭐예요. 그렇다고 누구처럼 돈이나 많이 벌어오면 내 말을 안 하지." 이런 단 몇 마디로 완전히 케이오 패한 남편은 그래도 내일 아침을 얻어먹기 위해 '그래, 내 잘못이다. 그래도 하나뿐인 내 마누란데 이를 어쩌겠나.'하면서 살며시 아내를 안아 위기를 넘기고 만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웃어 넘기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살펴보면 우리 이웃 어디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 내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백 번을 말해도 이런 모든 문제는 교육에서 비롯된다. 그것도 가정 교육의 부재에서. 어려서부터 남존여비라는 그 좋은 제도 속에서 실컷 대우를 받고 자란 우리의 남편들은 세상의 변화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어어, 이게 아닌데 하다보니 어느새 늦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자율성과 자립성의 부재를 불러온 우리 교육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아무런 하는 일 없이 용돈을 타내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것을 이상스럽게 받아들이는 부모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아이들 중에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부모에게 손을 내미는 경우도 있다. 아이들에게 돈의 가치를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스스로 무슨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아이는 정말로 그 돈의 의미를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스스로 돈을 관리하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곧바로 자율성과도 연결되고 독립적 사고와 연결이 된다. 내가 이스라엘에서 유학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 유태인 집안에 초대를 받아 가족과 함께 방문하게 되었는데, 난 그 집에서 놀라운 일을 몇 가지 경험할 수 있었다. 하나는 그 집의 갓난아이 때문이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마침, 내가 그 집에 도착했을 때, 갓난아이와 함께 놀고 있었다. 눈이 파란 게 꼭 인형처럼 예쁜 아이였다. "그 녀석, 아주 귀엽군요. 돌은 지났습니까?" "예, 내일 모레면 돌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한참 서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것이 매우 특이했다. 우리의 경우는 아이를 세워놓았다가 쓰러지기라도 할라치면 행여나 다칠세라 재빨리 부둥켜 안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약, 그러다가 아이가 진짜로 넘어지기라도 하면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구박으로 무안당하기 일쑤지 않은가.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서게 하는 데 매우 열심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이는 발에 힘을 주는가 싶자 그의 아버지는 순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아직 땅을 짚고 설만한 다리의 힘도, 요령도 모르는 아이가 한참을 지탱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리라. 아버지가 손을 놓기 무섭게 아이는 옆으로 기우뚱거리며 쓰러질 순간이었다. 그때 나도 모르게 아이의 아버지보다도 내 손이 먼저 쓰러지는 아이를 움켜 잡았다. 아니, 내 손이 먼저 나간 것이 아니라 내 손만 아이를 잡으려 했던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결코 쓰러지는 아이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내 행동이 이상한지 아이의 아버지가 물었다. "한국에서는 아이들을 다 그렇게 가르칩니까?" "뭘 어떻게 말씀입니까?" 내 행동을 너무도 당연히 생각하여 아무런 이상함을 못 느끼고 있는데 아이의 아버지는 아주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가 쓰러지려 할 때 다들 그렇게 붙잡아 주느냐는 것입니다." "그야 부모의 입장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닙니까? 만약 아이가 넘어져 다치기라도 한다면 어쩌겠습니까." "물론 그러한 사고방식에도 일리는 있지만 저희 유태인들은 결코 아이가 넘어져도 잡아주질 않습니다.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지요." 그만한 일에 아이의 장래를 연결시키는 것이 의아했지만 그의 설명을 듣고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사람은 결국 모두가 혼자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주 어려서부터 자립심을 길러주어야 하죠. 이제부터 너에게는 아무도 없다. 이 세상은 너 혼자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무언 중에도 심어주는 것이지요." 말을 이어가면서도 그는 아이에게 다시 서는 법을 가르쳤다 아이는 계속 섰다 싶으면 넘어지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의 입에서 울음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동작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가끔씩 얼굴에 웃음꽃을 내비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정서상의 차이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과잉보호가 판을 치고 있는 우리로서는 한 번쯤 곱씹어 생각하고 넘어갈 일이었다. 저녁 식탁에 둘러앉자 초등학교 고학년에 다니고 있는 그 집의 큰아이가 작은 쪽지 두 장을 들고 그의 아버지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또 하나의 충격이었다. "아빠, 지난 달 지출 내역서하고 이번 달 용돈 사용 계획서예요." 아직 돈도 제대로 모를 아이가 어떻게 그런 것을 다 작성할 수 있을까. 대학생쯤 되어서야 그런 것을 다 작성할 수 있을까. 대학생쯤 되어서야 그런 것을 가끔 접할 수 있는 것이 우리나라 아이들의 경우 아닌가. 물론 나에게도 그런 습성이 있어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름대로 돈의 수입과 지출, 그리고 예산을 작성해 왔지만 우리 아이들에게서는 매우 보기 힘든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래, 지난 달에는 아주 알맞게 사용했구나. 네가 작성했던 사용 계획서하고 별 차이가 없어. 그런데 지난 달에는 친구를 위해 쓸 액수가 부족한 것 같다고 아빠가 말했었는데, 어디 보자." 아이의 아버지는 지난 달 지출 내역서를 꼼꼼히 훑어보았다. 우선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지출의 내역보다는 아이가 자기 계획대로 돈을 잘 관리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아이의 관리 능력을 키워주기 위한 방법일 터였다. 그 다음에야 지출 내역을 지적해 나갔는데, 그것도 지출의 규모보다는 올바르게 쓸곳에 사용하였는가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리고 나서 아이의 아버지는 이번 달 용돈 계획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지난 달보다는 용돈을 많이 책정했구나. 으음, 친구들 생일이라. 그래, 그러면 넌 이 늘어난 용돈을 어떻게 마련할 생각이냐?" "아빠, 며칠 있으면 방학이잖아요. 그러면 시간도 많이 남을 테니까 집안일도 더 거들고 아르바이트도 할 생각이에요." "그래, 그렇게 열심히 하겠다니 참, 기특하구나." 당연히 '아빠가 용돈을 올려주시면 되잖아요.' 해야 할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도 뜻밖이었지만, '공부나 열심히 하지, 일은 무슨 일이냐.' 라고 해야 할 아이의 아버지 입에서 나온 말도 저말 내 상식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마치 내 귀에는 주인과 종업원이 나누는 대화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집을 나오면서 나는 유태인이라는 어마어마한 집단이 어떻게 창출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의 꼬리를 조금은 잡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스라엘에서 몇 년을 산 후에야 난 그들의 교육관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이들을 절대로 자신의 소유물로 대하지 않았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그들은 하나의 인격체로서 성장하도록 아이들의 장래를 바라보며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유태인 아이들은 중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부터 대부분이 부모로부터 정신적, 물질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어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태인의 교육은 한쪽만을 고집하며 아이를 가르쳐 결국은 커서도 불구 신세를 면치 못하게 하는 우리의 자녀 교육에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넌 청소를 잘 하잖니 아이들을 이국에서 키우다보니 아무래도 아이들이 소외받지나 않을까 염려되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나는 아이들에게 이스라엘 아이들과 친구를 만들어 주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은행에 비상금으로 저축해둔 목돈 중에서 몇백 달러를 찾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8밀리 컬러 영사기와 월트 디즈니가 만든 만화 영화 '신데렐라'와 '로빈훗' 그리고 '뽀빠이' 등 5편을 사와서 딸아이에게 말했다. "너, 이번 주말에 친구들을 초대하거라." "왜요?" "응, 네 친구들에게 만화 영화도 보여 주고, 아빠가 동화도 들려주고 그리고... 음, 그래 맛있는 것도 해 줄께." "몇 명이나요?" "글쎄, 우리집 공간으로 보아, 네 동생도 있고 하니, 여덟 명 정도가 좋겠다. 그리고 네 반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골라서 불러오는 거야, 알았지?" "공부 잘하는 아이들과 친구 삼아주면 좋을 것 같아 무심코 한말이었다. 그런데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던 아이는 씨무룩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너, 무슨 걱정 있니?" "아뇨, 그런데...."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니? 그럼 어서 말을 해봐." "저... 아빠, 오글리라는 아이는 공부는 좀 못하지만 친절하고 성실해요. 그리고 나한테 잘 해주는데, 그 친구 불러도 돼요?" "응, 그래. 너한테 잘 해주는 아이라면 당연히 불러야지." "으음, 그리고 아빠, 에스더는 공부는 그저 그렇지만 칠판도 혼자 다 지우도 청소도 가장 열심히 하는데...." 아이는 내가 '공부 잘하는 아이'라고 한 말이 무척 마음에 걸렸던지 수줍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고 보니 같이 어울리는 아이 중에 공부 잘하는 아이는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추천하는 아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공부는 못하지만'이라는 단서가 붙었다. 아이가 그렇게 몇 명을 추천할 때까지 이제나 저제나 공부 잘한다는 녀석 하나쯤 기대했던 난 마지막 추천할 아이를 소개하자 은근히 화까지 났다. "아빠, 아빠가 그랬잖아요. 동생하고 사이좋게 놀아야 착한 아이라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공부는 못하고 동생하고나 잘 노는 아이를 추천한 것이다. "얘야, 그럼 너는 공부 잘하는 친구는 한 명도 없니?" 내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난 스스로 당황하고 말았다. 그렇게 굳어진 사고를 바꾼다는 것이 힘이 든 모양이다. 유태인들은 사람을 판단할 때 용감하다든가, 봉사 정신이 투철하다든가 하는 인간성을 최우선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교육의 목표도 인간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것을 어린 아이는 이미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아빠의 말투가 심상치 않자 아이는 애교를 부리던 태도에서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금세 죄인처럼 되어 있었다. "얘야, 아빠가 그냥 말해 본 거야. 그러니까 마음 놓고 친구들을 초청해라." 아이는 다시 기가 살아서 동생 손을 잡고 쪼르르 친구들을 초청하러 나갔다. 그날은 아이가 온종일 싱글벙글이었다. 주말이 되자, 초청된 아이들이 들이닥쳤다. 약속한 대로 영화도 보여주고, 이야기도 해주고, 재미있는 놀이도 시켜 주었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모르는 아이들은 한국의 전래 동화를 들려주는 나에게 가지가지 빛깔의 눈을 집중시킨 채 움직일 줄 몰랐다. '콩쥐와 팥쥐', '나무꾼과 선녀', '호랑이와 효녀' 같은 이야기는 아이들에게는 무척이나 신비로운 모양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아이들 관심의 초첨이 되었고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하루는 유치원에서 일일 선생님을 해 달라는 부탁이 왔다. 아이들에게 동화를 들려 달라는 것이었다. 학부모의 입장에서 거절할 수도 없어 아이들에게 우리 전해 동화를 한 편 들려주고 영화로도 유명한 '모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라고 했다. 내 이야기를 어떻게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까 의아스러워 나오려다, 발걸음을 멈추고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아이들은 동그란 눈을 초롱초롱 뜨고 생각에 골몰하다가는 쓱쓱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어떤 아이는 모세보다도 지팡이를 두 배 정도는 더 크게 그렸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도화지 전체를 한곳도 빠짐없이 온통 파란 색깔로 물들여 놓은 아이도 있었다. 아마도 그 아이에게는 모세가 기적을 이룬 그 바다가 가장 인상깊었던 모양이었다. 이처럼 유태인들은 아이들의 창의력을 키워주는데 그림 그리기를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신화적 상상력과 사상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훈련을 함으로써 창의력을 길러주는 한편 구체화되지 않은 사상이나 생각을 더 심화시키고 구체화시키는 능력을 가르치는 것이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사랑에서 영감을 얻고 상상으로 그린다.' 이는 저 유명한 초현실파의 거장 샤갈의 말이다. 물론 이 말은 '너의 그림은 다른 사람 그림과 달라서 훌륭하다.' 라고 어려서부터 샤갈의 기를 키워준 유태인 어머니의 말이 바탕에 깔려 있다. 샤갈은 그런 어머니 밑에서 유태인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훌륭한 화가가 되었던 것이다. 한 번은 아이를 데리고 어린이 미술 전시회에 간 적이 있다. 전국 어린이 미술 대회에서 수상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그 대상작이 아주 걸작이었다. 온통 까만 바탕 가운데 빨간 원만 두 개를 그려놓은 작품이었다. 생각해 보라. 만약 우리의 아이가 이렇게 그림을 그려놓았다면 우리의 어머니들은 당장 난리가 날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어머니들은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다 큰 어른의 시각으로 아이를 보려하기 때문에 아이의 상상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이 그림이 깜깜한 밤중에 자동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그렸다고 생각하기에는 우리 어른들의 시각이 너무나 빈곤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 똑같은 가치를 가지고 태어난다. 다만, 그림을 잘 그린다거나, 운동을 잘한다거나 하는 재능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재능을 잘 찾아 가르치면 누구나 행복한 인생을 누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한 학부형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학교에서 막 돌아온 아이가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엄마, 헤지는 오늘 그리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어요." '그런데 너는 아무것도 못 받았니?' 하마터면 내 입에서 튀어 나올 뻔한 말을 간신히 참고 그의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할까 기다렸다. "그래, 그것 참 잘 했구나. 너는 청소를 잘하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는 걸레를 들고, 콧노래까지 부르며 방을 닦는다, 거실을 닦는다 정신없이 수선을 떤다. 그러자 이번에는 누나가 또 말을 꺼냈다. "엄마, 오늘 학교에서 에스더란 아이는 피아노를 잘 친다고 박수를 받았어요." 아마도 자기는 칠 줄 모르니까 자격지심으로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래, 너는 하모니카를 잘 불잖니?" '그럼, 너도 학원 보내줄까?' 아니면 '그러게 내가 뭐랬어. 놀지 말고 열심히 연습하라고 했잖아.' 하는 식으로, 그래도 큰누나니까 좀 꾸중을 하겠지 하고 상상했던 내 생각은 또 한번 여지없이 빗나가고 만 것이다. 그러자 누나도 얼른 동생이 했던 것처럼 하모니카를 가지고 나와 잘 불지도 못하는 하모니카를 열심히 불어대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에서는 '콘서바토리움'이라고 부르는, 학교 이외의 예체능 과외 학원을 국가에서 설립하여 운영한다. 대개 우리의 고등학교 건물 정도 규모에 200명에서 600명 정도의 학생을 수용하는데 아무나 들어갈 수 있으며 비용도 무척 저렴하다. 우리네 같으면 당장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아이가 조르면, 아이를 학원에 보내려고 할 것이다. 마치 그것만이 아이들 기를 죽이지 않는 최선의 방법인 양 생각한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남이 한다고 따라하는 법이 없다. 모두가 학원에 갈 수 있는 여건이지만 아이에게 소질이 있다고 판단되지 않는 한 강제로 아이를 학원으로 내모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야단을 치는 일도 없다. 아이들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려고 끊임없이 대화를 한다.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교회에서 한 학생을 상담한 일이 있다. 그 학생은 무척 풀이 죽어서 나에게 물었다. "자살이 뭔가요? 자살을 해도 천국에 갈 수가 있나요?" "너, 무슨 일이 있구나, 그렇지?" 그 학생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 "예, 저희 아버지는 케이에스 제품입니다. 형은 서울대 다니고 누나는 경기여고를 졸업해서 이대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삼수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주워온 자식이라고 합니다." 학생은 그동안 가족들에게 당했던 온갖 구박들을 주섬주섬 늘어놓았다. "그래서 넌 어떻게 했니?" 점점 학생의 얼굴이 분노로 굳어져 갔다. "말대꾸를 하다가는 집을 뛰쳐나가 버립니다. 이제는 집에 들어가기도 싫어요." 그 학생을 진정시켜서 돌려보내기는 쉽지 않았다. 아마도 자살을 해도 천국에 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 실행에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약해지는 순간 모든 열등감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그리하여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고 사후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아이에게 심한 구박은 일생 동안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아이가 한시라도 어느 부분에 열등감을 갖고 있다면 그를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장점을 키워 줘야 한다. 한 번은 교회에서 한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다. 그 어머니는 딸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도 내용이 뜻밖이었다. "우리 아이가 서울대학교에 지원했는데 제발 떨어지게 해주십시오." 도대체 무슨 원한 관계라도 있을까 싶어서 물었다. "왜, 남들은 다 가기를 원하는데, 떨어지기를 바라는 겁니까?" "예, 우리 딸은 계속 전교에서 수석만을 해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아예 안하무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이런 아이가 어찌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겠습니까." 1등 출신의 정치학도라고 해서 사회에 봉사하고 기여하는 훌륭한 정치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공부를 제일 잘하는 사람은 선생님이 되고, 그 다음 사람은 장사를 하고, 그 다음 사람은 정치를 한다.'는 유태인의 속담에 한 번쯤은 귀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구나 다 아는 모 재벌 그룹 회장의 학력이 'XX 국민학교 졸업' 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 회장은 많은 명예 박사 학위를 갖고 있지 않은가. 이름있는 정치가들도 공부 낙제생들이 수두룩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운동경기 중 축구를 가장 좋아한다. 그래서 한때는 그 나라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차범근이라는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는가. 결코 그렇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바야흐로 기능 위주의 세상이다. 기업체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도 점차 학력 위주가 아닌 실력 위주의 인재를 요구하고 있다. 타고난 재능을 훌륭하게 계발하는 사람만이 확실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김치가 훨씬 맛있는 걸 아이들의 지능과 행동은 모방을 통하여 발달한다. 엄마의 소리를 흉내내며 말을 배우고, 아빠의 손을 보며 잼잼을 배운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교육은 그들의 환경과 유리된 곳보다는 그들과 밀접한 환경 속에서, 그 환경을 이용해 교육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가정은 아이들에게 더없는 학습의 장이다. 아이가 보고 배워야 할 대상이 있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엄청난 양의 학습 도구가 있는 곳이 가정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부모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매일 부부 싸움을 하는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폭력적 성향을 갖기 쉽다. 그리고 다 성장한 후엔 결혼을 기피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 반대로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의 성격은 매우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을 띠게 된다. 이것은 일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교육에서도 어려서 결정되는 요소가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짐작케 해주는 것이다. 아이들의 지능 또한 어려서 결정된다. 자라면서 습득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어려서 비롯된 지능과 인성을 구체화하고 다변화하는 데 그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어려서의 교육은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인성 교육과 함께 아이들의 창의력을 길러주고, 주어진 재능을 계발해 주는 것은 부모의 중요한 의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방법만 알면 그것은 아주 간단한 것부터,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온 가족이 집에 있는 토요일 오후나 공휴일에 김치를 담근다고 하자. 아이를 데리고 시장에 가면서부터 교육은 비롯된다.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따라나서는 아이는 이미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관한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는 새로운 세계에 접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된다. 그리고 많은 호기심을 발동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누구보다도 심각한 철학자이니까. "이건 뭐야? ...이건?" 아이들은 누가 물으라고 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물어온다. "응, 그건 해바라기라는 꽃이야... 그건 자동차고." 그러면서 아이에게 손으로 그 꽃을 만져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손에 닿음으로써 아이는 손의 감각을 키우고, 훨씬 더 친근감을 느낄 수가 있게 된다. "왜?" "이렇게 뜬금없이 왜, 하고 물을 때에 조심해야 한다. 그래도 충실하게 답변을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너도 이름이 있잖니? 아빠도 엄마도 이름이 있단다. 그렇게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는 거란다." "왜?" "이름이 없으면 부를 수가 없지 않니? 만약에 네 이름이 없으면 엄마가 너를 부를 때, 어떻게 하겠니. 맛있는 것이 있어도 부를 수가 없으면 너에게 줄 수도 없겠지? 그래서 이름이 있는 거란다." 아이는 엄마의 이런 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엄마와 대화를 통한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충분히 만족한다. "엄마, 왜 해바라기야?" "응, 그건 이 꽃이 해님을 바라보면서 해를 따라 돌기 때문이란다." "왜? 왜, 해님을 따라 도는 거야?" 이쯤 되면 전문가나 되어야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질문이 된다. 그래도 대답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이렇게 대답해서도 안 된다. "그건, 네가 이 다음에 학교에 들어가면 알 수 있을 거야." 이러한 대답은 아이의 상상력을 단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로 대답이 궁할 경우에는 아빠를 동원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이다. "글쎄, 엄마는 잘 모르겠는데... 우리, 아빠에게 여쭈어 보자."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아빠의 권위까지 아이에게 심어주게 되는 것이다. 이때, 아빠가 귀찮아 한다거나 구박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러면 아이는 아빠라는 존재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식으로든 대답을 해야 한다. 그것이 꼭 정답을 맞추어야 하는 승진 시험도 아니니까 겁먹을 필요는 없다. 아이의 호기심만 충족시켜 주면 그만인 것이다. "너는 엄마, 아빠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좋지? 해바라기도 해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좋아서 그러는 거란다." 이런 식으로 시장을 한 바퀴 돌아나오면, 많은 대화와 경험을 통해 아이는 더 많은 상상력과 지혜를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많은 것을 아이가 어떻게 다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는 할 필요가 없다. 단답식의 정답만을 주입시키는 것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호기심에 의한 추상적 상황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이들의 두뇌 구조이니까. 이제부터는 김치를 담가야 한다. 고춧가루가 맵다거나 해서 아이에게 안 좋을까 봐, 아니면 방해만 된다고 해서 아이를 소외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선 배추부터 다듬어 보자. 아이는 엄마의 손놀림을 따라 열심히 배추를 다듬을 것이다. 물론 완벽하게 다듬는 것은 기대할 필요가 없다. 아이가 그런 작업을 통해서 손의 기능만 터득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함께 일하면서 엄마를 도와주었다는 느낌, 함께 일하는 즐거움, 도와주는 즐거움도 알게 되는 것이다. 이제 배추를 절여야 할 차례다. "엄마, 그건 뭐야?" "으응, 이건 소금이야. 바닷물로 만든 거란다." "그런데, 그건 왜 뿌리는 거야?" "이렇게 하면 배추가 부드러워져서 우리가 먹기에 더 좋게 되거든. 그리고 소금은 짠 성질이 있어서 김치를 우리 입맛에 맞게 해주지. 자, 어디 한번 맛 좀 볼래?" 가능하면 아이에게 직접 맛을 보게 하는 것도 괜찮다. 어떤 아이는 기겁을 하고 인상을 찌푸리겠지만, 그래도 아이는 맛에 대한 감각과 소금의 성질에 대해서 알 수 있었을 것이고, 고춧가루를 넣으며 매운 맛도 알게 되었다. 아이는 이렇게 해서 항상 밥상 위에 올라오는 김치를 만드는 과정도 알게 된다. 그리고 정성껏 담근 김치를 밥상 위에 올려 놓자. "자, 우리 아이가 담근 김치가 어떤지 맛 좀 볼까. 어디 너도 한번 맛 좀 봐야지?" 이렇게 되면 아무리 김치를 싫어하는 아이라도, 자기가 만든 김치에 호기심을 가지고 맛을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아이에게 칭찬하는 것도 잊지 말자. "네가 도와주니까, 김치가 훨씬 맛있는 걸." 나는 어렸을 때, 어머니 곁에서 이러한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다. 그때의 그 분위기, 그리고 어머니와 나누었던 대화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김치 담그는 것을 예로 들었지만, 아이가 싫어한다면 아이가 좋아하는 다른 것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다. 그 한 가지를 만들어 보면서도 아이는 많이 배우는 것이다. 직접적으로는 손의 기능을 배우고 익혔으며, 맛에 대해서도 좀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과정을 통해서 가족이라는 공동체와 그 소속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성취감을 만끽하는 것이다. 만약, 김치를 담갔다면, 그 아이는 부수적으로 우리의 전통문화까지도 배운 것이 된다. 그런 효과는 놀이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아이를 적극적으로 키우려면 놀이의 종류에서부터 아이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 좋다. 그렇게 길들여진 아이는 매사에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자란다. 물론 독선에 빠질 염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대화를 통해서 보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있던 어느 날, 집에는 이스라엘 아이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이스라엘 아이들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살그머니 끼여들었다. "그래, 우리 어떤 놀이를 할까?" "노래 부르기 해요." "그럼, 누구부터 부르는 것이 좋을까." 잠시 생각하던 한 아이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친다. 그러더니 콜라 병을 들고 와서 방법을 설명한다. "이 병을 이렇게 돌려가지고 멈추었을 때, 주둥이가 향하고 있는 사람이 노래 부르는 거예요." "그거 참, 기발한 생각이구나." 이 얼마나 멋진 생각인가. 모두가 이런 기회와 자신감을 심어 주면 아이는 얼마든지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결국, 창의력으로 이어진다. 아이가 다소 독선적이라고 생각될 때에는 제동을 걸어주면 된다. "참, 좋은 생각이구나. 하지만 나는 이 주사위의 수를 정해서 차례를 정하는 것이 더 좋은데, 그래,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예, 저도 주사위가 더 좋겠는데요. 그럼, 어떻게 하나...." "그러면 손을 들어서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니?" "좋아요." "그래, 모두가 찬성했으니까, 그러면 병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봐라, ...음, 두 명. 이번에는 주사위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래, 네 명이구나. 그러면 네가 양보를 해야겠네? 주사위를 좋아하는 사람은 네 사람이고, 병을 좋아하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니까. 오늘은 주사위로 하고 다음 번에 병으로 하자." 이렇게 되면 아이는 그 거창한 민주주의의 원리까지도 익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교육은 인성을 바탕으로 한 복합 교육이어야 한다. 단편적인 지식만으로는 곧 그 한계에 부닥치게 된다. 수학은 잘하는 데 물리는 못한다는, 이해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단편적이고 주입식인 우리의 교육이 낳고 있는 또 하나의 폐단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초등 교육까지 모든 과정은 아이들의 인성과 창의력, 지혜를 계발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아이들은 성적이나 등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선생님이나 부모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은 아주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교육 방법은 대화로 시작해서 대화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보면 말장난 같은 대화를, 학교에서든 가정에서든 끝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러한 대화를 통해서 핵심에 접근하기도 하고, 또 다른 방법이 있음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초등학교의 수업 방식은 우리와는 매우 다르다. 그들의 수업하는 풍경을 보면 도대체 무슨 과목을 배우는지 짐작하기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초등학교 상급반 칠판에는 어떤 주제를 미리 적어놓고 시작한다. 한국적 주제를 예로 든다면 '대원군의 쇄국 정책'이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을 것이다. 그런 걸로 보아서는 역사 시간임에 틀림없다. 모든 이스라엘 교육이 그렇듯이, 선생님이 먼저 토론을 유도하기 위해 서두를 꺼낸다. "자, 대원군은 어떤 사람이지?" "조선시대 말 고종 임금의 부친입니다." "외국의 침탈을 막기 위해 쇄국 정책을 편 사람입니다." 한 아이는 좀 다른 식으로 말한다. "위선자예요." 자기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 거짓 술주정뱅이 노릇을 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왜, 거짓말쟁이냐, 진정한 뜻을 가진 사람은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위선자란 무엇이냐, 그런 거짓은 필요한 것이냐 하는 등의 질문과 주장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마치, 어느 도덕 시간을 방불케 한다. 그래도 선생님은 아무런 간섭 없이 묵묵히 아이들의 토론을 지켜보기만 한다. 마침내는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관계에까지 이어져 전통 가정의 윤리 문제로까지 비화한다. 그제서야 선생님이 관점을 좁혀주기 위해 끼여든다. "명성황후와는 왜 그렇게 좋지 않은 관계가 되었지?" "그야, 물론 자신의 야욕 때문이지요." "일본과 러시아의 음모 때문입니다." 항상 엉뚱한 아이들은 있게 마련이다. "고종이 무능력해서요." 다시 문제는 현대의 고부 갈등시 남편의 역할로 넘어가고, 그러다가는 여권 문제로 넘어간다. 결국은 선생님의 개입으로 '대원군의 쇄국 정책'으로 다시 토론의 쟁점이 모아지고 아무 결론 없이 끝이 난다. 여기에서는 누가 옳고 그르다는 흑백 논리가 없다.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른다는 것도 없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모든 분야를 구분함이 없이 교육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교육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상상력을 단절시키지 않고 마음껏 키워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아이가 엉뚱한 질문을 한다거나, 엉뚱한 대답을 할 때, 아이를 구박한다거나 꾸짖어서 아이의 상상력을 단절시켜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아이의 풍부한 상상력을 칭찬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엄마한테 해도 되나 물어보고... 텔레비전도 그렇지만, 폭력 비디오 때문입니다." 이 대답은, 살인을 하기 위해 미리 연습을 하고, 자기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무차별 납치, 살해하여 미리 마련해둔 소각장에 태워버리고, 심지어 사람의 살까지 먹었다는 소위, '지존파'가 왜 그런 범죄 행위를 저질렀을까 라는 어느 선생님의 질문에 답한 학생들의 대답이었다. 학생들이 그렇게 답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알려진 만큼의 사실이지만, 폭력 비디오가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완성되지 않은 인격은 그런 비디오를 보게됨으로 무감각에 빠져들고, 결국 작은 동기 하나가 자제력이 없는 그들을 엄청난 사건에까지 말려들게 하는 것이다. 거기에다 요즘은 컴퓨터 게임이나 정보를 통한 폐해도 엄청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부모가 컴퓨터에 대해 문외한일 경우를 생각한다면, 더욱 그 정도가 심해질 수 있다는 데에 더욱 큰 문제가 있다. 어린 아이 때부터 갖게 되는 텔레비전 채널의 선택권, 그리고 그대로 방치하는 부모가 아이들에게 그런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정에서는 아이들에게 그러한 폭력물은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감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역사가 담긴 다큐멘터리식 전쟁 영화는 아이들에게 반드시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사소하다면 사소한 곳에서부터 이스라엘의 교육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폭력물로 인해 심하게 정신적으로 손상되어 갈 때, 이스라엘의 아이들은 그들 민족의 역사를 배움으로써 강한 민족애를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재산을 위해 아버지를 살해하고,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남편을 살해하는 짐승 같은 범죄 행위의 원인을 우리는 폭력 비디오나 폭력 문화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지존파'의 한 사람은 이렇게 말을 했었다. "잘사는 놈들 다 죽이지 못하고 가는 것이 억울하다." 이것을 막연한 분노라고만 이해하고 말 것인가. 그렇다고 저런 죽일 놈 하고 세상만 탓할 것인가. 실제 '지존파'의 한 사람은 지능지수도 무척 높아 어려서 공부도 꽤 잘했다고 했다. 그러나 자랄수록 경제적 박탈감과 소외감에 시달렸던 듯하다. 급기야 그런 감정은 무작위 살해, 나보다 더 가진 자에 대한 살해로까지 이어졌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육에 관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물론, 그들의 잘못을 모두 다 사회나 가정의 교육 탓으로만 돌리려는 것은 아니다. 분명 그들 자신 스스로도 엄청난 죄를 지었으며 영원히 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도 소외 받고 좌절하고 있을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교육을 돌이켜 보자는 것이다. 한번은 한 제자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평소 성격도 좋고 능력도 있어서 장래가 매우 촉망되는 젊은이였다. "자네는 그렇게 한 번도 일찍 집에 들어가는 법이 없으니 가정 생활은 어떻게 하나?" "예, 그래서인지 집사람은 저더러 하숙생이랍니다." "자네, 아이도 있다고 그랬잖나." "초등학교에 다니는 녀석이 하나 있는데, 애비와 대화 한 번 제대로 해본 일이 없을 겁니다." "그래서야 어디 한 가족이라고 할 수가 있겠나."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지금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아놓지 않으면 장래가 힘들어질 텐데... 제 장래가 불투명해지면 가족도 화목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 아이도 당장은 투정을 부리겠지만, 나중에는 애비를 이해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오히려 애비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이 꼭 나의 제자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사라진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아버지들은 개발 경제에 밀려 항상 쫓기듯 일을 해야 했다. 그래도 근무 시간이 단축되어 간다고, 아직은 일을 해야 할 때인데 너무 일찍 휴식을 원하고 있다고 매스컴에서는 난리를 피운다. 그러다가도 어떤 패륜적인 사회 범죄가 발생하면, 집안에 어른이 없다느니, 가정 교육의 부재하고 하면서 연일 특집을 내보낸다. 한 마디로 이율배반의 주장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모순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으로도 들린다. 그러니 그 속에 파묻혀 있는 우리 소시민의 아버지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업무와 가정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예전의 농경 사회에서는 항상 아버지와 아들이 음식을 함께 먹었다. 그리고 함께 논으로 밭으로 일하러 갔다. 모든 대화와 교육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산업화 초기까지만 해도 이어져 내려왔다. 단지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가 그 역할을 했다는 것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고도 산업 사회는 대가족의 분해를 가속화시켜 핵가족을 만들어 놓고, 집안의 어른마저도 빼앗아가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집안에서 어머니는 자식을 치마폭에 감싸안고, 귀여운 내 자식만 외쳐대고 있을 뿐이다. 오죽하면, 요즘 부모들을 동물원의 동물지기로까지 비유할까. 먹이와 보호만 해주고 지켜만 보는 것이 요즘 부모의 역할이라는 얘기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학교 교육이 더 중요하게 부각될 수밖에 없다. 가정에서 못 하는 인간 교육을 학교에서 담당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가정에 엄한 아버지가 있을 때에는 굳이 학교에서 인상 교육을 시킬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은 오히려 정반대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모두가 잘못된 사회 의식과 그에 따른 대학 입시 제도의 불합리성, 그리고 그에 맞춰진, 인성 교육은 어디로 간 곳이 없고 지식의 주입에만 의존하는 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학교 교육은 일등하는 아이에게만 초점을 두고 있다. 모두가 일등만을 원한다. 그리고 결국은 합격만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합격자보다는 떨어지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그렇다면 교육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떨어진 사람은 모두가 당연히 합격해야 한다는 가정과 사회 속에서 극도의 소외감을 느끼게 될 것이 너무나 명확하다. 한 마디로 세상 끝이라는 생각까지도 들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아이들은 자살까지 감행하지 않는가. 꼴찌에게도 관심을 기울이는 교육이 될 때 비로소 교육의 정상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아이들, 엄한 아버지 없이 어머니의 과잉보호 속에서만 자란 아이들에게서는 여러가지 바람직하지 않은 성격이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그런 아이들은 이기적이기 쉽다. 가족 구성원으로서 봉사나 의무감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가 자신만을 위해서 봉사해 주기를 기대한다. 또한 그런 자신의 바람이 모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자기 스스로 일하는 법이 없게 되는 것이다. 어느 웃지 못할 코미디가 생각난다. "자기야, 오늘은 좀 늦게 들어가도 되지?" 여자가 묻는다. "글쎄, 잠깐만 기다려 봐, 전화 좀 해 보고...." 남자가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엄마야, 응 나야. 지금 순이랑 같이 있는데, 나 조금 늦게 들어가도 돼지? 응 알았어, 엄마. 그럼 조금 있다가 들어갈 게. ...자기야, 자기야,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조금 늦게 들어와도 된대." "얼마나?" "응, 열 시까지 들어가면 돼." 조금 있다가 분위기를 잡고 여자가 묻는다. "자기야, 나 사랑해?" "그럼 사랑하지." "그럼, 여기에다 뽀뽀해 줘." 여자가 뺨을 남자의 얼굴 가까이 가져간다. 그러자, 남자가 당황한 듯, 말한다. "잠깐만 기다려 봐, 엄마한테 해도 되나 물어보고...." 그렇게 자란 아이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성격 또 하나는 감각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사고력은 발달하지 못하고 감각만 발달하여 쉽게 신경질을 부리고, 사소한 것에도 충동적이 된다. 어떤 아이가 옷가지를 훔친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왔다. "너, 이거 왜 훔쳤어?" "그냥요." "그냥이라니, 똑바로 대답 못해!" "그냥 입고 싶어서 훔쳤어요." 옆에 있던 어머니도 한 마디 거든다. "그까짓 것 몇 푼 되지도 않는 걸 가지고 뭘 그러세요. 물어주면 될 것 아녜요. 너는 입고 싶으면 엄마한테 말을 했어야지, 이거 원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창피해서." 한 마디로 자제력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는 잘못했든 잘했든 항상 튼튼한 보호막이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된 이류를 존경하고 싶은 전형적인 어른이 없어서 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심점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증거로 어떤 설문 조사의 결과를 제시하기도 한다. 아이들의 존경 대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예전의 선생님이라든가, 아버지에서 지금은 시류를 타고 인기에 영합하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직업관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과거의 판사, 의사로부터 연예인이나 프로 운동 선수들의 이름이 많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우리의 사회는 여전히 아버지를 가정으로 돌려보내기를 원치 않고 있다. 결국은 그것이 자제력 없고 의지력 없는 아이들을 양산해 사회의 악순환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의 이익만을 좇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학교 교육의 획기적인 방안이 제시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 당장 획기적인 방안을 만든다고 해도 그것이 정상적인 궤도에 오를 때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릴 일이다. 그때까지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대로 방치해 둔 채, 기다려야 하는가. 그럴 수만은 없다면, 지금 당장 '가정의 날'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하지만 이것도 직장을 비롯한 모든 사회에서 적극적인 협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스라엘의 교육이 위대한 것은 그들의 가정이 정상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 직장에서 퇴근하면 그들의 아버지는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들은 매사를 함께 한다. 또한 식사 준비도 함께 하고 외출도 함께 한다. 심지어는 이웃집을 방문할 때도 줄줄이 꼬리를 물고 함께 다니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진정한 공동체의 의미를 알게 된다. 서로가 함께 하는 기쁨을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부모가 모범을 보임으로써 아이들은 부모에게 존경과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들에게는 진정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것이다. 나도 이스라엘에서 귀국한 후로는 줄곧 '가정의 날'을 만들어 생활하고 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이 날만큼은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교육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출가한 딸도 있어서 이 날이 되면 대가족이 모이게 된다. 그렇게 만나면 보람도 또한 많다. 그러면서 나는 아이들이 이 다음에도, 또 아무리 가족이 더 세분화된다고 해도 이 날만큼은 꼭 이어나가기를 기대한다. 요즘, 거리를 걷다 보면 참 화려하고 대범해졌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리고 그렇게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자기 표현을 확실히 하는 요즘 젊은이들이 부럽기도 하다. 그러나 걱정되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어느 신문에 실린 옷가게 주인의 인터뷰가 나를 그렇게 만든다. "요즘에는 아이들 유행을 따라가지 못하면 이 장사도 할 수가 없어요. 심지어 어떤 아이들은 일본 패션 잡지를 불쑥 내밀면서 '이거랑 똑같은 거 있어요?' 하는 애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읽을 줄도 모르는 아이들이 잡지의 사진을 보기 위하여, 그리고 그를 모방하기 위하여 일본이나 프랑스의 패션 잡지를 들고 다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너는 몇 단지에 사는데? 놀기 좋아하고 낭만이나 멋을 찾는 사람에게 이스라엘은 정말 재미없는 나라이다. 하루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있어봐야 조무래기 아이들만 드나들 뿐, 말벗 하나 되어줄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밖에 나가봐야 이렇다하게 즐길 곳도 눈에 뜨이지 않는다. 맥주집이 있어도 차를 타고 한참을 나가서야 한 모금 맛볼 수 있을 정도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다른 소비 지향적인 국가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일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대부분의 소비재를 국내에서 생산하지 않고 해외에서 수입해다 쓴다. 하물며 두루마리 화장지까지도 수입해서 쓰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철저히 소비 지향적인 것을 배격하고 있다. 이것도 가만히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공동체 의식 속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공동체 의식은 모세가 그들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의 시련을 겪은 뒤, 가나안의 땅에 정착할 때까지, 몸뚱이 하나 누일 데 없었던 고난의 시절 속에서부터 비롯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황무지를 젖과 꿀이 흐르는 기적의 땅으로 바꿔놓은 지금에도 그것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 거기에다 아이들의 교육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의식이 결코 사치 위주의 풍토를 묵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그것이 오히려 또 다른, 신앙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우리가 눈여겨볼 부분이다. 일과 후에 마땅히 소일거리를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겠지만 대부분이 맞벌이 부부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퇴근하면 곧바로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남은 시간 모두를 가족과 함께 어울린다. 혼자서 친구를 만나거나. 여행을 가는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다. 만약 친구집을 방문하거나 무슨 공연을 관람할 때에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들은 온 가족이 동반한다. 그런 습성을 몰랐던 나의 초창기 유학 시절은 그래서 에피소드도 많았다. 한 끼 식사라도 하려고 친구를 초대하면 그들은 반드시 집단으로 몰려와서 나를 당황시키곤 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새 손님을 맞이하랴, 식사 준비를 새로 하랴 한바탕 소동을 벌이곤 했다. 초대되어 혼자 남의 집을 방문하면 이상한 눈초리를 주기가 예사여서 무척 당황도 많이 했다. 문화적 차이는 여러 생활면에서 나타났다. 그러한 일로 하루는 초대된 친구로부터 좋지 않은 말까지 듣기도 하였다. 그날도 내 딴에는 친구 하나만 달랑 초대할 심정으로 친구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약속 시간에 나타난 그의 주위에는 그의 아내와 두 아이가 더 있었다. 이거 또 아내에게 미안하게 됐군, 생각하면서도 차마 손님들 앞이라 말도 못 하고 일단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리고는 그의 아내는 부엌일을 도우러 주방으로 들어가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다. 가까운 친구라서 별부담 없이 집에서 하던 대로 신문을 뒤척이기도 하며 잡담을 하고 있는데 그날 따라 영 그 친구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결심을 했는지 친구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항상 이러나?" "...?" 난 그 친구에게 말이 없는 가운데 무슨 큰 결례라도 범한 줄 생각하고 신문을 내려 놓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항상 이렇게 신문이나 보고 있나?" "아니지. 어이, 미안하네. 난 자네랑 허물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랬는데, 이거 정말 미안하게 됐네." 그러나 그 친구 말의 초점은 사람을 불러놓고 신문이나 보고 있느냐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고. 자네는 부엌일을 하나도 거들어주지 않느냐 이 말이야." "물론이지.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서 할 일이 뭐가 있겠나. 장작을 패서 불을 지피는 것도 아닌데." 대개의 한국 남편들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나는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이 대답했다. 그 친구는 그것 참,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다가는 식사가 준비되었음을 알려오자 하려던 말을 참았다. 이제 다 끝났나 보구나 싶었는데 그 친구는 식사를 하면서도 그 생각만 했는지 식사가 다 끝나자 또다시 질문을 해왔다. "그럼, 자네는 아내가 식사 준비를 할 때, 무엇을 하는가?" "아, 그야 신문도 보고 텔레비전도 보지. 그게 그렇게 이상한가?" "한국 남편들은 다 그러는가?" "아, 그렇다니까. 전통적으로 남자는 부엌 근처에도 얼씬도 못 하게 되어 있네." "그래도 그렇지. 여기가 어딘가. 여기는 한국이 아니고 이스라엘이야. 그러니까 이곳의 법도 대로 따라야지, 그렇지 않나?" "그러는 자네는 무엇을 도와주나?" "물론, 나야 안 하는 게 없지. 빨래는 기본이고, 청소도 하고, 때로는 식사까지도 준비하지." 한참을 친구로부터 핀잔을 듣고 있는데, 아내가 차를 들도 들어왔다. 그러면서 밖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한 마디 끼어들었다. "그것 보세요. 부엌일 좀 도와주면 뭐가 어떻게 된다고 그러세요?" 양쪽에서 협공하는 데에는 나도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빠져나가자는 심산으로 불쑥 알았다고 대답한 것이 결국은 아내에게 빌미를 줘 가끔은 마지못해 설거지를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억지를 부리며 잘도 빠져나가고 있는데 한 번은 자발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졌다. 어느 날, 교수 한 분이 차나 한 잔 하자고 나를 초대했다. 시간에 맞추어 그 집엘 방문했을 때는 한참 더운 오후 4시쯤이어서 그 교수는 잠을 자는지, 부인이 나를 맞이하면서 남편을 불렀다. "당신은 사람을 초대해 놓고 잠을 자요? 빨리 일어나서 차나 끓여와요." 그러자, 남편은 무어라고 할 법도 할 텐데 뜻밖에도 아무 소리 없이 졸리운 눈을 비비며 주방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아빠, 저도 같이 할께요." 옆에 있던 아이도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부자간에 다정스럽게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저는 그릇을 꺼내올 테니까, 아빠는 물을 끓이세요." "그러려무나. 오늘은 선생님께 무얼 물어봤니?" "예, 바닷물은 왜 파란색이냐고 물어 보았어요." "그래,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던?" 둘은 아주 신이 나서 차를 끓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잠시후, 둘은 차를 끓여가지고 들어왔다. "아니, 차 끓이는 것이 그렇게 즐거우십니까?" "물론, 차를 끓이는 것도 즐겁지만 자식과 함께 오붓하게 이야기하면서 일을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아이도 그러면서 가까이에 있는 아빠를 느낄 수 있을 테고...." 그 다음 날부터 아내의 잔소리가 없어도 나는 아이까지 이끌고 자발적으로 주방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하루는 아내도 없고 해서 본격적으로 앞치마까지 두르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들어오세요." 그러나 아무리 대답해도 인기척이 없었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앞치마에 손까지 쓱쓱 문지르며 현관문을 열자, 아뿔싸, 이건 한국에서 성지 순례온 목사님이 아닌가. "아니, 자네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집사람은 어디 가고...." 목사님은 집에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았는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별일 아닙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제서야 목사님은 큰소리로 웃으며 한마디 했다. "자네, 이거 공부하러 온 줄 알았더니, 한국 남자 대표해서 망신주려고 왔구먼." 고국에 돌아온 난 한동안 지금은 고인이 되신 그 목사님의 놀림거리가 되곤 했다. 아무튼,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철저하게 가족 중심의 생활을 하면서 공동으로 분담하여 집안일을 돌본다. 아이들에게도 예외는 없다. 하다못해 그릇이라도 나르게 한다. 그렇게 참여를 시킴으로써 그들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해 어려서부터 인식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웃을 방문할 때 반드시 온 가족이 동반하는 것도 작은 가족과 가족이 자주 접촉함으로써 또 하나의 작은 사회 공동체를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그들은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을 접함으로써 아이들에게 새로운 자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아이들이 이웃집에서 자고 그 집에서 도시락을 챙겨 가지고 학교로 곧장 등교를 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웃과 유대관계는 신뢰가 깊다. 그것은 우리와는 다른 그들의 집단 문화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도시에서 대부분 비슷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경제, 문화적 이질감도 별로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와는 달리 소외되는 집단이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일체감이 그런 공동체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언젠가 신도시 아파트 입주가 한창 이루어질 무렵이었을 것이다. 부촌인 아파트와 영세민이 거주하는 아파트 사이에 담장이 쳐져 있다고 해서 상당한 말썽이 있었다. 담장을 친 이유인즉 부촌인 아파트 사람들이 자기 자녀들이 행여 영세민 자녀들과 어울려 질이라도 나빠질까봐 그랬다는 거였다. 단지 안에 놀이터는 물론 통행까지 차단하여 자기 자식을 보호하겠다는 의도였다. 영세민의 자녀라고 해서 상대적으로 비행을 더 저지른다는 통계가 나와 있는 것도 아니고, 부유층 자녀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닌데 일부 매스컴의 편파적 보도와 맹목적 추종이 낳은 결과였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되더라도 내 아이들만은 잘 되어야 한다는 잘못된 교육관이 더해졌을 터였다. 심지어는 아이들까지도 공공연히 부모의 그릇된 사고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도 많다. "너, 몇 단지에 살지? 너네 단지에 사는 아이하고는 안 놀아. 엄마가 그러는데 나쁜 아이들만 있다고 놀지 말랬어." "우리 아빠는 그랜저 타고 다니는데, 너희 아빠는 무슨 타 타고 다니니?" 이렇게 아이들까지도 끼리끼리 어울리는 경우가 많다는 보도는 우리의 가슴을 참으로 아프게 한다.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만약 우리 아이가 꼬질꼬질한 모습에 후줄근한 옷을 입은 아이를 집에 데려와 친구라고 소개를 하면 어떻게 할까. "너, 나 좀 보자. 내가 뭐라고 그랬어. 저런 애들하곤 어울리지 말랬지? 당장 보내지 못해!" 그래도 이렇게 친구가 안 들리는 곳에서 말하는 부모는 나은 편인지도 모른다. 자기 아이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친구만 구박하는 부모도 있을 것이다. "너, 몇 단지에 살지. 우리애는 너 같은 애하고 놀지 않으니까 다른 애들하고 놀아라. 어휴, 그 얼굴은 그게 뭐니? 또 그 옷꼴은 뭐고. 어서 나가!" 이 말을 들은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며 세상을 살아갈까. 평생을 증오 속에서 살아가지는 않을까.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것을 그대로 배우면서 자란다. 부모가 그 친구에게 마치 집 나갔던 자식이 돌아온 것처럼 반겨주었다면 아이는 결코, 친구가 몇 단지에 살든, 무슨 차를 타고 다니든, 그런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집단 문화는 경제적인 지위에 따라 무척 폐쇄성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사회의 소외계층을 대량으로 양성하여 사회의 불안 요소로 자리할 것임에 틀림없다. 가정이라는 작은 단위의 집단에서부터 튼튼한 공동체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공동체 의식은 그래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은 것이다. 똑똑한 게, 영락없이 판사감이구먼 어느 가정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면으로나 문제가 없어 보이는 평범한 가정이었다. 다만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 하나만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지나치게 뚱뚱하다는 것이 이상하다면 이상한 점이었다. 문제는 이 아이한테서 비롯되었다. 평상시처럼 아이는 늦은 시간에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매일 건너는 횡단 보도에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교통 사고를 당한 것이다. 당황한 운전사는 급히 아이를 차에 싣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가던 도중 마음이 변했는지 아니면 별 상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운전사는 아이에게 연고나 사서 바르라며 돈 만 원을 주며 차에서 내리게 했다. 아이는 그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어머니의 꾸중이 두려워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다친 다리를 질질 끌며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아이는 차마 어머니에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조용히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오면 먹을 것 먼저 챙기던 아이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을 어머니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아이는 방에 불도 켜지 않은 채,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고 있었다. 어머니가 이불을 들춰내고 한참을 다그친 후에야 아이는 입을 열었다. "오다가 교통 사고를 당했는데 아프진 않아." 아이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우선 아프지 않다는 말을 강조했다. 그것은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프지 않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사고 자체를 무마시키려는 의도였다. "어디야, 어떻게 다친 거야?" 아이가 다친 다리를 자꾸 움츠리자 어머니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갔다. "다리를 다쳤는데 별로 아프진 않아." 아이는 차에 부딪쳐 아스팔트에 넘어지면서 까진 상처를 내보였다. 움푹 패인 모습이 찰과상일 것으로 추측했던 어머니를 더욱 흥분시켰다. "야이, 이런 맹추야. 이렇게 심한데도 아프지 않다고 그냥 돌아왔니? 차 번호는? 차 번호가 몇 번이냔 말야!" "아까는 외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안나." 아이는 충격과 다그침에 기가 죽어 전혀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기가 막혔다. 하나뿐인 아들이 사고를 당하다니, 그거도 후유증을 알 수 없는 교통 사고를. 거기에다 뺑소니라니....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어머니는 우선 그 사고 차량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상가 사람들과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물어보았지만 뚜렷한 목격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겨우 한 노점 상인에게서 차종만 알아낸 어머니는 그제서야 병원 생각이 났다. 그 시간에도 아이는 아픔보다도 어머니가 돌아올 것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 어머니는 가난한 농부의 딸이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해 공부도 잘하고, 여러 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경제적인 여건과 여자라는 이유로 하고 싶은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결혼 후에, 국가적인 차원의 가족계획 홍보도 있었지만 자발적으로 아이 하나만을 낳고는 영구 불임 시술을 하였다. 여럿 낳아 고생시킬 바에야 하나만이라도 행복하게 키우고 싶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하면서부터 온갖 학원을 다 보내며 아이가 남의 아이들보다 뛰어나다고 스스로 맹목적으로 믿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이가 항상 일등만 하기를 고집했다. 아이는 처음에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는 듯했다. 줄곧 일등을 했고 곧잘 상도 타와 어머니를 기쁘게 했다. 그러나 점차 학년이 올라가면서 아이의 성적은 처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닥달은 시작됐다. 저녁 늦게야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어머니는 그냥 두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개인 지도를 하며 온갖 구박을 했다. 아이는 점차 스트레스를 받는지 말수가 적어지고 먹을 것에만 집착했다. 급기야 아이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비만해져 책임이야 어디에 있든 교통 사고를 당하는 한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 부모들이 자식에게 한결같이 하는 얘기가 있다. "남 주려고 공부하니?" "다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 아니니?" 그러나 그 말 속에는 자신이 이룩하지 못한 어떤 것에 대해 자식이 이루어주기를 바라는 대리 욕구가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더더욱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될 커다란 착오가 그 속에 숨어 있다. '잘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부모의 입장이라면 그 의미는 몇 가지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아이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건전하게 성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을 나와, 단란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들 수도 있겠다. 거기에 더 많은 욕심을 가진 부모라면 소위 사회에서 존경받는 박사나 의사, 판사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지금의 부모 위치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식이 그 직업을 대물림해 주는 것을 가장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러한 생각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과연 그것이 누구의 기준에서 나왔는가가 중요한 관점이다. 아이의 생각도 그러한 것인가. 만일 아이의 생각과 부모의 생각이 일치한다면 문제는 한결 수월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단 목적하는 바가 같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방법상의 오류만 서로가 수정하면 얼마든지 불평없이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목적의 일치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이구, 그 녀석 장군감일세.' '똑똑한 게, 영락없이 판사감이구먼.' 웬만한 어른들이라면 우리의 옛어른들로부터 한 번쯤은 이런 말을 듣고 자랐을 것이고, 대개의 어른들은 무언중에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말을 듣고 자라는 아이들은 아무런 의식도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 훌륭한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 직업을 동경하면서 커가게 된다. '아가야, 너는 이 다음에 훌륭한 의사가 될 거야. 그래, 그래, 우유도 많이 많이 먹고...' 이제 갓 태어난 아이를 안고 젖병을 물리면서도 우리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그런 고정 관념을 심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아이가 자라서 말을 하고 유치원에라도 들어가면 어머니는 아이로부터 직접적인 대답을 듣기를 원한다. '아가야, 넌 커서 뭐가 되고 싶지?' '으음, 훌륭한 사람이요.' '그래, 어떻게 훌륭한 사람?' '난 의사가 될 거예요. 그래서 아픈 사람들을 많이 많이 고쳐 줄 거예요.' '아이구, 그래. 착하기도 하지. 자, 엄마 뽀뽀.' 그러나 아이들의 사고는 무척 가변적이다. 프로 야구 선수를 보면 야구 선수가 되고 싶고, 연예인에 빠지게 되면 신데렐라처럼 하루 아침에 연예인이 되겠다고 법석을 부리기도 한다. 아주 어렸을 때로 기억된다. 하루 밥 한 끼 때우기도 힘든 시절이었지만 국민학교에 입학한다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난생 처음 이발소에 갔었다. 대개의 아이들은 무섭다고 울고 불고 난리였지만 난 결코 운 기억이 없다. 그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나에게는 엄청난 호기심을 갖게 한 그 무엇인가가 거기에는 있었기 때문이다. 불순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돈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머리를 깎을 때마다 서랍 속에 돈을 챙겨 넣고 있는 주인 아저씨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군것질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보다 어려운 시절이었던 만큼 그러한 나의 생각은 이 다음에 크면 이발사가 되어 돈을 많이 벌겠다는 꿈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그 꿈은 어머니에게 자랑스럽게 밝힌 어느 한 순간에 끝이 나고 말았다. "아니, 뭐가 할 짓이 없어 그런 짓을 해. 앞으로 한 번만 더 입밖에 그런 소리 내기만 해봐. 내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너 이 다음에 무엇이 될래?' '예, 저는 이 다음에 크면 소방관이 될 거예요.' '왜?' '소방관들은 용감하잖아요. 무시무시한 불길 속에서 사람도 구해내고....' 이런 말을 우리 아이가 하면 우리의 부모들은 대개가 꾸중을 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에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 아이들에게서 나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그것은 대통령이라든가, 의사, 판사하고는 전혀 거리가 멀다. 그들은 단지 인격적으로 훌륭한, 이른바 용감하다든가, 의리가 있다든가, 봉사 정신이 강하다든가 하는 것으로 자기의 꿈을 말한다. 아이들은 타고난 재능과 소명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다. 어떤 아이는 공부에 소질이 있어 훌륭한 학자로서 길을 가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뚜렷한 봉사 정신을 가지고 태어나 훌륭한 종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은 모든 것을 다 잘하도록 강요 받으며 자란다. 공부도 잘하고 예능도 잘해야 우리의 부모들은 직성이 풀린다. 공부도 다른 과목은 다 잘하는데 한 가지만 못해도 온통 구박으로 아이들의 기를 죽인다. 그것은 모두가 아이들의 적성이나 능력을 무시한 채, 오직 대학을 나와야만 제 구실을 하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의 섣부른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가 생동하면 누구라도 자기가 가진 능력 이상의 실력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분석이다. 다른 아이들과의 비교나 지나친 기대감은 오히려 아이들의 기를 죽여 스스로를 비관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 하기도 한다. 얼마 전 자기 어머니를 야구 방망이로 쳐서 죽인 학 중학생의 유서가 신문에 공개된 적이 있다. 그 아이는 야구 방망이로 스윙 연습을 하다 실수로 어머니를 때리게 됐다고 한다. 어머니는 '공부도 못하는 녀석이 야구는 무슨 야구니? 당장 들어가서 공부하지 못해!'하며 갖은 욕설로 아이를 구박했다. 그저 화가 난 아이는 재차 야구 방망이를 휘둘러 끝내는 어머니를 숨지게 하는 패륜아가 된 채,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음독 자살을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 아이의 유서는 어찌보면 간단했다. '나는 큰 죄를 저질렀다. 모두 내가 왜 엄마를 죽였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성적 때문이다. 엄마는 날 괴롭혀 왔다....' 이스라엘 부모들은 결코 아이들에게 너는 무엇을 해야 한다, 무엇이 되어야 한다 하고 강요하지 않는다. 더더구나 공부 잘하라는 말은 아예 들을 수가 없다. 다만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찾도록 도와줄 뿐이다. 그러므로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피아노를 못 친다고 해서 절대로 기를 죽이는 법이 없다. '그래, 이 아이는 공부는 못해도 장사는 잘할 거야. 셈은 곧 잘하거든.' 그렇게 부모로부터 마음 속 깊은 신뢰를 받고 자란 아이는 결코 기가 죽어 비관하거나 잘못된 길을 갈 수가 없다. 하지만 아이들의 기만 살려준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기가 충천하면 곧잘 아이들은 자만에 빠져 교만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볼 일화가 하나 있다. 한 부인이 일찌감치 남편을 여의고 아녀자의 몸으로 힘들게 아이를 가르쳤다. 그런데 그 가르치는 방법이 아주 독특해 그 소문은 삽시에 온 동네로 퍼져나갔다. 그 부인은 여름에는 발을 드리우고 발 밖에 아들을 꿇어앉혀 놓고 글을 가르치는 겨울에는 방 안에 병풍을 치고 병풍 뒤에서 글을 가르쳤다. 어느 날, 이상하게 여겨온 이웃 사람이 그 부인을 찾아와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러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는 아녀자의 몸입니다. 따라서 제 아들이 글을 잘 읽으면 제 얼굴에 화색이 돌 것이고, 그것은 본 아이는 교만하고 방자해져 글을 깨우치는 데 게으름을 피울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아이가 글을 잘 못 읽으면 제 얼굴에 노기가 띨 테고 그렇게 되면 아이는 비굴해지고 주눅이 들어 더욱 글에 흥미를 갖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은 이웃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돌아갔다. 이 일화는 당대 명필로 이름을 떨친, 바로 서포 김만중의 대부인 윤씨의 이야기이다. 이 서포 김만중의 대부인 윤씨가 새삼스럽게 현대의 추앙받을 어머니상으로 손꼽히는 이유를 우리는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그 뒤에는 반드시 부모가 있다 자네, 아침밥은 얻어먹고 있나 교수라는 신분이 아무래도 세상물정하고는 거리가 먼 직업이기는 직업인가 보다. 매일 연구실에 처박혀 학술 서적만 바라보는 것이 일과요, 대하는 사람이 고작 세상살이와 상관없는 학생들이니 딴에는 그럴만도 할 것이다. 거기에다 교회일까지 맡다보니 아마도 다른 사람에 비해 한층 더 샌님에 가까워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날, 정말 모처럼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술을 마시지도 못하지만 술을 입에 대서는 안 되는 신분인지라 사양도 많이 했으나, 그래도 오랜만인데, 하고 끄는 데에는 어쩌지 못하고 끝내 술집까지 따라갔다. 얘기야 다 그렇듯, 어디 세미나에 참석해 학술 발표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 어떻고 마누라가 어떻고, 그런 일상적인 것들이 화제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시껄렁한 얘기를 하면서, 나는 오히려 술에 익어가는 친구의 표정을 바라보는 것이 더욱 재미있었다. 아마도 애주가들은 술취해가는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잘 모를 것이다. 눈꼬리가 푹 처지기도 하고, 입꼬리가 말아올라가기도 하는 그 모습을 한 번 술자리를 틈타 지켜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보다는 표정에 더 관심을 기울이면서 한참의 시간이 경과했을 것이다. 갑자기 그의 입술이 더 말려올라가는 듯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자네는 어떤가. 자네 간은 지극히 정상적이냐는 말씀야." "...?" "이 친구 이거, 여전히 세상물정엔 눈이 어둡군." 무슨 말인가 했더니 아침 저녁으로 잡은 제대로 얻어먹고 있느냐는 얘기였다. "자네는 역시 대단한 친구야. 요즘, 유행하는 '간 큰 남자'가 안 돼도 아침 저녁으로 따뜻한 밥은 얻어먹고 있다니... 역시 자네는 자네답군." 아침에 아내에게 밥을 달라고 하는 남자, 반찬 투정을 하는 남자, 오전 11시에 집으로 전화를 걸어 아내가 집에 있는지 확인하는 남자, 말대꾸하는 남자, 이런 남자를 '간 큰 남자'라고 한댄다. 그러니까 감히 아내 앞에서 위엄을 내세우는 남자는 아내로부터 찬밥 대접을 받거나 심하면 쫓겨나기까지 하는 요즘 세태를 남자들이 스스로 자학적으로 풍자하는 말이 '간 큰 남자'시리즈라는 거였다. 이것도 젊은 남편들 입장이고, 우리 나이쯤 되면 '간덩이가 부은 남자'로까지 정도가 깊어진다는 말이었다. 거기에다가 직장에서는 '간 큰 상사'시리즈로까지 이어진다는 거였다. 물론 웃고 즐기자는 의도가 깊이 배여 있는 말이겠지만, 유행어라는 것이 한 시대를 나름대로 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냥 우스개 말로 여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은 친구가 술도 과하게 오르고 해서 한바탕 웃으며 헤어졌다. 그러나 그 친구의 마지막 말이 계속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물론, 지금은 돈이라도 벌어다 주지 않나. 하지만 직장이라도 쫓겨나는 날에는 또 모를 일이지...." 우리 남성들 세계에 언제부터 이런 불안감이 싹터온 것일까. 경제 발전의 최일선에서 박봉에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소임을 다하던 우리네 남성들이 지금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피곤한 몸을 뉘이고 쉬어야 할 가정으로부터도 내몰리고 있지 않는가. 남성들이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우리 여성들에게도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다. 소위, 잘못 받아들여진 남녀 평등 주장이 그렇고, 아이들을 유약하게 키워온 우리 어머니들이 그렇다. 직장에서 여성들은 지나치게 권리만을 내세운다. 승진이나 호봉 등 이로운 면에서는 자기들의 권리를 내세우면서, 힘든 일이나 좀 지저분한 일에는 반드시 여성 보호론을 펴는 것이다. 심지어 기존의 기득권자인 남성들까지도 기피하고 있는 술이나 담배의 기호품까지도 남녀 평등의 입장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여성들이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가정에서도 그것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스라엘 여성들은 90퍼센트 이상이 사회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가정 생활은 기본적으로 철저하게 분업화되어 있고, 남성들도 이에 불만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다르다. 여성의 사회 취업률이 극히 미미할 뿐만 아니라, 그나마도 결혼을 하면 대부분이 가정에서 머무른다. 물론, 사회의 불평등 구조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여성들 스스로 잘못된 의식에서 기인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이유로 동반자적인 관계에서 적대 관계로 잘못 인식되는 여성 운동이 싹트는 것은 아닌가. 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거창한 여성 운동이나, 남성의 권리 찾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정에서 아버지의 위상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일이 바빠서, 남자가 할 일이 아니라서, 이런 저런 핑계로 아이들 교육에 무관심한 남자들이 늘어가면서, 우리의 교육은 반쪽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가 아이들에게 무슨 문제라도 터지면 죄없는 아내에게만 큰소리친다. "당신은 집에서 무얼 하길래, 아이가 저 모양이 되도록 몰랐다는 거요." "아, 그러는 당신은 저애 아버지가 아니예요? 매일 술이나 퍼마시지 어디 애하고 말 한 마디 제대로 한 적이 있어요?" "그래도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그러다가는 아이들 보는 앞에서 싸움하기 일쑤인 것이 우리나라 가정의 현주소는 아닐까.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이들 교육은 여성의 전유물인 것처럼 잘못 여겨져 왔다. 이러한 가정 교육은 자칫 아이들의 조화로운 인격의 발전을 저해하기 쉽다. 어떤 아이들은 커서도 어머니의 치맛자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마마보이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어떤 아이들은 지나치게 폭력적으로 성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역할이 주어지듯이 가정에서 남녀의 역할도 주어져 있다. 따뜻한 정신을 싹틔우고 키워 주는 것이 어머니의 역할이라면, 아버지는 아이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것이다. 어느 통계에서도 나와 있듯이 문제아의 대부분은 그 가정의 경제적 환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불화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아버지가 아버지이길 포기하고, 어머니마저도 그러한 아버지를 따뜻하게 끌어안으려는 자세는커녕, 오히려 더욱더 밖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성들은 군 복무를 해서 그런지 우리나라의 여성들에 비해 매우 거칠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한 여성들도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만은 결코 남편에게 명령하거나 큰소리를 치지 않는다. 그만큼 아이들의 교육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그들은 부부싸움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아무리 화가 나도 아이들이 집에 있을 때는 절대로 싸우지 않는다. 아이들이 없을 때를 택해 싸움을 하거나 밖으로 나가 싸움을 한다. 어떤 이들은 아이들이 잠자는 틈을 이용해 살그머니 공원으로 나가 싸움을 할라치면 도저히 싸울 만한 기분이 들지 않아 싸우러 나갔다가도 피식피식 웃다가는 팔짱을 끼고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형식적인 면만 바라보면, 이스라엘의 남성들은 매우 불행하게 보인다. 고된 직장일을 마치면 우리네처럼 친구를 만나거나, 남다른 취미 생활을 하는 것도 없이 곧장 집으로 달려가야 한다. 마땅히 갈 만한 곳도 없지만, 퇴근 후에는 모든 시간을 가족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집에 들어가야 발 뻗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집 안 청소도 해야 하고 밀린 빨래도 해야 한다. 그래도 아내가 안 돌아오면 음식까지 준비해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 남성들이다. 손님이라도 오면 차까지 끓여내야 한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늦게 들어온 아내의 눈치를 살피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아내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직장에서 온종일 시달리다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 그들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 거실의 소파나, 식탁의 의자에도 아버지의 자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 대한 권위는 엄격해서 아버지가 출장으로 몇 달간을 자리를 비워도, 심지어는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그 자리는 아버지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자리는 아이들이 장난을 칠 때에도 결코 앉을 수 없다. 그리고 이스라엘 남자들에게는 또 하나의 권위가 주어진다. 그것은 바로 가족 회의에서의 최종 결정권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리를 아버지 스스로 강제에 의해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권위는 어머니가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는 것에서도 아버지의 권위를 생각한다. 우리들의 식탁 풍경을 생각해 보자. 우리도 예전에는 식탁에서의 아버지의 권위는 대단했다. 가장이 먼저 수저를 들지 않으면 아이들은 결코 수저를 들 수 없었다. 아무리 맛있는 것이 있어도 아버지가 먼저 들지 않으면 먹을 수가 없었다. 뒤따라 먹으려 해도 어머니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그리고 절대로 아버지가 수저를 놓기 전에는 자녀들은 수저를 놓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다는 것은 더더구나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아버지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밥 한 그릇을 몽땅 해치우고는 벌떡 일어서 나가기가 일쑤다. 공부해야 할 아이니까, 그걸 지켜보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말이 없다. 맛있는 것은 아이들 앞에만 놓여 있다. 아이 앞에 놓여 잇는 것이라도 먹을라치면 아내의 눈치를 봐야 할 지경이다. 아버지의 권위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의 아버지들은 그런 면에서는 철저하게 대우를 받는다. 아주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것에도 그들은 꼼꼼히 신경을 쓴다. "애야, 가서 물 한 그릇 떠오련." 어머니가 아이에게 물 심부름을 시키자, 아이는 쪼르르 달려가서는 물 한 그릇을 떠다가 어머니에게 드린다. "엄마, 물 떠왔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아주 부드럽게 타이른다. "아빠께 먼저 가져다 드려야지. 아빠가 가장이시잖니. 그러니까 아빠가 드신 다음에 엄마가 마시는 거란다." 한번, 생각해 보라. 부부가 둘만 있을 때에는 거칠기만 한 아내가 아이에게 가장의 권위를 인지시켜줄 때에는 이렇게 부드럽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남편들은 스스로 권위를 내세울 필요가 하등에 없다. 그들이 아이들과 노는 것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가 있다. 그들은 마치 친구인 것처럼 논다.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보이기도 한다. 한 번은 이웃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마침, 그 집 주인은 다섯 살박이 딸아이와 놀고 있었다. 아이가 싫증이 났는지 아빠의 다리에 매달리며 칭얼댔다. "아빠, 재미없어. 다른 놀이 해요." "그래, 그럼 무슨 놀이를 할까." 아이의 아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이 아이가 생각해서 말하도록 유도했다. "으음, 아빠, 그림 그릴래요." "그래? 그럼, 그림 그릴 도구가 필요하겠네? 그림 그리는 데에는 무엇 무엇이 필요할까요?" "크레파스, 으음... 그리고, 그리고... 아빠 다리요." "아니, 종이가 필요하지, 왜 아빠 다리가 필요하니?" "숲속에서 노는 것을 그릴려구요. 아빠 다리에는 털이 많으니까, 나무는 안 그려도 되잖아요." "아하, 그렇구나. 참 좋은 생각이다. 그럼, 어서 가서 크레파스를 가져오렴." 그렇게 말하고는 아이의 아버지는 바지를 걷어올렸다. 그러자, 크레파스가 없는지, 아이가 사인펜을 들고 와서는 아버지의 장단지에 쓱쓱 시커멓게 칠을 하기 시작했다. 웬만하면 짜증을 낼 법도 한데, 아이의 아빠는 아이가 빈 틈이 없을 정도로 시커멓게 칠해 나가도 전혀 싫은 기색을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것이 재미있다는 듯이 즐기는 표정이었다. 우리의 아이에게도 아버지의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아이와 아버지가 즐겁게 노는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면 아내들은 또 반문할 것이다. 스스로 권위를 포기한 게 누군데, 아내만 책임을 져야 해? 하지만 작은 일부터 아버지의 권위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아내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게 작은 일로부터 아버지의 자리를 지켜줄 때, 더 이상 방황하는 남편은 없을 것이다. 남편은 더 이상 돈만 벌어다 주는 일벌레, 돈벌레가 아닌 것이다. 왜, 다르게 받아야 해요? 한 아이가 있었다. 선생님으로 재직 중이던 그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매일같이 아이에게 글을 보여주면서 책을 읽어주었다. 그런데 아이가 세 살 되던 어느 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빨랫줄에 빨래를 널던 어머니는 아이가 중얼거리는 말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하-ㄱ교, 체 육 대-회." 또렷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빨래줄에 널려 있는 수건에 쓰여진 글씨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우리가 하던 말을 들었나 보다. 그렇게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아이는 달력을 쳐다보면서 달력 하단에 써 있는 호를 말하기도 했고, 때로는 어머니가 보고 있는 책의 제목을 말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제서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어머니도 예사롭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내 아들이 천재가 아닐까, 생각이 거기에까지 이르자, 어머니는 그의 남편이 재직 중인 학교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 우리 아이가 글쎄, 아이가 글쎄...." "아니, 아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거야, 천천히 얘기 좀해 봐, 이거야 원, 답답해서...." "글쎄, 우리 아이가 글씨를 읽어요. 아무 글이나 술술 읽는다니까요." 그 말을 듣고 남편은 입이 헤 벌어져서 일찌감치 귀가했다. 그리고는 잘 걷지도 못하는 애 앞에 동화책을 펼쳐놓았다. "아가야, 이거 한 번 읽어봐라. 아빠가 잘 읽으면 맛있는 까까 줄께." 아이의 아버지는 아예 사탕 한 봉지를 통째로 아이 앞에 들이 밀어놓고 동화책을 손가락질하며 다급하게 물었다. "신 데 레에-ㄹ라." "그래, 그래. 잘했다. 자, 아가야, 까까 먹어라. 그럼 이건 무슨 글씨지, 그래 이거." "와-ㅇ자 님." 아이는 사탕 하나를 입에 물고 손가락으로 글자를 한 자 한 자 꼭꼭 짚어가며 대답했다. 아이의 부모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다 날 닮아서야. 그런데 이런 천재를 어떻게 가르치지? 유아원이나 유치원에 보내면 오히려 아이 지능이 낮아질 텐데...." 잠자리에 들어서도 아이의 부모는 기쁨 반 걱정 반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 좋은 수가 있어요. 오전에는 내가 두 시간씩 가르치고 오후에는 당신이 퇴근해서 두 시간씩 가르치면 되잖아요." 더 이상의 방법이 떠오르지 않던 부모는 급기야 이렇게 결정하고 당장 그 다음 날부터 실행에 옮겼다. 한참 다른 또래들은 세상의 여러가지에 호기심을 발동하고, 말썽도 부려 미운 네 살로 자랄 나이에 그 아이는 꼬박 4시간을 부모 앞에서 글을 익히고 수를 익혀야 했다. 그런 아이는 누가 보아도 확실히 달랐다. 초등학교 1학년 무렵이 됐을 때는 이미 학교에서 더 이상 그 아이를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모두가 우러러 보는 천재였다. 그렇게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처음에는 줄곧 일등을 유지하며 모든 선생님과 아이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는 그럴수록 점차 외로움을 느꼈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마음껏 뛰어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놀 수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평범하게 놀아서는 안 되는 아이였던 것이다. 누구도 그 아이와 어울려 놀고 싶어하지 않았다. 아니, 그 아이 자체가 이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아이는 그럴수록 점차 밖으로 방황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성적도 예전과 같지 않았다. 하루는 아이의 아버지가 그런 그를 보고 꾸짖었다. "너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 엄마 아빠가 너에게 부족하게 해준 거라도 있는 거니? 너는 천재야, 엄마 아빠가 어려서부터 그런 너를 위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기나 해? ...무슨 문제가 있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냐. 너 때문에 요즘 아빠가 고개를 못 들고 다닌다. 너, 알기나 헤? 사실, 부모 입장에서는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직장이나 이웃에게 천재인 아이 자랑을 수도 없이 해왔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는 아이의 근황을 묻는 질문에 짜증이 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이는 그래도 천재였다. 부모의 그런 꾸지람도 달갑게 받아들였다. 부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아직도 그를 천재로 생각하고 있고, 스스로도 천재임을 한 번도 부인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져 먹었지만 아이의 성적은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도 주위의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급기야 아이는 중학교를 자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이의 천재성은 혼자 공부하면서부터 나타났다. 중졸과 고입, 고졸, 대입 과정을 검정 고시로 순식간에 마치고, 마침내 열 네살이라는 전무후무한 최연소의 나이로 대학에 입학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이가 얼마나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었는지, 얼마나 적응 능력이 떨어져 있었는지 그의 주변 사람들은 물론 그의 부모도 심지어는 그 자신까지도 알지 못했다. 아이의 피해망상증은 점차 그 정도를 더해 갔다. 급기야 정신과 치료를 받기에 이르렀다. 증세는 이러했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다. 치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아이는 퇴원을 하고 학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아이는 그런 환각증세를 현실에서 부딪히게 되었다. 아이는 그날도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우연하게도 그렇게 환상 속에서 자신을 죽이려 하던 사람이 지나가고 있는 것 아닌가. 아이는 그 사람에게 뛰어가서 소리쳤다.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세요! 제발 나를 살려주세요...." 그러면서 아이는 품고 다니던 칼을 꺼내들고 그 남자를 무차별로 찔러 결국은 숨지게 만들었다. 아이는 그 길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판결에 의해 정신 병원에 감금되었다. 사건은 그대로 세월의 흐름 속에 묻히는 듯했다. 그러나 몇 년 후, 다시 찾았을 때의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결코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몇 년 전, 바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났던 실제 이야기이다. 잘못된 천재 교육이 빚어낸 참담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나에게도 그와 비슷한 기억이 있다. 같은 동네에 한 아이가 있었는데, 초등학교까지는 오줌도 못 가릴 정도로 조금은 뒤떨어지는 아이였다. 그런데 이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미 아이는 전교 일등을 맡아놓는 천재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 아이는 전국에서 내로라 하는 고등학교에 우수한 실력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그 아이의 부모는 땅을 팔고, 소를 팔아 그 아이의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아이가 아파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래도 아이는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농대에 들어갔다는 것이 왠지 동네 사람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그도 그럴 것이 좀 안된 얘기지만 농대라고 하면 학벌만을 바라보고 간다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얘기가 아닌가. 그러니 천재로 인정받던 아이가 농대에 들어갔다는 것이 좋은 소식으로 퍼질 리 만무했다. 아이 스스로도 그런 열등감에 싸여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휴학과 복학을 거듭했다. 그러더니 끝내는 한 학기를 남겨놓고 세상을 달리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자살로 끝을 맺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다가 주위의 지나친 관심이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잘못된 천재 교육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인 입장에서 말한다면, 나는 영재 교육이든 천재 교육이든, 그 조기 교육에는 찬성하는 입장이다. 다만 모든 교육에서는 그 교육의 근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지식 습득이나 기술 습득을 주로 하는 기능 교육 이전에 인간 교육이 우선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천재는 자연스럽게 배출되는 것이다.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성취해내는 것이 천재가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미리부터 예정되어 있는 천재를 인위적으로 키우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계발되지 않은 아이의 능력을 발견하고 키워주는 것이 천재 교육이 아니겠는가. 물론 어려서부터 지능 지수를 비롯한 모든 면에서 천재에 속했던 아이들이 자라서는 오히려 정상치에도 못 미친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천재 교육 제도 부재에 대한 비판 여론도 많다는 바를 모르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나라 교육 제도의 맹점을 지적할 수 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오랜동안 생활을 해오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치가나 과학자, 문학가를 배출한 그 나라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바도 있다. 그러나 그 나라의 교육 제도나 목표를 보면서 실망한 바도 많다. 어디에서도 천재들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 제도나 기관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너무나도 평범한 인간을 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아이들은 만 세 살이 되면 누구나 탁아소에 입소한다. 만 세 살이 되면 대다수의 아이들의 지능 지수가 굳어진다는 통계를 볼 때, 이러한 탁아소의 교육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특별한 교육은 찾아볼 수가 없다. 유치원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우리하고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결코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문자나 수를 가르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리기와 만들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아이들은 그러한 부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기를 통해서는 많은 상상력을 키우기도 하고 그 상상력을 구체화하기도 하며, 만들기를 통해서는 손 기능과 공간 구조를 잠재적으로 익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의 교육 방법이다. 그들은 결코 암기식이나 주입식 교육을 하지 않는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아이들에게 단답형이나 직접적인 대답이 나오는 것을 회피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양 열 일곱 마리를 키우고 있던 어떤 사람이 죽으면서 자기 자식들에게 유언을 했단다. '큰아이는 이 중에서 반을 갖고, 둘 째 아이는 그 나머지 중에서 3분의 2를 갖도록 해라. 그리고 막내는 그 나머지의 3분의 2를 갖도록 해라.' 애야, 네 생각에는 몇 마리를 갖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니? 그러한 질문에 닥친 아이는 처음부터 곤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열 입곱 마리의 반을 나눈다는 것부터 걸리는 것이다. 골몰하던 아이는 대답한다. "그럼, 우선 한 마리는 제쳐놓고 열 여섯 마리만 갖고 나누기로 해요, 그러면 첫째는 여덟 마리를 가지면 되지요? 그리고 나머지 여덟 마리에다 아까 빼놓은 한 마리를 합하면 아홉 마리가 되잖아요. 그것을 3분의 2하면 여섯 마리니까, 둘째가 그것을 가지면 되고, 그 나머지 세 마리의 3분의 2는 두 마리니까 그것을 막내가 가지면 돼요.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음, 한 마리는...." "그래, 나머지 한 마리는 어떻게 하지?... 다른 방법은 없을까?" "다른 방법도 있어요. 한 마리를 다른 데서 빌려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열 여덟 마리가 되잖아요. 그러면 첫째가 반인 아홉 마리를 갖고, 둘째가 나머지 아홉 마리 중에서 3분의 2인 여섯 마리, 막내가 나머지 세 마리 중에서 두 마리를 갖는 거예요.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빌려온 거니까, 돌려주면 되잖아요." 아예 처음부터 다른 쪽으로 답변하는 아이도 있다. "왜, 같은 형제가 다르게 몫을 받아야 해요?" 이렇게 이스라엘에서는 모든 아이들의 교육의 초첨을, 창의력을 계발하고 지혜를 키우는 데 맞추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인성 교육이다. 그들은 인격 형성에 가장 중요한 시기에는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결코 학과 성적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성격이나 창의력, 정신 자세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연스럽게 천재가 되는 기초를 다지고 있는 셈이다. 그것도 히틀러가 아닌, 핵폭탄을 만들지 않는, 인류의 발전에 공헌하는 천재를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천재와는 개념부터 다르게 생각한다. 기억력의 천재, 아이큐가 높은 천재란 뜻에서 천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천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아이는 국어나 산수와 같은 교과목을 잘하는가 하면, 또 어떤 아이는 노래를 잘 부른다. 그리고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운동을 아주 잘하는 아이가 있다. 그러한 아이들은 그 분야에서 만큼은 신동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계발할 소지가 많은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모르는 아이는 이 다음에 돈을 아주 잘 버는 재능을 나타낼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재능을 찾아주고, 자신 있게 키워주는 것이 이스라엘 교육의 뿌리인 것이다. 천재를 만든다는 것은 잘못되는 생각이다. 그것보다는 아이의 재능을 계발하고 키워주는 것이 진정한 천재, 즉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계발하는 교육인 것이다. 엄마, 난 다른 걸로 주세요 아무리 텔레비전에서 덥다고 아우성치고 있었지만, 모처럼 턱 방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건 천국이 따로 없다. 실로, 몇 년 만의 귀향인가. 그래, 세 살박이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니, 온 가족이 이스라엘로 떠난 지 꼭 6년째였다. 그러니 항상 30도를 웃도는 후덥지근한 날씨에 이골이 난 내가, 이렇게 시원한 바람까지 부는 서울 하늘 아래에서 더울 리 만무했다. 거기다 여기는 비록 전세일망정 내 집이 아닌가. 그런데 이건 웬 날벼락이람. "여보, 한국에 들어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그래요? 어서 나와 보세요." 아내였다. 며칠은 며칠이야. 이제 겨우 한 두 주일 지났지. 내심 투덜거리며 혹시 누가 찾아오기라도 했나 해서 막 들려던 잠을 쫓으며 거실로 나갔다. "이 콩나물이나 좀 다듬으세요. 이스라엘에 있을 때는 시키지 않아도 잘만 하시더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되긴 뭐가 어떻게 돼? 여기는 한국이야, 한국.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라구, 그런데 뭐야? 대한민국 어떤 남자가 콩나물을 다듬나, 다듬긴." "저이가 정말, 마음이 변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도 모르세요?" "그래, 알았다구. 대신 오늘 한 번뿐이야." 이스라엘에서는 모든 가족이 분담하여 집안일을 한다. 거기에는 그들만의 공동체 문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장점도 있고, 내게도 도움이 되겠다 싶어 나도 이스라엘에서는 가끔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곤 했다. 그러나 여기가 어디인가. 로마에서 로마법을 따랐으면 한국에서는 한국법을 따라야 마땅하다. 은근히 부아가 올랐다. 아내도 이스라엘에서는 이것 저것 일을 많이 했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 나라의 생활 습성 때문이었다. 그 나라에서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집에서 빈둥거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점차 한국에서는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이것 저것 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아이들이었다. 당장 내일 모레면 개학을 할 텐데, 한국말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놀리기라도 하면 아이가 기가 죽어 버리지나 않을지, 개방적인 학교 생활을 하던 아이들이 우리 교육 풍토에 잘 적응해 나갈 수 있을지, 여간 걱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집에서부터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특히 식사 시간만큼은 항상 문제였다. 이스라엘에서도 쌀을 비롯한 모든 재료들이 우리 음식을 만들어 먹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쌀이었다. 쌀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나라에서는 우리가 좋아하는 찰진 쌀보다는 소위 안남미라고 부르는, 밥을 해놓아도 바람에 날리는 그런 푸석푸석한 쌀이 인기여서 우리가 좋아하는 기름진 쌀은 구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찰진 쌀이 가격은 훨씬 쌌다. 어찌보면 그 나라만큼 음식에 있어서 자유로운 나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가정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음식도 변해갔다. 그렇다고 집에서 밥을 안 먹은 것도 아닌데 아이들은 간편한 빵이나 스프에 더 길들여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야 어디 그런가. 밥을 먹어도 찰진 우리 쌀로 지은 걸 먹고 싶고, 국을 먹어도 구수한 된장국을 먹고 싶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밥 문제로 아이들하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허나 온 가족이 자기 취향대로 따로따로 먹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 식탁에서 먹는 밥 색깔까지 달라야 한다면 그게 어디 한 가족이요, 한 식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돌아가며 먹는 것이었다. 하루는 빵과 스프를 먹었으면 그 다음날은 밥, 하는 식으로, "그나 저나 이 녀석들, 오늘은 밥 좀 제대로 먹을까." "안 먹으면 어쩌겠어요. 억지로라도 먹여야지." 아니나 다를까. 식탁에 앉아 있는 아이들 표정을 보니, 영락없이 도살장에 끌려온 소나 다름없다. "엄마, 난 다른 걸로 주세요." 큰아이는 약속한 게 있으니, 말을 못하는데 작은 아이가 항상 투정이었다. "너, 아버지하고 약속했었지?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예요." 그렇게 타일러서 억지로 숟갈을 쓰게 하자 아이는 온 인상을 찡그리며 먹는 시늉만 내다가 끝내는 더 이상 못 먹겠는지 자리를 뜨고 만다. 먹지 않는 자식을 보고 마음 안 아픈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들어가던 콩나물국이 뜨끔하고 가슴에 얹혔다. 그런 마음을 눈치챘는지, 기회는 이때다 하고 큰아이가 물어왔다. "아빠, 그런데 왜 꼭 밥을 먹어야 하는 거예요?" "그럼, 너는 어느 민족이지?" "한민족이요. 그거 하고 밥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그러면, 너 토끼는 무엇을 먹고 사는지 아니?" "그야, 풀을 먹고 살잖아요." "그렇지? 토끼가 고기 먹는 것을 보지 못했지? 그럼, 미국에 사는 토끼는 다른 것을 먹고 살겠니?" "...." "그봐라. 토끼는 풀을 먹어야 토끼가 되는 거예요. 토끼가 고기를 먹는다거나 다른 것을 먹으면 이미 그때는 토끼가 아닌 거야. ...그렇게 우리 민족도 몇 천 년을 밥을 먹으며 살아온 거란다. 그래서 우리 민족이 있는 거지." "그런데, 우리 민족은 왜 하필이면 밥을 먹는 거지? 더 맛있는 것도 많은데...." 그렇게 불평을 하면서도 큰아이는 느리지만 쉬지 않고 수저를 옮겼다. 그래, 아빠도 왜 우리 민족이 밥을 먹어 왔는지는 알 수 없지. 하지만 그 속에 우리의 혼이 있고 문화가 있는데 어쩌겠니. 조금만 참고 먹어보아라. 그러면 곧 익숙해질 테니. 네 몸에도 같은 피가 흐르고 있지 않니. 밥을 먹으면서 괜히 나 혼자 감상에 젖어 삼키는 것마다 목에 걸렸다. 본격적인 문제는 아이들이 개학을 하고, 한 달쯤 뒤에 일어났다. 막내아이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면담 요청이 떨어진 것이다. 미리 한 번 가보았어야 했는데, 나만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을 내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사실 큰 아이도 그렇고 다들 이스라엘에 있을 때보다 기운도 없고 명랑하지도 않았지만 적응과정이려니 하고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학교를 방문했을 때, 나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 앞에서 어쩔 바를 몰랐다. "아이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도통 책 읽을 줄 몰라요. 한글을 아직 못 깨친 건가요?" 아니, 이런 당연한 말을 하려고 바쁜 사람을 부르다니. 이제 1학년 2학기 초에, 아이가 이스라엘에서 공부를 하다 왔으니 모르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대답이 없자 선생님이 다시 설명한다. "우리나라 교육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지금 우리나라 초등학교에서는 한글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두가 유치원이나 가정에서 한글을 깨치고 오기 때문에 가르칠 필요가 아예 없는 거지요. 그러니 한 사람만을 위해서 다른 아이들을 희생시킬 수도 없고, 어쩌시겠어요?" 어쩌다니. 유치원에서 어린 나이에 한글을 가르친다는 것에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의 교육만 생각하고, 그리고 내 어렸을 때만 생각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학교에서 시험을 매주 보는데, 일반적으로 아이들은 90점 이상 받는데 댁의 아이는 0점, 기껏해야 20점 정도 맞거든요, 그러니 제가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참 무심한 부모도 다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요. 그러니 집에서 아이를 개인적으로 좀더 지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그렇게 걱정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곧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집에서 가르치자니 이스라엘 교육관에 익숙해 있는 내 의식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더더구나 유치원에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다시 적응해야 하는 아이도 걸렸지만 부모 입장으로서는 아이가 남들보다 1년을 늦어야 한다는 것이 더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일단 집에서 가르쳐 보겠다는 말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도 아이에게 '가나다라'는 가르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동화책 읽어주는 시간을 좀 더 늘렸을 뿐이다. 선생님도 포기했는지 그 후로는 연락이 없었다. 그래도 겨울방학에 이르자 아이는 한글을 거뜬하게 알게 되었다. 거기에다 아이는 다른 애들보다 많은 상상력을 갖출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동화 속의 사람들과 환경들을 더 많이 만났을 테니까. 점차, 귀국한 후 생활이 안정권에 접어들자 나를 돌이켜보는 시간이 잦아졌다. 그럴수록 이스라엘에서보다는 뭔가가 자꾸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가 꼭 빠져버린 듯한 느낌이 자주 들었다. 혼자서 길을 걷다가도, 친구를 만날 때에도 그런 느낌은 수시로 나를 엄습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가족이었다. 모두들 집에 있었지만 예전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어디를 가든 항상 가족 동반을 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고 누구나 혼자였다. 아빠는 아빠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그러니 친구도 제대로 없는 아이들은 방구석에서 뒹구는 것이 놀이였고 일이었다. 그리하여 생각해낸 것이 '가족의 날'이었다. 우리처럼 가족 공동체적인 생활이 없는 나라에서는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날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고 '가족의 날이 거창한 것은 아니다. 모두가 1주일에 하루의 시간만 내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낸 시간들을 합쳐 온 가족이 함께 어울리면 되는 것이다. 온 가족을 모아놓고 매주 토요일을 '가족의 날'로 선포하자, 아이들은 물론 아내까지도 입이 벌어졌다. "아빠, 그렇게 모여서 무얼 하는 건데?" 역시, 아이들은 재미가 있어야 되는 모양이다. 그냥 모이는 것만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는지 큰애가 물었다. "글쎄다. 너는 무엇을 하고 싶은데?" "응, 엄마 아빠랑 같이 공기놀이를 하고 싶어." "그래? 그럼, 공기놀이를 하자꾸나. 막내 너는?" "응, 맛있는 거 먹으러 가고 싶어." "그래, 그렇다면 가야지. 그러나 오늘은 아니고, 돌아오는 토요일부터니까, 우리 순서를 정하자. 그렇게 해서 차례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거야. 어때 좋지?" 그렇게 만장일치로 결론을 내리고 제비 뽑기를 하여 순서를 정했다. 하루는 온종일 공기놀이를 하기도 하고, 또 하루는 박물관에도 가고, 다음 날 좀 여유로울 때는 1박 2일로 온 가족이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자 차츰 아이들에게도 생기가 돌고 내 허전함도 사라져 갔다. 공동의 일을 다시 찾은 덕분이었다. 가족에게는 늘 가족이라는 연대감이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거기에서 신뢰와 사랑의 감정이 깊어가는 것이다. 알찬 대화를 통해서. "아빠, 어디 가시려구요?" "응, 그래. 친구와 약속이 있단다." "그럼, 나는 따라가면 안 돼요?" "물론, 안 되지. 여기는 한국이잖아. 그 대신 가족의 날에 함께 재미있게 지내자꾸나...." 절 제발 좀 내버려 두세요 청소년 문제가 나오면 항상 뒤따라 나오는 말이 청소년들의 여가 선용 문제이다. 수업이 끝나도 마땅히 갈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청소년들의 놀이 문화를 비판하고, 놀이 공간이 없음을 한탄한다. 결국 아이들이 접할 수 있는 공간은 퇴폐적인 업소뿐이라고 단정을 내린다. 이스라엘에서 오랜 동안 생활을 한 나로서는 이러한 말을 접할 때마다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도대체 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자기가 좋아서 즐기고, 또 즐김으로써 마음과 육체의 안정을 얻을 수 있으면, 그것이 놀이가 아닐까. 그래도 이스라엘과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그런 시설면에서 훨씬 행복해 보인다. 야외 문화 공간으로 나갈 수도 있고, 탁구장이나 전자 오락실에도 갈 수 있지 않은가. 이스라엘에는 청소년의 여가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것은 하다못해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술 한 잔 기울이기가 힘들다. 그들에게 기껏 갈 수 있는 곳은 수없이 흩어져 있는 성지가 전부이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한 놀이 공간이 없어서 못 가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러한 공간이 있어도 가지를 않는 것이다. 이스라엘에도 술집을 비롯한 환락가가 있다. 물론 그러한 공간은 특수 시설로 분리되어 마을이나 학교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 같으면야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멀다해도 찾아가겠지만 그들은 결코 찾지 않는다. 간혹 외국인 친구를 만나 가는 일이 있어도 그들은 맥주 한 병을 넘기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이들 공간은 외국인 여행객의 차지가 될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에서는 그런 여가를 위한 공간을 만들려 해도 장사가 안 되어 만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훌륭한 놀이 공간은 일터와 가정이다. 그들은 여가 시간에 하나같이 일을 한다. 그러고도 남는 시간이 있으면 가족과 어울린다. 그면서도 그들은 모두가 만족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이런 근면한 정신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고난의 역사와 종교 그리고 교육이다. 그들의 고난스런 역사는 지금도 그들을 안락하게 몸을 누이고 쉬게 하지 않는다. 결코 그들은 과거지 잊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고단한 몸과 마음을 종교에 의지해 풀어 버린다. 그리고 새로운 충전을 하기 위해 교육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놀이 문화는 철두철미하게 사회적인 약속 속에서 독특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그들은 돈의 소중함에 대해서 몸소 느끼며 자란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절대로 용돈을 그냥 주는 법이 없다. 청소를 하든 설거지를 하든 일을 해야만 용돈이 아닌 그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일을 하지 않으려면 먹지도 말라.' 그들은 이 말씀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집이 아닌 일터에서 일을 하고, 그 대가로 그들의 용돈을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돈의 소중함을 아는 것이다. 그러니 그 돈을 함부로 소비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일을 하면서 그들이 얻는 것은 돈뿐이 아니다. 그들은 일을 하면서 일찍부터 독립심과 자립심을 키운다. 그리고 그들은 일을 함으로써 장차 닥칠 사회 생활의 기초를 다져나가고 있다. 우리처럼 대학을 나와도 재교육을 해야 하는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한 번은 제과점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아이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너는 그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하려고 그러니?" "예, 방학 때 친구들하고 해외에 나가기로 했어요." 모두가 이렇다. 그들은 돈을 벌면 90퍼센트가 여행을 한다. 그리하여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실제적인 견문을 넓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그들이 눈에 띈다. 그들은 결코 옷차림이나 용모에 신경을 쓰지 않고 다닌다. 낡은 청바지에 티셔츠 하나만 걸치고 농구화에 커다란 배낭을 걸친 여행객의 대부분이 그들이다. 언젠가 남대문 시장에서 만난 학생은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낯익은 얼굴이라 친근감도 있고 하요 그 뒤를 밟아 보았었다. 그 학생은 물건은 살 생각도 하지 않고 손짓 발짓 다해가며 가격에만 신경을 쓰는 듯 보였다. 그리고는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통역을 해주는 척하면서 슬쩍 적고 있는 내용을 훑어 보았다. 거기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각 시장마다 같은 제품의 가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도시를 다녀본 모양이었다. 여러 도시의 시장 이름들이 눈에 띄었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넌 도대체 그런 것을 무엇하러 그렇게 적는 거니?" "아, 예. 나중에 자료로 쓰려고요." "자료라니?" "저는 지금 중등학교 3학년인데, 공부에는 별 흥미도 없고, 성적도 좋지 않거든요. 그러니 제가 원한다고 해도 대학은 갈 수 없지 않겠어요? 그것도 그렇지만 사실, 저는 장사가 더 제 적성에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중에 장사라는 데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는 중이에요." 그러면서 그 학생은 나에게 수첩을 넘겨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또 다른 나라의 시장들에 대한 조사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학생은 그 자료를 기본으로 무역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먼 앞날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서도 그 나라 국민들보다 더 훤히 그 나라의 물가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아이들은 우리의 배낭 여행과는 목적부터 다르다. 배낭만 하나 짊어졌을 뿐, 우리의 젊은이들은 일반 행락 여행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 기껏해야 이름 있다는 박물관이나, 역사 유적지를 다니나 돌아오는 것이 전부가 아닌가. 그 학생을 만난 후, 해외 여행을 가겠다는 제자를 만나 그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그러자, 다 듣고 난 학생은 무릎을 치며 감탄을 했다. "선생님도 참, 그런 좋은 방법이 있었으면 진작에 알려주실 일을... 선생님 안 뵙고 그냥 떠났더라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그렇게 감탄을 하는 학생은 많았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학생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를 졸업하고 내 주선으로 이스라엘의 키부츠 연수를 다녀온 학생이 찾아왔다. "그래, 어딜 갔다왔기에 그렇게 복날의 개처럼 그을렸는가? 쓸데없이 발가락의 무좀만 태워죽인 건 아닌가?" "선생님도 원, 모처럼 찾아뵙는 제자한테 별말씀을 다하시네요." 그 친구는 거의 정색까지 하며 말을 이었다. "... 동남 아시아를 한 바퀴 돌고 왔는데 선생님, 글쎄, 생각지도 못한 것을 발견했어요. ...아, 글쎄, 목화씨 있잖습니까? ...." "원, 녀석도, 숨 넘어가겠다. 천천히 좀 떠들어라. 그래, 목화씨가 어쨌다는 거야?" "그러다가 돈방석에 앉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니, 아무리 현대판 문익점이라도 쓸모없는 목화씨로 뭔 돈을 벌겠다는 거냐?" "선생님도 참, 제가 얼마 전에 사료 공장에 견학을 갔었잖아요. 거기서 보니까 목화씨가 고급 사료용으로 쓰이더라구요. 그런데...." 그 학생의 말은 이러했다. 우리나라의 목화 재배는 이제 사양길로 접어 들었다, 그러니 그 많은 목화씨를 어디서 구입하겠는가, 결국 수입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런데 이번 여행길에서 그 어마어마한 돈덩어리가 그냥 버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떼돈 버는 방법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하는 말이었다. "그래, 그 멍청한 나라가 어디든?" "베트남이요. 그 나라는 아직 개방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세상물정을 잘 모를 거 아닙니까. 그냥 마구 버리더라구요." 나중에 다시 소식을 전해왔을 때에는 이미 그 학생은 돈방석에 앉아 있었다. 물론, 이런 획기적인 경우가 반드시 해외 여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작은 일의 과정 속에서 하나의 커다란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부모들은 아이가 무슨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하면 역정부터 내기가 일쑤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은 쉬운 일, 그것도 손쉽고 벌이는 괜찮은 일만을 찾으려 한다는 것도 부모가 우려하는 것 중의 하나다. 그리고 그 노동의 대가를 사용할 목적이 좋지 않은 경우도 있다. 향락이나 사치를 하기 위하여 돈을 벌려 한다면 어느 부모도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거냐. 가만히 공부만 열심히 해라. 엄마, 아빠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피땀 흘려 가며 돈을 버는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도 마라. 너, 괜히 공부하기 싫으니까, 그러는 거지?" 이러한 부모의 품에서 자란 아이들은 커서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정신적 불구가 되기 쉽다. 그러면서도 그 아이들은 언제다 독립을 꿈꾼다. "엄마, 절 제발 좀 내버려 두세요. 진짜 제가 하고 싶은 것은 간섭받지 않고 사는 거예요." "그럼, 내보내 줄 테니까. 혼자 한번 살아볼련?" "...대신에 돈을 주세요." 십중팔구 독립을 꿈꾸는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끝맺음이 돈을 달라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반쯤 불구 상태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이 모두가 교육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조건 내 새끼, 내 새끼 하며 젖꼭지를 물릴 때부터 이러한 싹은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아이들에 대한 지나친 보호는 아이가 커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은 늙어도 자식이라는 생각은 너무 지나친 것이다. 아이는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소명을 갖고 자신만의 길을 가도록 규정지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야 아이가 정신적, 경제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할 때에도, '그래, 품에 있을 때나 자식이라더니.' 하는 푸념 없이 아이를 축복 속에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험악한 세상이라도 다 큰 딸에게 늦게 들어온다고 간섭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아이에게 더 깊은 믿음과 사랑을 심어주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아이들도 두려움 없이 사회 속으로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요즘, 항간에는 '머피의 법칙'이라는 노래가 유행인가 보다.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결국 잘못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머피의 법칙'이다. 너무도 당연한 논리가 아닌가. 그런데도 이 '머피의 법칙을 비꼬아서, 잘못될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잘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요행의 내용을 남은, 같은 제목의 노래가 히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왠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의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아 떨떠름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막연한 기대는 결국 실망으로 나타나는 법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인정치 않음은 직접 뛰어들어 보지도 않고 주저앉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금부터라도 아이에게 가르쳐야 한다. 홀로 뛰어들어 성취하는 기쁨이 어떤 것인가를. 그리고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 청소년들은 지금도 포기할 줄 모르고 열심히 뛰고 있다는 것을. 네가 알기는 뭘 안다고 그래 오래 전 일이다. 교육자로서 교육 여건만 탓하는 것이 좀 무엇한 얘기지만, 사실 모든 학생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한 학생이 뇌리에 계속 남아있는 것은 그 학생의 경험이 나에게는 교육자의 길을 가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 학생은 강의 시간에 너무 말이 없다는 것 이외에는 언뜻 따른 학생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별로 눈에 뜨이지도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아이가 하루는 지도 교수였던 나를 찾아온 것이다. 이유는 자퇴를 하기로 결심했다는 거였다. "왜, 자퇴를 하려고 그러는가?" "...." 그 학생은 몇 번을 거듭 묻자,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저는 모든 선생님을 싫어합니다. 아니, 증오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제 심정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학교에 다닌 이유는...." "그래, 그 이유가 뭔가?" "그것은, 그것은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런 마당에...."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그 학생은 홀어머니와 함께 어려운 생활을 해왔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서 그 학생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선생님에 대한 증오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어머니를 위하여 학업을 계속해 왔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마당에 더 이상 양심을 속여가면서 학업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 학생의 말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학생에게 그렇게 선생님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주었을까. "...그래, 자네 심정을 이해할 만도 하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선생님을 그렇게 증오하고 있는가?" "...." 그 학생은 아무 말이 없었다. 눈가에는 어머니를 여읜 슬픔과 선생님에 대한 분노가 함께 어려 있는 듯했다. "선생님이 어머니를 죽게라도 했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모든 선생님이 저를 미워했습니다. 아마, 제가 가난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하루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그 학생은 주위로부터 많은 따돌림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성격도 무척 내성적으로 변해갔고, 또래와는 다르게 더 빨리 세상물정도 알아갔다고 한다. 그런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파출부로 일하던 그의 어머니는 학교에 나올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봤더니, 공부 잘하고 똑똑한 몇몇 아이들의 부모만을 학교로 불렀었는데, 그때 선생님을 찾아왔던 부모의 아이들만을 반장, 부반장 등 학급 임원으로 뽑았다는 거였다. 그때부터 그 학생은 선생님이 자기를 미워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막연히 선생님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갖고 있던 그에게 또 한 번의 일이 발생했다. 음악 시간이었다. 그 날은 선생님이 '퐁당퐁당'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물 씻는 누나에게 돌을 던져 물을 튀게 한 동생은 참 짓궂은 장난꾸러기이지요?" 모두가 선생님의 질문에 한결같이 '예'하고 대답했지만 그에게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요, 나물을 씻는 누나에게 물을 뿌려주었으니까, 착한 동생이에요." 그래서 불쑥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선생님은 그런 그의 대답에,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지 않고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선생님 말이나 잘 들어요." 그날 이후로 한동안을 그는 말이 없는 아이로 지냈다고 한다. 그 학생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무척 착잡한 심경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할 수 없는 다양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상상력을 키워주면 그것은 장차 훌륭한 창의력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아이들에게 끝없는 질문을 하도록 가르친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리의 어머니는 대부분, "그래, 학교에서 재미있었니? 오늘은 선생님한테 무얼 배웠니?" 하고 묻는다. 그러나 이스라엘 어머니는 절대로 그렇게 묻지 않는다. "그래, 오늘은 선생님한테 무엇을 질문했니?" 하고 묻는 것이다. 그들은 듣기만 하면 앵무새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렇게 아이들에게 질문을 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아이들의 창의력과 사고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선생님은 모르는 것이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심어주어 아이들이 선생님을 믿고 존경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수업 풍경은 아수라장을 연상시킨다. "선생님, 왜 칠판 글씨는 하얀색으로만 써요?" "유리창은 왜 반짝거려요?" "선생님, ... 그건 왜 ...." 아이들의 질문은 끊임없이 쏟아진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으응, 그것은 하얀색이 가장 잘 보이고, 눈에 피로도 적게 주기 때문이에요." "유리창은 아주 매끄러워서 빛을 잘 반사하기 때문이에요." 하고 대답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들은 아이들의 질문에 또 하나의 질문을 만들어 다시 아이들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그럼, 칠판에 빨간색으로만 글씨를 쓰면 어떻게 되겠니, 아니면, 검은 칠판에 검은색으로 글씨를 쓴다면 또 어떻게 될까?" "에스더, 그럼 선생님 눈은 왜 반짝거릴까?" 이렇게 질문과 질문이 거듭되니 교실 안은 난장판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은 질문의 핵심에 점점 접근해 간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들은 그 주변의 지식까지도 자연스럽게 익혀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선생님들은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칭찬해 준다. 교실의 환경 미화를 하거나, 시험지 채점을 할 때에도 우리 선생님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를 우선으로 뽑아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아이가 학교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심 밖으로 밀려난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 소외된 아이들은 선생님의 관심을 사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한다. 공부 시간에 큰소리로 잡담을 하기도 하고, 종이 비행기를 접어 선생님에게 날리기도 한다. 관심을 받기 위한 실로 눈물 겨운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선생님은 또 수업 시간에 방해가 되는 그 아이들을 앞으로 불러내어 많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벌을 준다. 그렇게 아이들은 영영 구제받을 수 없는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그들의 관심은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 있지 않다. 사실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원만하게 이루어진 아이에게 더 이상의 인성 교육은 필요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스라엘의 선생님들은 지능이 좀 떨어지는 아이, 성격이 원만하지 못한 아이에게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기울인다.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아이에게는 교실 환경 정리를 할 때, 도맡아서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에게 적극성을 키워주는 것이다. 지능이 떨어지는 아이와는 더 많은 질문과 대화를 한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문제가 있을 때 선생님은 그 학부모와 상세히 면담을 한다. 그리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러면 그 학부모는 충실하게 선생님의 의견을 수긍하고 따른다. 사회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아이가 있는 이웃끼리 서로 빈번하게 왕래하며 서로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들은 남의 아이가 잘못되면 내 아이도 잘못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아이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사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 학생은 다행히 말은 없으면서도 공부는 잘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 문제 없이 초등학교는 졸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졸업식 날은 또 한 번의 악몽의 날로 기억되어 있었다. 자기보다 공부도 못하고 말썽만 피우던 아이들은 아버지가 교육감이라고, 어머니가 선생님이라고 상을 받는데, 자신은 상 하나 받지 못했다는 거였다. 그날, 그는 수없이 울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도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바뀐 환경 속에서 그는 새롭게 생활하기로 마음을 다져먹었다. 그러나 또 한 번 그에게 뼈아픈 일이 터지고 말았다. 영어 시간이었는데, 그날은 교생 실습을 나온 선생님이 가르쳤다. 선생님은 문장 형식에 대해 설명하면서 칠판에 문장 하나를 써놓았다. 'I throw a stone to the dog.' 그것을 본 그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to'는 사람에게만 붙일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알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개한테도 'to'를 붙입니까?" 3형식 문장을 가르치던 선생님은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을 했는지, 그에게 하지 않아야 할 말을 했다. "야, 이 녀석아, 너는 지금까지 그것도 몰랐어?" 딴에는 공부 하나만은 잘한다고 자부심을 갖고 있던 그 학생은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선생님의 말투에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다만, 다시 말이 없어질 뿐이었다. 한 번 말이 터지자, 그 학생은 그동안 쌓여온 모든 한을 풀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때로는 입술을 깨물면서, 때로는 눈물을 훔치면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고등학교에서는 선생님으로부터 억울하게 뺨을 맞고 반성문까지 썼다고 한다. 물리 시간이었는데 선생님은 칠판에 문제를 내고 학생들에게 차례로 질문을 해나갔다. 그리고 자기 차례까지 왔다.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물어물하고 있는데 갑자기 뺨으로 손이 날아왔다. 그것도 십여 차례나. 이유는, 공부 잘하는 녀석이 반항한다는 거였다. 그러나 학생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직 존경해야 할 선생님에 대한 증오만이 불처럼 일었다. "...지금도 그런 증오가 이렇게 남아 있는데, 제가 더 이상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그 학생은 힘들게 말을 맺었다. 그러나 그때 내가 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명하게 사회 활동을 하다 지긋한 나이에 회고록을 펴낸 사람의 책에는 항상, 어떤 스승을 잊을 수 없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그 스승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정반대의 입장에서 그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그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내가 지금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찌됐든 어렸을 때, 선생님이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짐작케 하는 말이다. 선생님의 작은 말 한 마디가 아이에게는 무한한 용기와 희망으로 주어지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패배감에 빠져들게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용서할 수가 없나?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네의 오해였을 수도 있지 않나. 어찌됐든 그런 이유로 자퇴를 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네. 우리 시간을 가지고 좀더 생각해 보세." 그날은 그렇게 얘기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 학생을 다시 볼 수는 없었다. 청소년 문제만 제기되면 나는 그 학생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교육자의 길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그 학생도, 그 선생님도 모두가 주입식, 암기식에서 비롯된, 잘못된 교육의 피해자다. 그러나 모두가 피해자라고 하소연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모두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참된 교육의 방향을 찾아야 한다. "네가 알기는 뭘 안다고 그래." "너는 몰라도 돼." 지금부터라도 이런 말을 하지 않도록 하자. 아이에게는 무한한 상상력이 있다. 또한 위대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그렇게 풍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또 그만큼 감수성이 예민하기도 하다. 이런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느냐는 전적으로 우리 어른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너는 구구단도 하나 못 외우니? 하루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큰아이가 산수책을 펼쳐 놓고 열심히 손가락을 꼬부렸다 펴는 동작을 계속하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는 눈치였다. 한참을 그러면서도 답이 나오지 않는지 아이는 이제 아예 연필로 손가락에 색칠까지 하고 있었다. "애야, 계산이 잘 안되니?" "예, 아빠." 그러면서 아이는 지원군이 나타나자 얼른 산수책을 들고 내곁으로 다가 앉았다. "아빠, 4곱하기 2는 8이지요? 그러면 4곱하기 8은 얼마예요?"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그것은 충격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 아이가 그 쉬운 한 자리 곱셈도 할 줄 모르다니... 그것도 구구단만 외우고 있으면 나오는 답을. 그렇다면 이 아이가 구구단도 아직 못 외운다는 말인가. 아무리 어려운 유학길에 올라 내 공부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해도, 아이에게 너무 소홀했었다는 자책감마저 들었다. "너, 아직 학교에서 구구단을 안 배웠니?" "아빠, 구구단이 뭔데요?" "...."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우리 같으면 초등학교 2학년만 되면 4곱하기 3은 4가 3개 있으니까 그래, 12구나 하는 논리는 몰라도, 사일은 사, 사이 팔, 사삼 십이, 하고 합창하듯 외워 알고 있는 것이 구구단이 아니던가. 나는 아이의 책을 펼쳐 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러나 어느 구석에도 곱셈에 대한 이론은 있어도 구구단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 책에는 안 나와 있어도 선생님이 외우라고 가르쳐 준 것 없니? 이일은 이, 이이는 사, 이사 팔, 이런 거 말야." "아뇨, 선생님이 그런 거 안 가르쳐 주셨는데요." 눈으로 아이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다그칠 수도 없고 해서 나는 그 자리에서 백지에다 쓱쓱 구구단을 적어 주었다. "이게 바로 구구단이라는 거다. 이걸 다 외우고 있으면 손가락, 발가락 셀 필요가 없을 테니까, 지금부터 외우도록 해라." 그러면서 나는 아이에게 합창하듯 외우는 법까지 알려주었다. 아이는 마치 노래라도 부르는 듯 즐겁게 따라했다. 그러면서도 내 머리 속에는 어떻게 총명하다는 유태인들이 구구단도 하나 안 가르쳐줄까 하는 의아심으로 가득 찼다. 그러던 중 마침 학부모 모임이 있어 선생님에게 살며시 물어 보았다. "선생님, 구구단은 언제부터 가르치십니까?" "구구단이라니요? 도대체 그게 뭡니까?" 이거야 참 선생님까지도 구구단을 모른다니, 설마 모를 리야 없겠지. 아마 내 말을 잘못 알아들었겠지 라는 생각에 나는 아이에게 했던 것처럼 구구단을 외워 보였다. "그거 참, 좋은 방법이군요. 그러면 한국 어린이들은 모두가 그것을 다 외우고 있겠군요." "물론이지요. 그걸 모르면 어떻게 곱셈, 나눗셈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모처럼 뿌듯해져 목에 힘까지 주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좋은 방법이 있다는 선생님의 말에 그것도 한 순간에 그치고 말았다. "그게 뭔데요?" "계산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걸 사용하면 굳이 연필로 계산할 필요도 없고 시간도 절약될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이스라엘의 초등학교에서는 구구단도, 계산기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이에게 지혜를 어떻게 가르치겠습니까? 그래도 곧 아이들이 구구단이라는 말은 몰라도 구구단의 곱셈이나 나눗셈을 알게 될 겁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한 가지를 더 배우는 셈이 되는 거지요." 쉬운 길을 놔 두고 어려운 길로만 가려한다는 답답함이 조금 남아 있었지만 여기서 내가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아이는 4학년이 되자, 구구단을 외우고 있는 사람보다도 더 빠르고 정확하게 곱셈, 나눗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교육 방법은 학교나 가정에서도 거의 차이 없이 이루어진다. 아이가 집에서 무엇을 물어볼 때도 무심코 대답하는 법이 없다. "엄마, 아가는 왜 누워만 있는 거야?" "글쎄, 왜 그럴까? 다리가 없나?" "여기, 다리 있는데?" "그럼, 다리가 하나 모자라나 보지. 한번 네꺼랑 맞춰 보렴." "두 개씩 똑같아요." "네 다리랑 크기도 같고, 힘도 같니?" "아뇨, 힘도 없고 작아요." "왜 그럴까?" "으음, 젖만 먹으니까요." "그러면 너도 이제 누워만 있어야겠구나. 너도 밥 먹을 때, 맛있는 반찬 한 가지만 먹지 않니?" "..." 이렇게 결코 그들은 무엇을 강제로 시키려 하거나 주입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교육이 무엇을 가르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고하느냐를 가르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고정 관념이나 발상의 전환을 요구할 때, 우리는 흔히 콜럼버스의 달걀을 예로 들곤 한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오자 이를 공개적으로 비웃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에게 배 한 척과 먹을 것만 줘 봐. 그걸 발견 못 할 사람이 어디 있어?" "아무렴, 지나가는 개라도 할 수 있겠다." 그러자 콜럼버스가 달걀 몇 개를 들고 그들의 앞으로 나가 말했다. "누가 이 달걀을 탁자 위에 세로로 세울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어디 나와서 세워보십시오." 얼른 생각하기에 쉬워보였는지 몇몇 사람들이 세워보겠다고 여기저기서 몰려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달걀 세우기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 뾰족한 달걀 꽁무니가 탁자 위에 쉽게 세워질 리는 없었다. "아니, 이걸 어떻게 세우라는 거야, 나 원 참." 한 명 두 명, 불평을 하며 모두 자리를 뜨자 콜럼버스가 다시 달걀을 들고 탁자 앞에 섰다. 그리고는 약간 깨질 정도로 달걀을 탁자 위에 톡톡 치더니 곧바로 탁자 위에 세워놓았다. "자, 보십시오. 똑바로 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또 비웃음과 함께 불만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세우는 거라면 누구는 못해." "진작 달걀이 깨져도 된다고 말을 했어야지." 콜럼버스는 그렇게 투덜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한 마디 내뱉고 자리를 떴다. "아무리 쉬운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처음 그것을 시도하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법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일화를 여기서 다시 인용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달걀을 처음 깨뜨려 세운 사람은 참으로 지혜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오직 한 명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머지, 달걀을 깨뜨리지 않고 열심히 세워보려고 했던 사람들은 그대로 묻혀져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과연 달걀을 깨뜨리지 않으면 서지 않을까. 한 번 시도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달걀은 깨뜨리지 않고도 세울 수가 있다. 좀 흔들어 유리 탁자 위에 세우면 틀림없이 달걀은 선다. 다만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아예 시도해 본 일조차 없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모든 일에 불가능하다는 고정관념만 믿고 너무 쉽게 도전하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유학을 했다고 하면 흔히들 묻는 말이 있다. "거기에서는 천재 교육을 어떻게 시킵니까?" 천재 교육이 있느냐고 묻기 전에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묻는 말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1986년까지의 노벨상 수상자 기록을 보면, 300명의 수상자 가운데 유태인이 93명이나 올라 있으니 당연할 수도 있다. 세계 인구의 0.2-0.3퍼센트에 불과한 그들이 모든 분야에서 가장 권위가 인정되는 노벨상의 31퍼센트, 세계 지도자의 2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앞서 구구단을 가르치지 않는 그들의 산수 교육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우리가 보기에 답답할 정도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렇다고 단 한 사람의 달걀을 깨뜨려 세우는 사람을 위해 그들의 교육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아이들의 개성을 존중한다. 따라서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보다는 남과 다르게 되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그렇게 모든 교육을 창의력과 지혜를 가르치는 데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달걀을 깨뜨려 세울 수 있는 사람도 태어나고, 세계 상권을 주름잡는 상인도 만들어지고, 세계적 지도자도, 그리고 열심히 달걀을 깨뜨리지 않고 세우려 하듯,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도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선천적으로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내가 이스라엘에 유학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마침 그 당시 정책적으로 초등학교에 교육용 컴퓨터를 보급하고 실험 교육을 시켜, 경시 대회를 열었었다. 물론 각 학교에서 내로라하는 아이들이 참가한 대회였다. 그런데 거기에서 예상밖의 일이 벌어졌다. 전국에서 장원을 한 아이는 당시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중이던 한국 아이였던 것이다. 각 학교 관계자들이 술렁이는 것도 당연했다. 선민 의식이 강하고, 스스로 우수한 민족이라 자부하고 있는 그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작은 사건이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들이 장차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됨은 지혜를 가르치려는 그들의 교육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얼마 전에 이런 통계가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다. '한국, 경제는 세계 15위, 그러나 교육은 세계 160위(다양한 지표 중에서 한 학급당 학생수, 교사 일인당 학생 수 등).' 설마, 사실이 아니겠지. 그래도 두뇌하면 어느 나라에도 떨어지지 않는 민족인데. 기사를 처음 접하고 이렇게 반신반의한 사람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우리의 교육 정책과 환경에 분노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려서 두각을 나타내는 우리 민족이 왜 점차 자라면서 그 실력이 떨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주입식으로 일관하는 우리의 교육이 아이들이 커갈 수 있는 지혜의 싹을 잘라버리고 있는 것이다. "엄마, 한글은 누가 만든 거야?" "너, 학교에서 그것도 안 배웠니? 세종대왕이지, 누군 누구겠니?" "그럼, 세종대왕이 조선조 몇 대 임금이야?" "어휴, 답답해. 태정태세문단세... 넌 이런 것도 못 외우니?" "아, 4대 임금이구나." 이제 이런 대화는 그만둬야 한다. 아이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는 대답은 오히려 그만큼 아이들의 상상의 넓이와 사고력의 깊이를 빈곤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아이가 '왜 그럴까'를 자꾸 반복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스스로 그 답을 찾아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훌륭한 교육적 대화 방식인 것이다. '아이에게 고기 한 상자를 주면 며칠을 먹고 살게 할 수 있지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면 평생을 먹고 살 수 있게 한다.' 누구나 아는 이러한 유태인의 교훈은 자발적 사고의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하게 해준다. 우리가 이런 사고로 아이에게 가르칠 때만이 '교육, 세계 160위'라는 불명예는 사라질 것이다. 너, 정말 잘 했어, 네가 최고야 얼마 전, 텔레비전을 보면서 우리 부부는 이런 일이 다 있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의아해 할 사건에 접한 적이 있다. 아마도 그 프로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스승과 제자간의 법정 소속이었다. 엄격하게 말하면 스승과 학부모간의 바람직하지 못한 싸움이었다. 사건의 발간은 시험에서 비롯되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성적에 따라 아이들에게 체벌을 가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체벌에 문제가 있었다. 선생님은 여러가지 체벌 중에서 어쩌면 가장 간편한 매질을 선택했던 것이다. 아이들은 차례로 나와 성적에 따라 선생님으로부터 매질을 당했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매질을 당하는 순간, 허리를 틀었고 회초리는 그 아이의 허리뼈에 적중했다. 아이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쓰러졌다. 선생님은 서둘러 아이를 병원으로 후송했다. 선생님은 그 아이의 학부모에게 정중히 사과를 했고, 치료비도 부담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몇 날이 흘러갔다. 그러는 와중에서 사건은 엉뚱한 쪽으로 흘러갔다. 아이가 매질을 당해서 허리를 다친 것이 아니라, 이전에 이미 허리에 이상이 있었다는 거였다. 내심, 매질로 하여 제자를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과 주위의 눈총에 시달리던 선생님은 진실을 밝히고 싶었다. 같은 반 아이들 중에는 그 아이가 매질을 당하기 며칠 전, 철봉을 거꾸로 매달렸다가 그대로 떨어져 허리가 아프다고 했었다는 증언을 했다. 선생님은 그 아이들로부터 그러한 목격자 진술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좋지 않게 바라보던 그 아이의 부모에게 제시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그 아이의 부모는 책임을 회피하는 그 선생님이 괘씸했던 것이다. 그래서 곧바로 그 사건을 법정으로 끌고 갔다. 선생님이 업무상 과실을 했다는 이유였다. 결과는 아이들의 목격자 진술서를 첨부한 선생님의 승리로 끝났다. 교육의 목적상, 가벼운 체벌은 가능하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아이의 부모도 거기에 승복하지 않았다. 아이가 매질을 당하기 전에 한 번도 아프다고 하지 않았다며, 아이가 철봉에 매달린 적이 없었다는 또 다른 아이들의 목격자 진술서를 받아 제2심에 상고한 것이다. 거기에서는 또 다른 쟁점이 제기되었다. 아이를 매질했던 회초리가 문제였다. 당시 선생님은 위아래의 굵기가 다른 회초리를 사용했는데, 가는 부분을 손에 쥐고 굵은 부분으로 아이들에게 매질을 했다는 거였다. 여기에서 판결의 초점은 교육의 목적상 꼭 필요한 체벌을 가했느냐로 모아졌다. 결국 2심에서는 굵은 부분으로 때린 것은 지나친 체벌이라고 결정됐고, 1심과는 달리 선생님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3심에서도 판결은 선생님의 과잉 체벌로 판결이 났다.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의견 충돌을 빚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의 거짓 진술에 화를 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의 부모 편에 선 사람들은 어쨌든 체벌은 사라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을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의 입장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요즘 아이들을 걱정하면서 매질을 해서라고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잘잘못을 떠나 그 선생님이 교단을 떠나기를 원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선생님의 양식을 믿고 있다. 다행히 그 선생님은 지금도 교단에 서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의 가슴에는 아이의 학부모보다 거짓 진술을 한 아이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아니면 거짓 진술을 하도록 강요한 어른들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참된 교육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교육에서 진정 체벌은 필요한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반드시 체벌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이 야만적인 행동이며 아이를 학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설문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의 과반수 이상이 체벌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선진국이며, 문명국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나라는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까지 엄격하게 체벌을 금하고 있다. 그러나 체벌의 당위성 여부보다는 그 사회의 의식과 도덕성, 그리고 교육의 방법론이 더 문제일 것이다. 어려서부터 명령과 복종만을 강요하는 사회는 아이를 다스리는 유일한 방법으로 체벌을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대화와 자율로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결코 체벌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우리의 국민들 대다수가 체벌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명령과 강요로 길들여진 우리 사회의 단면을 증언하고 잇는 것인지도 모른다. 엄격한 유교 의식을 기본적 정서로 삼고 있는 우리의 전통적 가정과 사회, 그리고 현대 정치에서 비롯된 획일적이고도 강압적인 우리의 군사 문화가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잠재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람직한 교육 방법은 대화와 자율로 흘러가고 있다. 그것은 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러한 방법론의 하나로 이스라엘의 교육을 생각해왔고,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믿어왔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은 군사 문화가 지배하는 나라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수천 년을 외부의 적과 싸워 온 그들에게서 겉으로 반견할 수 있는 것은 수도 없이 총을 들고 길거리에 늘어선 젊은이들과 항상 어디서나 팽배해 있는 긴장감을 언제 어디서고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내부에 조금만 들어가면 그러한 환상은 금세 깨지고 만다. 그들에게서 명령과 강압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한 것은 아이에게도 금물이다. 그들은 서로간에 이견이 맞지 않을 때, 수도 없이 대화를 한다. 그리고 그 논쟁에서 패배한 사람은 깨끗하게 승복한다. 그러한 것은 아이들의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건, 네가 틀렸어. 내 말이 옳단 말이야." "아니야, 네가 틀렸어." "아니라니까. 조그만 녀석이 고집이야." 그리고는 퍽, 하고 주먹이 먼저 올라가는 우리의 문화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러한 것도 알고 보면 어른들의 문화, 곧 그 사회의 문화가 그대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그렇게까지 되기에는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너, 빨리 가서 손 씻고 와." "왜, 엄마?" "왜는 무슨 왜야, 엄마가 씻으라면 씻는 거지. 빨리 가서 씻고 와!" 이러한 방법으로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는 강압적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이외에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는 부모의 행동과 언어를 모방하면서 자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은 아무리 사소한 일도, 아이들과 나누는 대화에서는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우리가 볼 때에는, 그렇게 신경쓰면서 어떻게 살아, 할 정도로 세심하다. 그들이 그만큼 그런 방법에 습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너, 손 씻고 밥 먹어야지?" "왜, 엄마?" "너, 밖에서 흙도 만지고 그랬지?" "예." "그 흙 속에는 작은 벌레들이 많아요. 그 흙을 만지고 놀았으니까, 네 손에도 벌레가 묻어 있겠지? 그러니까 손을 안 씻고 밥을 먹으면 어떻게 되겠니. 벌레가 몸 속으로 들어가요. 그래서는 벌레들이 네 밥도 뺏어먹고 부족하면 네 몸까지 파먹는 거예요. 너, 가끔 배 아플 때 있지? 그것도 다 벌레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어서 가서 손 씻고 와요." "알았어요, 엄마." 그러한 교육은 가정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학교 수업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그런 문화에 익숙해 진다. 아이가 무엇을 잘못했을 때에도 그들은 아무런 이유없이 강요하지 않는다. "너, 엄마가 그런 짓은 하지 말라고 그랬지. 그런데 왜 또 그런 짓을 한 거니? 엄마가 화단의 꽃을 꺾으면 어떻게 된다고 그랬어." "꽃이 아파한다고 그러셨어요. 그리고 아파서 결국 죽게 된다고...." "그럼, 또 한 번 그러면 너는 어떤 벌을 받겠니? 자, 엄마하고 약속해." "...으음, 매일 화단에 물을 주겠어요." 이렇게 서로 대화를 통산 약속으로 아이는 약속에 대한 신의와 책임감까지도 함께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화 방법으로도 도저히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답답해 하는 부모가 많다. 그리하여 때때로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아이의 교육에는 지름길이 없는 법이다. 빨리 가르치기 위해 매질을 하는 것은 당장의 보이는 현실만을 바라보는 무책임한 짓이다. 무엇보다도 아이를 믿고 끝없이 참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가 잘못하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잘못한 것은 그 즉시 지적해 주어야 아이가 인지할 수 잇다. 거기에도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한 아이가 주걱을 가지고 공을 튀기고 있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아이를 나무랐다. "너는 주걱이 장난감인 줄 아니? 당장 이리 가져 오지 못해." 그러면서 어머니는 주걱을 빼앗아 들고 아이에게 꿀밤을 먹였다. 언뜻 보기에 별이상이 없는 듯 보인다. 그러는 어린 아이는 어머니가 왜 그러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주걱이 꼭 밥을 풀 때만 사용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뚜렷한 설명없이 부정적으로만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는 매사에 소극적으로 되기 쉽고 피해 의식을 갖기 쉽다. 그보다는 아이에게 탁구 라켓이나 배드민턴 라켓을 쥐어주면서, "공은 이걸로 치는 거란다. 그래야 공도 잘 튀겨지고, 그리고 주걱은 밥을 풀 때 사용하는 거예요." 하고 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아이는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갖게 된다. 아이에게 무엇을 명령할 때에는 반드시 왜 해야 하는가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반항하기 쉽다. 아이에게는 부정적인 교육보다는 긍정적인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중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를 보면 아이들이 얼마나 절실히 그것을 바라는지 알 수 있다. 선생님으로부터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다수의 아이들은, '그래, 그러니까 공부를 못 하지. 공부는 할 사람이 해야지. 넌 그 정도밖에 안 되니까, 다음에도 보나마나겠지?'와 같은 부정적인 말을 꼽았던 것이다. 이러한 언어들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매우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면, 아이가 오기를 가지고 더욱 열심히 하리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의 결과로 나타난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자신감을 잃고 좌절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그 말을 한 사람에 대한 분노를, 반항적인 말대답이나 가출, 등교 거부 등의 행동으로 직접 표출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긍정적이거나 칭찬을 하는 경우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너, 정말 잘했어, 네가 최고야." 이러한 말을 빈번하게 사용하면 아이들은 그 말의 의미를 한번쯤은 의심하게 되고 결국에는 무감각하게 느끼고 만다. 칭찬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만큼 아이들의 교육은 힘들다. 그러므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에는 정도가 있을 수 없다. 아이들을 매질로 다스리거나, 엄한 체벌로 다스려도 결국 그 사회 구성원들의 약속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체벌을 엄격히 금하는 미국에서는 청소년 문제가 아주 심각한데도 이스라엘에서는 그런 문제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만 보아도, 그러한 사회의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물론 그러한 것도 아이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 뒤에는 반드시 부모가 있다 요즘, 주유소에 가보면 어디를 막론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다. 울긋불긋 칠을 해놓고 색색의 꽃들과 풍선들로 장식한 모습을 보면, 마치 어느 특별 행사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밤이 되면 그야말로 불야성이 된다. 거기에 젊은 음악과 통통 튀는 치어걸까지 동원된다. 아마도 주유소 설치의 거리 제한 완화에 따라 주유소간의 거리가 좁혀져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찾아간 사람으로서는 기분이 좋다. 들어서자마자, 줄을 이어 인사를 하는 종업원들의 싱그러운 친절이 좋고 나올 때에는 선물까지 주는데, 어찌 기분이 안 좋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기분이 좋으면 한편으로는 늘상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종업원들이었다. 모두가 같은 제복을 입고 롤러 스케이트를 타며 음악에 맞춰 춤도 추고, 인사도 잘하는 그 종업원들은 한창 공부할 나이인 10대 전후반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아르바이트하는 학생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들이 일하는 시간대나 일하는 기간이 아르바이트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직업 청소년일텐데... 그럼에도 다들 그렇게 신이 나서 일을 하는 것이 내심으로는 흐뭇했다. 왜냐하면 그 어려움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일하는 것이 내 어려웠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는 또 한편으로, 내 학창 시절에도 저런 일자리가 있었으면 얼마나 신이 났을까, 그랬으면 그 힘든 구두닦이나 신문팔이 같은 것은 안해도 됐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단순한 생각은 어느 방송국의 청소년 대담프로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 끝이 났다. "먼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박사님께서는 이스라엘에서 오랫동안 생활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쪽 청소년들은 어떻습니까?" "한 마디로, 우리 아이들하고 같다고 봐야겠지요.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 아이들도 그렇긴 하지만, 그쪽 아이들에겐 국가관이나 민족관, 이런게 좀더 투철하다는 생각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그 나라는 항상 전시와 같은 상황이니까, 청소년들이 모두 총을 들고 다니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모두가 군에 입대를 하니까. 생각해 보세요. 백주 대낮에 그것도 빈 총이 아닌 실제로 총알이 장전된 총을 들고 서울 거리를 그렇게 누비고 다닌다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아마도 온 시민이 불안에 떨거 아니겠어요? 그런데도 이스라엘에서는 지금까지 총기 사고가 단 한 건도 없었답니다." "예, 그렇군요. 그럼 얘기를 한 번 시작해 볼까요? 먼저 박사님, 비행 청소년, 불량 청소년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단순하게 답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도리에서 벗어나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행동을 하는 청소년이라고 봅시다. 어떤 부모들은 가출한 청소년을 다 그렇게 보기도 하는 모양입니다만, 제 입장에서는 그건 무리인 것 같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 나이 또래에는 기존의 모든 것에 호기심이나 반항심을 가질 때이고, 그것이 적극적인 형태로 나타날 때, 가출까지도 감행하는 것인데. 물론 모두가 호기심이나 반항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겠습니다만." "저에게 통계가 하나 있는데, 이걸 보면, 가출하게 된 동기로 가정 환경과 나쁜 친구를 나란히 1,2위로 들고 있는데, 그렇다면 박사님께서는 그들이 왜 나쁜 길로 접어든다고 보십니까?" "저라고 해서 다른 의견이 있을 수는 없겠지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문제 있는 아이 뒤에는 반드시 문제 있는 부모가 있다는 겁니다. 사실 그렇게 가출도 하고 혼자 지내는 아이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들에게서 남다른 장점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독립심도 강하고, 활달하고, 오히려 더 밝은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 아이들이 집을 나오고 나쁜 짓까지 하겠습니까! 이 모두가 교육 철학의 부재에서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가정은 부부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 보십시오. 그리고 아이들 입장에 서서 아이들과 대화하려는 자세만 갖더라도 훨씬 나아질 겁니다. 그럴 시간에 아이들 앞에서 부부 싸움이나 하고 있으니...." "예, 가정 교육 철학의 부재, 그것이 문제였군요. 그렇다면 또 다른 쪽으로도 생각할 수 있을 텐데요...." "자꾸, 이스라엘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안 됐습니다만, 이스라엘의 교육은 우리처럼 점수나 등위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제가 몇 차례 말씀드렸듯이 오죽하면 성적표에 점수 표기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유치원 때부터 성적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누구나 일등만 원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디 일등하기가 쉽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노력하는 것보다 상대방이 못 하게 되길 바라는 시기심이 생기게 되는 거지요. 그런 아이를 집에서 구박 한 번 해보세요. 누구라도 집을 떠나고 싶을 겁니다." "예, 모든 원인이 가정이나 학교, 교육의 문제로 귀결되는데, 박사님, 그럼 잠시 한 학생의 말을 들어보고 계속 진행을 하지요. ...어려운 걸음이었을 텐데, 이렇게 나와주셔서 고맙군요. 지금은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까?" "예." "왜, 집을 나가게 됐어요?" "집에 있으면 답답하니까요, 매일 공부만 하라고 그러잖아요. 다른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그러면 가출은 몇 번이나 했어요?" "한 서너 번 돼요." "왜 그렇게 자주 가출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한번 나갔다 들어오면, 집에서나 밖에서도 어울릴 수가 없었어요. 나만 소외되는 것 같고... 걔들하고 어울리면 편안한 데, 그래서 자꾸 나가게 돼요." "한번 나가면 대개 얼마나 밖에서 생활하게 돼요?" "짧으면 한 일 주일 정도도 있고 길면 몇 달도 있어요." "밖에 있으면 당장 먹을 것도 있어야 하고 잘 곳도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건 다 어떻게 해결하나요? 혹시 가출할 때 돈도 가지고 나가나요?" "...돈을 슬쩍해 가지고 갈 때도 있긴 있지만 돈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처음에는 공원 같은 데서 자고 그러다가 애들을 사귀게 되면 방을 얻어 같이 합숙도 하게 되는데, ... 어떤 아이들은 동거까지 하고 그래요. 그러다가 돈이 떨어지면,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야 돼잖아요." "그럴 때는 어떻게 했어요?" "그럴 때는... 그럴 때는, 어떤 아이는 다른 애들 있잖아요, 학교 잘 다니는 애들, 걔들 걸 빼앗기도 하고, 술 취한 사람 지나가면 부축해 주는 척하다가 슬쩍하기도 하는데, 저는 주로 술집에 많이 나갔어요." "미성년자일 텐데, 술집에서 받아줘요?" "예, 술집에서는 오히려 사람이 없다고 친구까지 데려오라고도 그래요." "그럼, 술집에서는 무얼 했어요?" "안에서 서빙하면 돈이 잘 안 벌리고 힘만 드니까, 밖에서 삐끼를 했어요. 왜 있잖아요. 밤 12시 넘어서 술 취한 사람이 술집 찾을 때, 술집까지 데려다 주고 돈 받는 거 말예요." "그렇게 하면 하루에 얼마나 버는데요?" "하루에 오만 원도 벌고, 잘될 때는 십만 원도 벌어요." "또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버는 사람도 있겠지요?" "예, 공장이나 막노동판에 나가는 아이들도 있긴 한데, 요즘에는 다들 힘들다고 잘 안 할려고 그래요. 그런 애들은 주유소나 편의점 같은 데서 일해요." "앞으로 또 기회가 되면 가출을 할 거 같아요?" "...모르겠어요." "솔직하게 답해 주었는데, 나와주어서 고맙습니다. ...박사님, 지금 가출을 자주 하다가 이제는 집으로 아주 돌아온 한 학생의 솔직한 심정을 들어보셨는데 지금 소감이 어떠세요?" "한 마디로 착잡한 심정입니다." "아까 교육이 문제다, 그렇게까지 귀결을 지으셨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뀌어야지요. 가정도 바뀌고, 학교 교육도 바뀌고, 사회 시각도 바뀌어야 합니다. 경쟁심만 유발시키는 교육 풍토에서 진짜 인간을 교육하는 전인 교육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문제아는 다른 나라에 비해 사실상, 우리가 더 많은 것도 아닙니다. 얼마든지 가능성은 있다는 얘기지요." "이제, 초점을 조금 바꿔서 우리의 교화 시설에 대해서 말씀 좀 나누어 볼까요? 제가 알기로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그 시설이 질이나 양적으로 무척 뒤떨어져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보다 먼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특수 학교에 관한 문제인데, 뭐냐하면 이런 겁니다. 아인슈타인처럼 수학이나 물리, 이런 건 아주 뛰어난데 역사라든가 사회 과목은 흥미도 없고 성적도 형편없는 사람이라든가, 공부는 아주 잘하는데 몸이 워낙 허약해 제 시간에 정상적인 학교 수업을 받을 수 없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위한 학교를 만드는 겁니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이런 학교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정상적인 학교에 흥미를 못 느끼는 아이들을 위해 학교 체제를 이원화하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이런 시설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요. 이 방법은 이스라엘에서 채택하고 있는 방법인 데, 그러니까 경제적인 이유라든가, 결손 가정이어서 아이를 제대로 교육시킬 수 없는 환경에 있다거나, 아니면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아이를 두고 이민을 간 사람들의 아이를 위한 학교를 만드는 겁니다. 물론 그 학교는 모든 숙식 시설이 학교 내에 설치되어 있고, 그들을 돌볼 보모들이 함께 기거해야겠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대가족 제도안에 학교를 하나 만들어 넣는 식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교화 시설을 말씀하셨는데, 일단 그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봐야겠습니다. 하나는 구타나 환경적 영향으로 집을 나온 사람을 임시 수용할 수 있는 보호 시설이고, 다른 하나는 죄를 지어 격리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위한 교화 시설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 예를 들면, 그렇게 큰 문제도 없는데 집이나 학교로부터 소외당한 아이들을 위한 직업 훈련원이나, 재활원 같은 것을 들 수 있겠지요. 이러한 모든 시설들은 정책적인 지원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의존하고 있는 부분이 많지만, 종교 단체 같은 데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수용을 해준다면 훨씬 나아질 수 있겠지만요. 그것을 전제로 한다해도 교화 시설만큼은 국가가 더욱 나서야겠지요. 죄질의 좋고 나쁨이나 교화 가능성 정도를 파악하여 수용해야 할 일을 시설의 부족으로 지금은 마구잡이로 수용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오히려 교화를 하는 것이 아닌, 구제 불능인 사람을 만들어내는 시설이 될 수도 있는 거지요. 아무튼, 어떠한 시설일지라도 거기에 수용되어 있는 사람의 인격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시간에 걸쳐 좋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끝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 한 마디만 해주시죠." "모든 교육의 기본은 가정에서 비롯됩니다...." 방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 주유소의 아이들은 언제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3. 권위주의는 몰라도 권위는 살려줘야 이러다가 또 나라 빼앗기고 말지 어느 날, 딸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한 통의 통지가 날아왔다. 내일 밤 10시에 개인 면담이 있으니 학교로 나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오전 10시도 아니고 밤 10시라니, 이건 도대체 도깨비 장난도 아니고... 통지를 읽고 난 아내와 난 한동안 어리둥절해 빤히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아내가 동생과 카드 놀이를 하고 있던 딸아이를 불러 조용히 물었다. "너,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니?" "...." "응?" "...아뇨,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럼, 왜 선생님이 보시자는 거니. 그것도 밤 10시에 말야. 이상하다, 그치?" 다음 날, 대학 동료들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볼까도 생각해보았지만 괜히 아무 일도 아닌 걸 가지도 딸아이만 문제아 취급하는 것 같아 끝내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조급한 마음에 일찌감치 저녁 식사를 끝내고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학교로 향했다. 아내는 앞만 바라보고 말이 없었다. "여보, 한국에 가고 싶지?" "...." "한번 다녀올까?" 말은 안 하지만 아내가 이스라엘에 온 지도 벌써 3년이 되었다. 그러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꽤나 쌓여 있을 터였다. 학교에 도착하니 30분 정도 이른 시간이었다. 조급한 마음에 30분 차이야 어쩌랴 하고 곧바로 상담장인 학급 교실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거기에는 우리 이외에도 다른 학부모들이 더 모여 있는 게 아닌가.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학부모 모임을 통해 낯익은 학부모도 눈에 띄어 살며시 그의 곁으로 가서 눈인사를 하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런 시간에 면담이 있다니... 학교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한편으로는 딸아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도 내친 김에 계속 물었다. "아, 참. 이런 일 처음이시겠군요. 그러니까 딸아이가 맏이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여기서는 1년에 한두 번은 반드시 학부모 개인 면담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다들 시간을 맞추다 보니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면담을 하지요. 그러니 저 선생님들은 얼마나 고생이 많겠어요? 한 달에 한 번은 또 학부모 모임을 가져야 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참 친절하다. 그리고 간섭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니 묻지도 않은 선생님 얘기까지 들먹이는 건 당연하다. 말이 언제 끝날 지 몰라 살그머니 그의 곁을 피해 교실 출입구까지 다가갔다. 도대체 무슨 면담을 하는 것일까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성적 문제일까. 아니면 가정 문제를 물어볼까. 옛날 한국에서 선생님이 묻던 질문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무얼 하시지?' '납부금은 언제까지 낼 거니?' '너, 안 되겠구나. 당장 내일 부모님 모시고 와.' 면담 시간만 되면 나는 참으로 고통스러웠었다. 끼니조차 때우기 힘든 가정 형편이었던 나로서는 항상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었다. "...예, 아이가 정서적으로는 무척 안정돼 있는데 좀 지나치게 내성적인 것 같습니다. 집에서도 그렇습니까?" "예, 저희도 그게 걱정입니다. 동생하고도 잘 놀아주지 않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거든요." "문제가 좀 있군요. 잘못하면 자폐증에 걸릴 수도 있겠습니다." "선생님,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그럼, 이런 방법을 한 번 써 보세요. 혜지라는 아이 아시지요? 그 아이는 지나칠 정도로 활달해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서로가 어울리게 되면 두 아이 다 성격이 좋아질 거예요." "예, 하지만 어울릴 수 있게 하는 방법이...." "아, 그거라면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서로 가족 방문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럼 아이들도 자연스레 가까워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하고, 생각했던 면담 내용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무슨 성적이나 가정 문제보다는 거의가 아이들의 인성에 관한 문제가 주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선생님은 그런 면접 내용을 토대로 발표력이 부족한 아이에게는 더 많은 질문을 해 대화를 유도하고, 붙임성이 없는 아이에게는 학습 활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등, 우리의 단순한 면접과는 달리, 그것을 교육의 자료로 철저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 면담 시간이 돌아왔다. 괜히 내가 더 걱정이 되었다. 마치 옛날의 면접 시간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한 답답증은 선생님을 마주하는 순간, 일시에 사라졌다. 선생님은 우리가 먼 동쪽 나라에서 온 이방인임을 가장 걱정하면서, 아이가 학교에서는 적응을 잘 하고 있는데 집에서는 어떤가를 물었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행여나 마음을 졸이던 아내가 얼른 말을 받았다. "예, 집에서도 나무랄 데 없이 잘하고 있어요.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고...." 면담은 생각보다 훨씬 간단하게 끝났다. 딸아이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내심 걱정하던 아내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한 순간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이스라엘에 살면서 우리 부부에게는 매달 한 번씩 뜻하지 않은 데이트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교육 정책이 초중등 학교에서는 반드시 한 달에 한 번은 학부모 모임을 갖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거의가 맞벌이 부부인 학부모 입장을 고려하여 저녁 8시 이후에 열리기 때문에 부담없이 부부가 함께 데이트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부모 모임이 있는 날이면 학생수의 배가 되는 학부모들이 함께 모인다. 담임 선생님은 이번 주에는 무엇을 가르치니 부모님들께서는 이런 점에 협조해 주십사 하고 당부도 하고 행사 예고도 함께 해준다. 따라서 아이가 지금 무엇을 배우고 있고, 또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는 집에 앉아서도 훤히 알 수가 있다. 하루는 아이들을 데리고 슈퍼마켓에 들렀다. 물론 물건을 살 목적도 있었지만 온 가족이 함께 간 이유는 학부모 모임에서 담임 선생님이 다음 주에는 분수를 가르친다고 했기 때문이다. "애야, 우리 식구가 모두 몇 명이지?" "엄마, 아빠, 동생 그리고 나, 네 명이에요." "그래, 그럼 지금 엄마가 사과를 사려고 하는데 한 개씩 먹으려면 몇 개를 사야 하지?" "네 개요." "두 개씩 먹으려면?" 아이는 이번에는 쉽게 답이 안 나오는지 열심히 손가락을 헤아리다 대답한다. "으음, 여덟 개요." "아주 잘하는데, 그런, 사과 하나를 사서 너랑 동생이랑 나눠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반으로 나누면 돼요." "하나를 가지고 우리 식구가 다 먹으려면?" "으음, 동생한테 준 반을 잘라서 아빠 드리고, 내 것을 또 반으로 잘라 엄마 드리면 돼요." "그런, 사과 하나가 몇 개로 나눠진 거지?" "네 개요." "그래, 그 네 쪽 가운데 하나를 4분의 1이라고 하는 거야. 네 개로 나눠진 가운데 한 쪽이라는 뜻이지." 이쯤 되면 간단하게, 일일이 수로 계산하지 않고도 곱셈과 분수의 개념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학부모 모임에서 선생님이 알려준 방법이지만 다른 대개의 경우도 일상 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로 아이들을 교육시키게 한다. 또한, 학부모 모임에서는 학부모를 위한 강좌를 열기도 하는데 한 번은 아동 심리학을 전공한 교수가 강사로 나와 '색상이 아동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놀라운 것은 그 강연을 위해 학교에서는 그 교수의 자문을 얻어 학교 전체를 새로 색칠했다는 사실이다. 한번 우리나라의 학교 건물을 생각해 보라. 모두가 한결같이 우중충한 회색 빛깔로 칠해져 있지 않은가. "...그러니 한 가지 색깔만 고집하지 마십시오. 아이들의 성격에 따라 한 번쯤 색깔을 바꿔보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예를 들면, 우울하고 내성적인 성격에는 노란색 계통으로 칠해주는 겁니다. 그 반대의 성격에는 차분한 색깔을 주로 꾸며주는 것이 좋겠지요...." 실제로 이 강연을 듣고 그렇게 집과 아이들 방의 색깔을 바꾼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그만큼 아이들을 윽박지르기 이전에 아이들이 마음껏 꿈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모임에 나가거나 한창 분위기가 익어가면 우리는 항상 사회 문제를 화제로 열을 올리곤 한다. 그러나 결론은 항상 교육의 부재로 끝난다. 거기에다 술이라도 한 잔 걸치다 보면 모두가 애국자인 양, 나라의 운명을 한탄하곤 한다. "말로만 전인 교육이다 어쩐다 떠들어 대지, 어디 정치꾼이나 선생이나 제대로 하는 놈 봤어?" "아무렴, 요즘 아이들 하는 짓 좀 봐. 모두가 한결같이 문제아뿐이라니까." "이러다가는 또 나라 빼앗기고 말지...." 생각해 보면 나도 교육자로서 양심에 꺼리는 바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별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쯤되면 슬그머니 그 자리를 뜨곤 한다. 그리고는 혼자 중얼거린다. '교육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야. 누구는 학교가 문제다, 누구는 가정이 문제다, 누구는 또 교육 풍토가 문제다 하지만 결국 문제는 모두가 문제인 거야. 학교, 가정, 사회가 다 문제인 거지. 그것은 결국 내가 문제인 거야. 내가 먼저 잘하면 뭔가 손해를 본다는 생각들 때문에 모두가 하지 않는 것이 잘못된 거지.' 그러면서도 항상 뭔가에 얽매이지 않고, 주눅 들지도 않고, 항상 활기차고 밝게 생활하는 이스라엘 아이들을 생각해 본다. 교육은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들 한다. 어쩌면 찌들리게 가난하고 무지했던 우리 어린 시절의 교육이 그래서 더 참된 교육이었는지도 모른다. 엄격한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가정의 위계 질서 속에서도, 틈만 나면 들로 산으로 나가 고기도 잡고, 종달새와 함께 노래도 부르고, 머루랑 다래랑 따먹다 보면 뻐꾹새는 힘차게도 울어댔다. 그렇게 동화와 같은 추억은 쌓여갔던 것이다. 이러한 추억들은 힘이 들고 각박한 세상살이 속에서도 결코 빛이 바래지 않는다. 오히려 상황이 열악할수록 그 추억들은 우리의 정서를 더욱 순화시켜 주고, 참된 공기를 갖게 했다. 이 얼마나 참된 교육인가. 댁이 뭔데 그래요 언제부턴가 나에게는 아침마다 새로운 고민이 하나 생겼다. 오늘은 차를 몰고 나갈까, 아니면 지하철을 타고 갈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배부른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핀잔을 할지 모르지만 서울의 교통난을 생각하면 보통 끔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어디 특별히 돌아다닌 일이 없으면 되도록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내심 마음먹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힘이 없는 사람은 밀려나가기 일쑤요, 어찌어찌 해서 탔다 해도 마땅히 잡을 손잡이도 없으니,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자신이 나룻배와 같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곤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은 이것이 인생이려니 하며 인생철학이 별거더냐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날에는 처량한 마음까지 드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이렇게 지하철을 이용하다보니 참, 못볼 것도 많이 볼 수밖에. 남의 살을 자기 살처럼 만지는 치한들이나 남의 호주머니 속에 쑥쑥 손을 집어넣는 치기배들은 접어두더라도, 피곤도 하겠지만, 그래서 잠들을 청하겠지만 노인이 자기 앞에 서서 시선이 맞추어졌다고 생각되는 순간, 잠들어 버리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이 세상이 걱정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그들은 대체로 30대 미만의 젊은층이 주를 이룬다. 그것도 책이라도 들었음직한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젊은이들이 더 자주 눈에 뜨인다. 그럴 때마다 오히려 내가 더 얼굴이 달아오른다. 아마도 교육자로서 작은 양심의 발로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고개를 돌리거나, 잠을 자는 척하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일 테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노인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하필이면 왜 자기 앞에 서서 사람 민망하게 하냐는 듯, 노려보는 젊은이도 있다. 가뭄에 콩나듯 가끔씩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30대 이상이다. 노인들의 입장을 살펴보면 거기에도 참, 여러가지 표정이 엿보인다. 처음부터 아예, 자리 같은 것은 포기했다는 듯, 그 혼잡한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 양보할 만한 젊은이 앞에 서서 눈치를 보는 노인도 있고, 안면 몰수하고 아무데다 쑤시고 앉아 버리는 노인도 있다. 그런가 하면, 적극적으로 권리 주장을 하는 노인들도 볼 수가 있다. 한 번은 이런 노인과 한 젊은이가 맞부닥친 경우도 있었다. "여보게, 웬만하면 자리 좀 양보하지 그러나?" 정말, 나도 웬만하면 양보할 줄 알았다. 그러나 웬만하지 않은지, 그 젊은이의 입에서는 가히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노약자 지정석은 괜히 만들어 놓았습니까. 불편하시면 그리 가시면 될 거 아니예요. 나 원 참." 아주 손쉽게 결판이 난 것이었다. 그런 녀석 건드려 보았자, 나만 망신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노인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젊은이만 노려 보았다. 결국 그 사건은 옆사람이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노약자 지정석, 예전에는 경로석이라고 했다가는, '경우에 따라서는 노인도 앉을 수 있는 자리'라는 비웃음만 실컷 사고, 졸지에 이름만 바뀐 찬밥 덩어리. 동방예의지국에서 언제부터 그런 말이 나돌았는지 모르겠다. 그 노약자 지정석에서 벌어진 일도 있었다. 학생처럼 보이는 한 아가씨가 그 노약자 지정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마침, 그때 한 노인이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인지, 그 학생 앞에 섰다. 그러나 차마 말이 안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그 학생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학생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물끄러미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 후 노인이 화가 나는지 눈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야, 이년아, 너는 어른도 눈에 안 보이냐? 어디 앞에서 감히 다리를 꼬고 앉아. 당장 내리지 못해!" 내 귀를 의심도 했지만 분명 정장까지 한 그 노인의 입에서는 욕설부터 튀어나오고 있었다. 평화롭던 차 안에 갑자기 긴장감이 감돌고, 모든 시선이 일제히 그 학생에게로 향했다. 그 학생은 너무 황당했는지, 다리를 내릴 생각도 안 하고 눈만 똥그래져서 노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자, 노인이 또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이년이... 어서 못 내려! 너 어느 학교 다니냐. 그러면서도 네년이 학생이냐. 못된 년 같으니라구." 갈수록 노인의 입은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 학생도 결코 지지 않았다. 눈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아니, 댁이 뭔데 이래요, 그럴 기운 있으면 댁의 딸한테나 그러세요. 어디다 마구 욕설이에요, 욕설이... 누가 늙으라고 그랬어요. 괜히 나이만 먹어가지고는...." "뭐라구. 그래도 이년이 입은 있다구,... 어디다 함부로 나불대는 거야, 엉." 점점 상황은 거칠어져 갔다. 욕설로도 모자랐는지, 그 노인은 폭력까지 행세할 태세였다. 그 순간 주위에서 보고만 있던 사람들이 노인을 만류했다. 그리고는 그 학생을 달래어 차에서 내리도록 했다. 그 학생은 분에 차 눈물까지 보이며 마지못해 차에서 내렸다. 그 후에도 노인의 욕설은 한참동안 지속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그렇지 설마 하며 이 상황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지어내거나 과장한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이러한 상황이 거짓이었으면 싶다. 어른이 어른되기를 포기한 사회, 아랫사람이 아랫사람 되기를 거부하는 사회, 그러나 분명히 이 상황은 내 눈앞에서 벌어진 틀림없는 현실이다. 그러한 상황들 앞에서 난 세상을 한탄하기 이전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라만 보고 있던 내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그렇다고 지금이라도 이런 사건이 다시 일어난다면, 과연 내가 참견을 할 용기가 있는지 자신이 없다. 용기, 그렇다. 어른이 아이들을 꾸짖을 때에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 된 것이다. 언제였던가. 차내에서 소란을 피우는 청소년들을 꾸짖던 사람이 그 청소년들에게 수없이 구타를 당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이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말리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부도덕함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그런 사건은 비일비재로 일어나는 일이라서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제자가 스승을 폭행하고, 길거리에서 담배를 물고 다니는 중학생을 야단치던 노인이 봉변을 당하고, 심지어는 대학 교수가 아버지를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러니 웬만한 용기가 없는 사람은 끼여들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끼어들어 구타를 당한 사람을 용기가 아닌 만용을 부렸다고 욕하는 세상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본디, 우리 사회는 대가족 사회요, 공동체 사회였다. 바쁜 농사철이 되면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품앗이를 했고, 동네 어느 집에 경조사가 있으면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내 일처럼 일손을 거들었다. 한 마을의 어르신은 곧 우리 집안의 어르신이었고, 나의 어르신이었다. 그 어르신이 길을 갈 때면, 아랫사람들은 반드시 고개를 숙이고 길을 비켜 주었다. 어르신의 말이라면 말대꾸는 커녕, 입 한 번 벙긋 못하고 그대로 따라야 했다. 어르신도 불량하게 노는 아이들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마치 자기 아이처럼 꾸짖고 타일렀던 것이다. 이러한 얘기들이 먼 남의 나라, 옛날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불과 몇 십 년 전의 우리 얘기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진정 나라에 어른이 없어서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도덕성의 결여, 교육의 부재를 그 이유로 내세우기도 한다. 그리고 배금사상, 황금 만능주의에 그 원인을 돌리는 사람도 있다. 모두가 맞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 하나 제대로 된 대안은 아니다. 공동체 사회의 관습이 아직 남아서일까. 경제 수준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두 배 수준에 이르는 이스라엘은 여전히 어른들을 공경하는 모습이 역력하게 눈에 뜨인다. 노인이 버스를 타면 반드시 자리를 양보한다. 눈치라도 보고 앉아 있으면 워낙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온갖 꾸지람과 눈총을 다 받아야 한다. 부모에 대한 예의도 극진하다. 물론 그 나라에는 노약자 지정석도, 경로석도 없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사회에는 협동 농장인 키부츠라든가, 이민온 사람들의 집단 농촌인 모샤브가 있다. 그들에게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깨지지 않고 있는 공동체 집단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집단 생활 속에서 어른들에 대한 예우는 각별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어른에 대한 공경이라든가, 도덕성이 여기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주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좀더 그들의 생활을 짚어보면 그러한 것들이 그들의 종교와 교육에 더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것도 대부분 가정에서 싹터, 온 사회에서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웃어른을 공경하는 토대는 아무래도 그들의 '십계명'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십계명의 처음 네 계율은 물론 절대적인 하나님에 대해 인간이 지켜야 할 율법으로 되어 있다. 바로 그 다음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규정으로 다섯번째에서 열 번째 계율까지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앞서 언급되는 것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인 것이다. 철저하게 율법에 따라 행동하는 유태인들에게 이것이 미친 영향은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통한 교육을 받는다. 일상 생활의 자연스러운 대화 속에도 많은 부분이 종교적인 예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라든가, 왜 신이 모세에게 계시를 내렸는가 등의 예화를 들려줌으로써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도덕성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교육이 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온몸을 통해 대화로 가르친다. 부모가 먼저 솔선 수범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한 부모를 바라보는 아이들은 자연히 부모를 신뢰하게 되고 존경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굳이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 부모는 아이로부터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나에게서 받은 게 있다면, 그것을 나에게 돌려줄 생각을 하지 말고, 네 후손에게 물려줘라." 그러나 아이들은 부모에게 효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번은 내가 이스라엘의 한 아이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너는 왜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거니?" "예, 저는 저를 위해서 효도를 합니다." 우리 같으면, 그야 몰론 부모님을 위해서지요 해야 마땅한 것이다. 이러한 대답에 어떤 잘못이나 이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위해서 효도를 한다니,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나를 위해서 효도를 한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효도하면 큰 축복을 받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잖아요. 그리고 사람과 사람들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효도라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제대로 공경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공경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그들은 우리가 볼 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현실적인 면을 강하게 나타내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상상력을 키워주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이지만, 행여라도 그릇된 생각을 할 수 있는 관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현실적이면서도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막연히 기대하는 대가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바탕에서 오히려 더 참된 효가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교육의 교자는 효도할 교자로 시작된다. 아마도 효도가 모든 교육의 근본이 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러한 효는 도덕 과목의 암기 사항으로만 존재할 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우리의 부모들은 오늘도 그나마 남아 있는 효의 개념마저 바꾸어 놓기 위해 여념이 없을 것이다. "다른 생각할 것 없다. 공부 잘하는 것이 바로 효도하는 거야." 그렇게 가정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버림받은 효가 밖에서 대우받을 리는 더더구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면서도 남의 자식을 손가락질하며 비웃는다. 그 비웃음이 바로 나에게 돌아오리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아이들은 지금도 눈을 번득이며 아버지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대하는 자세를 직시하고 있다. 그들은 그러면서 자기가 아버지에게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다행히 아무 일도 없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인파 속으로 발길을 옮기며 나는 생각한다. 지하철 속에서 억지로 졸고 있는 사람들을, 스승을 마주쳐도 못 본 체 하는 내 제자들을. 그리고 결심한다. 오늘만큼은 용기 있는 사람이 되리라고. 아빠, 나 학교 갖고 가 이스라엘에서 생 홀아비 생활을 한 지 9개월쯤 되자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자다가도 퍼뜩퍼뜩 들기 시작했다. 타국에서의 외로움도 외로움이었지만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랄 아이들이 걱정이었다. 생각 끝에 아내와 아이들을 불러들이기로 결정했다. 서울로 전화를 하고 이런 저런 수속을 끝내자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한 달쯤 지나자 온몸에 이국에 대한 설레임을 담고 아내와 아이들이 도착했다. 아이들은 낯선 환경과 음식과 언어에 대해 내가 우려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아주 쉽게 적응을 했다. 가족이 도착한 그 이튿날, 같은 대학에 나가고 있는 이웃 가족을 조촐한 음식과 함께 집으로 초대했다.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어울리게 되었다. 아내는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대화에 낄 생각은 안하고 내 눈치만 보다가는 괜히 주방만 하릴없이 들락거렸다. 그런 아내에게 대화의 기회를 주려고,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아이들이 놀고 있는 방을 엿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서로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들이 아주 재미있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인형 참 예쁘구나. 나도 한번 만져보자." 이웃집 아이가 말했다. 물론 히브리어로. 그러자 이제 갓 여섯 살 난 우리 큰아이가 아내가 직접 만들어준 토끼 인형을 등뒤로 숨기며 말했다. "싫어, 이건 우리 엄마가 만들어 주신 거란 말야." 물론 한국말이었다. "그래도 한 번만 보자." "좋아, 그럼 잠깐만이야." 아이는 마지못해 인형을 건네주었다. 물론 바디 랭귀지를 곁들인 표현들이었지만 아이들은 이렇게 서로가 다른 말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 주일 후, 아이를 유치원에 입학시켰다. 말이라도 좀 트인 다음에 보내자는 아내의 말처럼 불안한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언어는 직접 부딪치며 배우는 것이라는 평상시 내 주장대로 입학을 시키고, 매일 끝나는 시간보다 조금 일찍 가서 유심히 아이를 지켜봤다. 며칠이 지나도록 아이는 동그란 탁자에 팔을 턱에 고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돌아오는 길에 아이에게 물었다. "너, 유치원 다니기 싫니?" "아뇨." "그런데 왜 유치원에서는 아무 말도 없는 거니?" 물론 낯선 히브리어가 들리지도, 입에 담아지지도 않을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잘못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아이가 심한 우울증이나 심지어 자폐증에 걸릴 우려도 있어 재차 다그쳐 물었다. "유치원이 마음에 안들어?" "아뇨, 마음에 드는데... 그래도 갈래요." 그렇게 열흘쯤 지나자 드디어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 입이 트인 아이는 두 달이 지나자 오히려 한국말보다도 히브리어를 더 잘 구사했다. 부모하고 대화하는 시간보다는 아무래도 유치원이나 이웃 아이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더 많은 아이에게는 그만큼 히브리어를 습득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아이는 세 살 난 동생을 붙잡고 히브리어로 떠들어 댔다. 막내 아이는 그런 누가 덕에 엉겹결에 히브리어를 배우게 된 셈이다. 아이들이 이스라엘에 들어온지 1년이 지나자, 우리 가족에게는 커다란 고민이 생겼다. 한국 아이들이 한국말을 못 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에 눌러산다 해도 한국 사람이면 당연히 한국말을 알아야 하는 것인데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갈 우리에게는 더더구나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가족 회의를 열어 집에서 가족끼리 대화할 때는 히브리어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웃지 못할 일이 종종 벌어졌다. 하루는 막내 아이가 허리춤을 움켜쥐고 급하게 소리쳤다. "아빠, 여기 또 있어! 여기 똥 있어!" 나는 아이가 어디에다 똥을 싸놓았나 싶어 이곳 저곳을 살펴 보았지만 똥은 보이지 않았다. "이 녀석아, 아디에 똥이 있다는 거야." "아빠, 여기 똥 있단 말이야!" 아이는 그래도 굽하지 않고 연신 자기 주장을 해댔다. 한찬 후에야 그 뜻을 알아챈 나는 그만 실소를 하고 말았다. '예쉬리칵키!' 우리말로 직역을 하면 '여기에 똥이 있다.'라는 뜻인데 그 의미는 '똥 마렵다.'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히브리어 문법 구조에다가 한국어를 끼워 넣는 식이었다. 아침에 유치원에 갈 때에도, "나 유치원 갖고 가!" 하고 소리치고 뛰어나가기 일쑤였다. 물론 '나 유치원에 데려다 주세요.'라는 뜻이었다. 어떤 날은 걱정스러워 아무런 대꾸도 없자 현관문을 열며 또 한 번 소리쳤다. "엄마, 아빠, 나 유치원 갖고 가!" "그래, 무엇을 가지고 가는데?" "아니, 나를 가지고 가." 이쯤 되자 새로운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길로 부랴부랴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한국어 교과서를 보내달라는 전화였다. 그리하여 아내는 뜻하지도 앉게 이국에서 자기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정규 과목으로 외국어를 가르친다. 영어는 기본이고, 이스라엘의 지역적 특성상 아랍인에게는 히브리어를, 유태인에게는 아랍어를 추가로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외국어 교육법이 우리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처음부터 ABC를 가르치는 우리와는 달리 아예 ABC는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들은 처음 1년 간을 교과서나 노트도 없이 영어권 출신의 선생님으로부터 아랍어나 히브리어 단 한 마디 없이 순전히 영어로만 수업을 박게 된다. 1년이 지난 후에야 교과서를 통해 ABC가 아닌 단어나 문장을 곧바로 배우는 것이다. 나도 서른 일곱 살이라는 늦은 나이게 히브리어 어학 교습을 받은 적이 있다. 거기에서는 비영어권인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르과이, 헝가리, 러시아 등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배워 마치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첫 시간이 되자 여자 선생님이 들어왔다. 잔뜩 기대를 하고 있던 나는 점차 시간이 지나자 나의 무지에 대해 비통한 마음까지 갖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마디로 영어는 없었던 것이다. 세 시간 내내 온통 알아듣지도 못할 히브리어로 떠들어 대는 것이었다. 단 한 마디라도 영어로 힌트를 주면 알아들을 텐데, 나의 그런 간절한 소망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여선생님은 강의를 끝내고 횡하니 나가버렸다. 허황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내가 이 강의를 계속 들어야 하는 것인지 회의에 차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 있는데, 그것 참 이상한 일이었다. 몇 가지 단어가 빙빙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니 그 여선생은 세 시간 내내 줄곧 몇 가지 말만을 되풀이했던 것 같다. 그러나 곧바로 실망해야 했다. 그 몇 가지 단어를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길로 나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먼저 유학을 와 있던 목사님을 방문했다. "오늘 처음 히브리어를 배웠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목사님은 모처럼 만나는 같은 민족인 나를 무척 반갑게 맞아 주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공부하는 거시 더 빠를 수도 있지요." 그 말이 옳았다. 한국에서 배워온 것처럼 단어를 외우고, 문장 구조를 익히는 것보다 그렇게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나는 나중에서야 알 수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첫날 여선생이 말한 그 뜻을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여자 선생이고 너희들은 히브리어를 배우는 학생이다. 나는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여선생이고 너희들은 히브리어를 배우는 학생들이다.' 세상에, 이 몇 마디를 가지고 세 시간을 떠들어댔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석 달이 지나자 귀가 뚫리고 입이 열려 일상 용어는 완전히 히브리어로 대화할 수가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나만의 독특한 학습 방법이 있었는데, 이것은 다음에 설명하기로 한다. 우리의 외국어 교육은 한 마디로 분석적 방법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작문이나 문장 번역에는 나름대로 강점이 있지만 길거리에서든 차 안에서든 외국인만 보면 행여 말이라도 걸어올까 두려워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는, 한 마디로 언어 구사는 제로인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의 외국어 교육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려서 말을 배우듯, 엄마 아빠 까까를 문법도 없이 먼저 배우는 그들은 대부분이 어학을 전공하지 않은 이상 책을 읽으면 요약할 수 있어도 번역은 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우리나라도 외국어 교육에 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곧 초등학교 과정에도 외국어가 정규 과정으로 채택된다고 한다. 그에 따라 외국어의 조기 교육에 관한 찬반 토론도 뜨겁게 가열되고 있다. 물론 언어는 어려서 배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세계화 추세에도 어울린다는 것이 찬성하는 사람들의 주된 주장이다. 물론 나도 조기 교육에는 경험한 바도 있어 찬성하는 편이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 환경에는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다. 우리의 교육은 그야말로 인성 교육은 뒷전이고 오직 기능 교육에만 치중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유치원에 입학하기도 전에 모든 아이가 천재인 우리의 아이들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피아노니 바이올린이니 미술 학원이니 속셈 학원이니 온갖 학원을 전전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작게는 가족에서부터 크게는 우리 민족에 대해, 그 의미와 긍지를 심어주는 부모가 과연 얼마나 되는가. 학교의 교육은 또한 어떠한가. 교과서에 나오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딸딸딸 외워 시험만 잘 보면 만사 오케인인 것이다. 누구도 그 아이의 성격이 어떻고, 관심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하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 외국어 조기 교육을 시키는 것은 문제가 많다. 아이들은 우리의 정서나 문화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전혀 그 구조가 다른 외국어를 공부함으로써 빠질 정서적 이질감이나 문화의 사대주의가 가속화될 우려가 많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국에서 살지 못하고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들도 히브리어보다는 영어나 그 밖의 그 지역 언어에 더 익숙해져 있다. 아니, 아예 히브리어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이스라엘 민족이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고유한 정서와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있게 한 것은 오직 그들의 종교와 교육이다. 그들의 어머니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든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관습과 설화 속에 얽힌 이야기들을, 그리고 시가 속에 스며들어 있는 애환들을. 이렇게 그들만의 역사와 전통을 그들은 끊임없이 구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세계 도처에 흩어져 살면서도 그 지역 문화에 흡수되지 않고 그들만의 유태민족 문화를 창출하여 전승해온 힘의 원천이 된 것이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 오늘밤부터라도 잠자리에 든 아이의 귓가에 대고 살며시 속삭여 주자. '너는 위대한 단군의 후예란다. ...그리하여 콩쥐는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단다.' 물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헤엄을 칠 수가 없다 초청을 받아 이곳 저곳 강연을 다니다 보면, 주최측에서 가장 많이 들어오는 요청은 외국어 습득에 관한 방법을 체험적인 측면에서 말해 달라는 거다. 나라고 해서 그리 독특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몇 개 국어를 구사한다고 해서 그렇게들 요청하는 모양이다. 그런 강연 때마다 내가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외국어가 별거인가. 영국 사람은 영어를 잘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한국 사람은 한국말을 잘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외국 사람 중에 한국말을 능통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어눌하다고 해서 결코 주눅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 영어를 잘 못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까. 그럼,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말로는, 외국 문화를 좀더 자세히 알고 대처하기 위하여, 새로운 지식을 빨리 받아 들이기 위해, 지구촌이 되어 버린 세계와 대화를 위해 배운다고들 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 외국어 아닌가. 결국은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법은 잘 알지 몰라도 대화에는 서툴게 되는 것이 우리의 외국어 교육이다. 문법을 생각하다 보면 이미 대화할 순간을 놓쳐버려 벙어리가 되고 마는 것이 우리의 외국어 교육인 것이다. 덴마크에 유학할 당시였다. 덴마크 정부 초청을 받고 덴마크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는 온통 설레는 마음뿐이었다. 공항에 도착해서도 언어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새떼 지저귀는 소리 같기만한 덴마크 말 소리에 오히려 저것도 말이라고, 저래도 말이 통할까 하는 의구심만 들 뿐이었다. 영어는 제법 할 줄 아는 상태였기 때문에 기숙사까지는 무사히 도착할 수가 있었다. 짐을 정리하고 감개 무량한 마음으로 길게 자리에 눕자, 비로소 겁이 덜컥 났다. 이제부터는 공항에서 새떼 조잘거리는 소리처럼 들리던 말로 의사 소통을 해야 하는 것이다. '덴마크 말 한 마디는커녕, 기역 니은 조차 모르는데, 언제 배워서 공부를 한담.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이라도 배워서 오는 건데. 전액 장학금을 받으면 뭘해.' 불안감이 점점 더 커지자 내가 매달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었다. '하나님, 구두닦이 출신을 여기까지 보내주시어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이 머리로 어떻게 그 힘들다는 덴마크 말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드리자 걱정은 점점 사라지고 '걱정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불안이 사라지자 다시 곰곰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몇 마디나 될까?' 먼저 대화는 통해야 살 수 있다는 절박감으로 일상 용어부터 습득하기로 마음 먹고, 도대체 일상적인 언어가 몇 마디나 될까를 영어로 문장을 만들어 헤아려 보았다. 80여 개의 문장을 만들어 놓자, 짧은 내 영어 탓인지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래, 그 정도는 넘겠지만, 대략 500마디 정도면 되지 않겠는가.' 후에 언어 학자에게 확인한 결과, 그것은 거의 정확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희망이 솟았다. '할렐루야'가 절로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하지만 언제 500마디를 다 외운담.' 그 많은 양을 외울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머리로 하루에 몇 마디나 외울 수 있을까.' 결국, I am a boy. 정도면 하루 열 마디는 외울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나왔다. 그렇게 하면 한 달이면 300마디, 중간에 잊어먹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3개월이면 끝난다는 결론이었다. 할 수 있다는 용기와 힘이 솟았다. 이럴 경우 늦춰서는 안 된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내일부터 해야지, 하기 시작하면 이미 늦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 길로 나는 당장 노트를 잘라 수첩을 만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날이 새면 당장 물어봐야지. 그런데 먼저 무엇을 물어봐야 하나.' 그러자, 어린 시절 조카 녀석이 말을 배울 때가 생각났다. 겨우 말을 배우기 시작한 녀석은, '엄마', '까까'를 먼저 입에 올리더니 '엄마, 이게 뭐야?'를 곧바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음 날, 날이 밝자 맨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여학생이었다. "'이것이 무엇이냐'가 덴마크 말로 뭐냐." 물론 영어로 물었다. "베레아 데" 도대체 '베레아 데'라고 하는 건지, '배 대라 대'라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몇 차례를 물어서야 한글로 겨우 수첩에 적어넣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어렵게 첫날은 열 마디를 적어 모두 다 외울 수 있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것은 계속 반복되었다. 어쩌면 그 일이 내 생활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이 주일쯤 지나 외운 것을 확인해 보니, 계산상으로는 140개는 외웠어야 하는데 80-90개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세 달 안에는 마스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제는 실전에 응용할 시점이었다. 다시 밖으로 나갔다. 벤치에 앉아 있는 학생에게 설레임과 불안함을 동시에 안고 슬며시 접근했다. "내 이름은 류태영인데, 네 이름은 뭐니?" "응, 난 쇠렌슨이라고 해." 처음으로 한 덴마크 말이 통했을 때의 기쁨이란! 그리고 대답까지 내 귀에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흥분을 감추고 다시 실전에 도전했다. "나는 한국에서 왔는데, 너는 어디에서 왔니?" "오덴서." "나는 저 아래 사는데, 너는 어디서 사니?" "나는 가족이 몇인데, 너는 가족이 몇이니?" 그러나 그렇게 채 3분이 안 되자, 내가 물어볼 말은 바닥이 나고 말았다. 나는 서둘러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그 학생이 나에게 뭔가를 물어오면 큰 낭패를 볼 게 아닌가. "Bye-Bye." 그러고는 다음 작전지로 떠났던 것이다. 다른 학생하고도 하는 말은 똑같았다. "내 이름은 류태영인데, 네 이름은 뭐니?" 그렇게 바닥이 날 때까지 묻고 빠지기를 계속하자, 어떤 아이들은 중복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뭘 이상한 놈 다보겠다는 눈초리를 내게 보내오곤 했다. 어찌됐든 같은 말을 하루에 너댓 번은 반드시 반복했다. 그것도 실전으로. 그러면서 난 점점 이상한 생각을 갖게 됐다. 그것은 말의 뉘앙스였다. "너는 몇 살 먹었니?" 하고 물으면 그들은 모두가 다르게 대답한다는 거였다. "스물 둘." "너보다 두 살 더 먹었다." 이런 식이었다. 그러니까, 원래의 문법대로라면, '나는 스물 두 살 먹었다.'를 이런 식으로 대답하는 거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이 훨씬 일리가 있었다. 우리의 대화도 그렇지 않은가. 바쁜 세상에 어디, 주어, 동사 따져가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처음 그렇게 어색하게 생각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의 교육탓이었을 게다. 그러니까 격식을 갖춘 대화가 아닌 이상은 모두가 캐주얼이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 발견은 내가 덴마크어를 배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적어도 문법을 외우고 또 거기에 단어들을 꿰어맞추는 식의 언어 습득은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아무튼, 그런 내 나름대로의 언어 교육은 3개월 만에 끝났다. 일상 생활에 아무런 불편이 없을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학과 공부에 필요한 전문 용어 습득만 남았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방법을 알고 있었던 나는 6개월만에 완전히 마스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덴마크어로 강의하는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어도 마찬가지로 공부를 했다. 사실 덴마크어는 알파벳이 영문자보다 네 글자가 많다는 정도 외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히브리어는 달랐다. 첫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나가는 것부터가 생소했고, 문자나 언어 구성 등도 전혀 낯선, 어려운 언어였던 것이다. 나는 덴마크어를 배울 때의 방법으로 그 어렵다는 이스라엘어도 단 6개월 만에 마스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어로 구술 시험을 보는 대학원 시험에도 당당히 합격할 수 있었다. 외국어를 배울 대, 가장 중요한 것은 절대로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한 번은 이스라엘에서 수영장엘 간 적이 있다. 거기에서 나는 참으로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울 정도의 아이를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내가 보기에는 무자비할 정도로, 마구 물 속으로 밀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계속하여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몇 번 허우적거리던 아이는 언제 그랬느냐 싶게 물에 적응하고 있었다. 그렇다. 결코 겁을 먹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코 헤엄을 칠 수가 없는 것이다. 한 제자가 있었다. 그 제자는 지금은 필자가 책임을 맡고 있는 기관의 사무 총장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대학 시절의 그는 열등감에 휩싸여 있던 학생이었다. 인간성으로 말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 학생이 농과 대학을 나와서 무엇을 하는가, 하는 회의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루는 그 학생을 조용히 불렀다. 앞날이 구만 리 같은 사람이 벌써 인생의 한 편을 포기하고 있는 것 같아 스승된 입장으로 몹시 안쓰러웠다. 그래서 내 유학 시절, 언어를 습득했던 방법을 설명하면서 그에게 누구라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자네, 이스라엘에 가서 공부 한 번 해보지 않겠나?" "교수님도 참, 집안이 좋다든지, 공부를 잘하든지 해야 유학도 가는 거지, 저 같은 놈이 무얼 믿고 유학을 가겠습니까." "그건 자네 마음먹기에 달린 거야. 내가 장학금은 얻어줄 테니까 한번 가보도록 하게. ...그런데 비행기표는 자네가 마련해야 하네." 한동안 설득을 한 후에야, 그 학생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비행기 표 한 장 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물론 내가 도와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하면 혹시라도 그에게 안일한 생각이 들 수도 있어, 여비만은 그가 마련하도록 했던 것이다. "자네, 내가 알기로는 누나가 가구점을 한다고 들었는데, 누나한테 한번 부탁해 보지 그러나." "신세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공불로 하면 되지 않겠나?" "성공불이라니요, 교수님?" "아니, 성공불도 모르나, 말 그대로 성공하면 갚는다는 거야. 물론 실패하는 날에는 안 갚아도 되지." 그 학생은 결국 누나로부터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200달러도 안 되는 지참금을 가지고 떠나는 그에게 나는 나의 유학 시절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었다. 그는 내가 설명해 준 대로 잘 따라했다. 3개월 만에 이스라엘어로 일상의 대화를 하는 데 불편이 없을 정도가 되었고, 8개월 후엔 대학원에 입학하여 히브리어로 강의를 받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학위를 받았던 것이다. 자신을 얻은 그 학생은 곧바로 다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좋은 성적으로 학위를 이수하여 멋진 귀국을 했던 것이다. 도전하는 자만이 성취할 수 있다. 물을 두려워하는 자만이 헤엄을 칠 수가 있다.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외국어를 대할 때에는 절대로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반드시 외국어를 습득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어쨌든 늦게나마 우리의 외국어 교육의 방향이 제대로 바뀐 것은 다행한 일이다. 앞으로는 몇 년을 배우고도 벙어리인 사람은 없을 테니까. 절대로 주눅 들면 안 되네 어느 날 연구실로 한 학생이 찾아왔다. 그 학생은 들어오자마자 내 앞에 무릎을 꿇고 통사정을 하다못해 애원을 했다. "선생님, 저 유학 좀 보내주십시오. 안 그러면 저는 죽습니다." 막무가내로 달라붙는 그 학생은 사실 공부하고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어떻게 놀기를 좋아하는지 술, 담배, 여자 3박자 이외에도 춤선생 노릇도 할 정도였다. 그 학생의 장점이라면 활달한 성격을 갖추고 있어서 친구 관계가 좋다는 것뿐이었다. 그런 걸 알고 있으면서도 통사정을 해대는 학생을 무턱대고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네, 그게 무슨 소린가. 유학이라니, 난 자네가 공부에는 도통 취미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선생님, 그런 게 아닙니다. 저도 고등학교까지는 꽤 공부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대학에 와서 좀 방심해서 그렇습니다. 제발, 유학을 보내주십시오." 그 학생의 얘기를 듣고 보니, 고등학교까지 가정과 학교로부터 지나치게 통제를 받다가 갑자기 자유를 느끼면서 방탕한 생활에 접어들었다는 얘기였다. "그래도 그렇지. 어디 공부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인가. 아뭏튼 내 생각에는 자네가 공부보다는 노는 것에 관심이 많고 또 소질이 있으니 졸업 후에 강남 번화가에 술집이나 하나 차리는 데 어떻겠나." "선생님, 저희 집안이 그런 집안이 아닙니다. 제발 유학을...." 내 진담 반 농담 반에 분이 차는지 학생은 집안 얘기까지 들먹이다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도 안돼." "선생님께서 그러셨잖아요. 뭐든지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이제는 내가 교육 목적으로 사용한 말까지 인용하면서 아예 정공법으로 나온다. 그렇다고 쉽게 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안 된다면 안 돼!" 단호히 거절하고 얼굴을 창 쪽으로 돌리자 학생은 풀이 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꾸벅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기분이 망가진 학생이 다시 찾아오리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그 학생은 몇 번씩을 더 찾아왔다. 그 학생이 찾아올수록 내 마음은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정말 그렇게도 유학이 가고 싶나?" "네, 반드시 가고야 말겠습니다." 반드시 가고야 말겠다는 그 말에 그렇다면 한번 보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그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좋아, 정 그렇다면 나하고 한 가지 약속을 하지. 좋은가?" "예, 물론입니다. 무슨 약속이라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지금부터 당장 D학점 이하 과목을 재수강해서 평균 B학점 이상을 만들어 놓게나, 할 수 있겠지?" "에, 물론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실, 두 학기를 남겨놓은 상태에서 그런 평균 학점을 따내기에는 그 학생에게 거의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공부할 무렵이었다. 석사 학위를 수석으로 마치자, 지도 교수가 나를 총장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총장은 웬 까무잡잡한 놈이 수석을 했다고 인사를 하자 마치 원숭이 쳐다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총장의 기분이 상당히 좋아졌다는 것을 감지한 나는, '이런 때 뭘 부탁하면 우리나라에 이로운 게 없을까.'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눈치를 살살 보며 궁리한 끝에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나 보다 똑똑한 학생을 추천하면 전액 장학금을 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 줄 수 있지. 그렇다면 몇 명이나 추천할 생각인가?" "예, 한 단과 대학에 한 명씩 일곱 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래, 자네같이 똑똑한 학생들이라면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지." 순순히 요청을 받아들이자, '이럴 줄 알았으면 한 열댓 명 추천할 걸.' 하는 욕심이 앞섰다. 어쨌던 서둘러 모교로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일곱 명만 추천해 달라는 서신을 띄웠다. 그리고 얼마 후 추천된 학생들이 이스라엘로 들어왔다. 이 중에 박사 학위 받을 때까지 전액 장학금을 받기로 하고, 석박사 과정만 있는 순수 자연 과학 연구소인 바이스만 연구소에 입학한 학생이 있었다. 나는 바이스만 연구소가 히브리어로 가르치지 않고 영어로만 가르친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문에 이 학생이 영어도 잘하고 실력도 만만치 않아 박사 과정까지 무사히 마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한 1주일쯤 되는 날, 문제가 터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 학생이 택시를 전세 내어 우리나라 거리로 하면 서울과 수원 정도 떨어져 있는 나를 부랴부랴 찾아온 것이었다. 그 학생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저 당장 내일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선언하는 그에게 음료수를 따라주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어디 천천히 한 번 얘기해 보게." "내가 아는 영어하고 여기서 가르치는 영어는 도대체 다르지 뭡니까. 그러니 공부는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르긴 뭐가 다르다고 그러나. 그건 자네가 겁을 먹었기 때문이야. 나도 히브리어 배울 땐 속된 말로 몇 번씩 죽었다 살았다 했네. 그러니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강의도 녹음하고 미국에서 유학온 학생 노트도 빌려 복사해서 복습하며 공부해 보게." 그렇게 달래서 불고기에 김치를 해서 잘 먹여 보내놓고 나자 10일쯤 후에 그 학생이 다시 찾아왔다. "아무리 해도 안 됩니다. 다음 달에 시험이 있다고 하는데 0점 맞기 전에 그만 둬야겠어요." 그러면서 이번에는 고향으로 간다고 하지 않고 농장 실습이나 가야겠다고 추천을 부탁했다. 그냥 돌아가기에는 아마도 큰 기대를 가지고 있을 고향 친지들을 대할 면목이 없었을 것이다. "키부츠 농장에 보내주시면 소똥이나 1년쯤 치우다 가겠습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해도 안 된다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 길로 나는 그를 텔아이브에 있는 키부츠 조직 본부에 데리고 가 농장 실습생으로 허가를 받아줬다. 마음이 무거웠다. 좋은 직장에 취직해 잘 살던 사람을 괜히 불러들여 사람만 바보 만든 꼴이었다. 생각다 못해 장학금을 주어 입학 허가를 해주었던 사람을 인사 핑계삼아 방문했다. "우리 한국 학생들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말에는 주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쭈눅? 쭈눅?" 내가 한국말로 주눅이라 하자 그 사람은 무슨 말인가 하여 몇 번을 되지도 않는 발음으로 반복했다. "사람이 주눅이라는 것에 걸리면 아는 것도 모르게 되고 할 수 있는 것도 못 하게 됩니다." "아하, 아카데미 프레스 말이군요. 그렇다면 한국 유학생 중에 무슨 문제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예, 어제 미스터 김이 잔뜩 주눅이 들어 찾아와서는 강의가 도대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소연을 합디다." 내 말을 듣고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잠시 생각한 후 그가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건 간단합니다. 시험을 면제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학생이 시험을 안볼 수 있습니까? 어떻게 공부도 못하는 학생을 데려와서, 지금 도대체 뭘 어쩌자는 겁니까?" 그 말을 듣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한 번쯤 경고를 줄 필요가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격정적입니다." "이태리 사람이 더 격정적이오. 화가 나면 마누라고 자식이고 보이는 게 없단 말이오." 이태리계 이스라엘인을 잘 아는 그는 실제로 격정적인 행동까지 동반해 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자살을 생각하는 법입니다. 만약 그 학생이 자살하면 어쩌겠습니까?" 더 흥분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슬쩍 엄포를 놓았다. 그 말은 즉시 효과를 나타냈다. 아무래도 자살을 금지하는 종교적 사고방식이 통했을 터였다.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합니까?" "내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절박한 심정입니다. 그러니 제발 그 학생을 살려주십시오." "입장은 잘 알겠지만 법규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결국 설득 당한 그는 당장 긴급 교무 회의를 소집하여, 시험을 안 보면 학생이 아니니까 실험 실습 두 과목만 시험을 치르기로 하고 이론적인 과목의 시험은 한 학기 유보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거기에다 그는 영어 특별 지도 교수까지 임명하여 그에게 부쳐주었다. 그 후, 두 달이 지나자 그 학생은 완전히 자신감을 회복하여 월등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라성 같은 학자들의 논문을 단숨에 뒤집어버리는 석사논문을 발표하여 졸지에 그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통하게 되었다.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세계 각국의 학회에 초대받아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강의를 했다. 영국, 이탈리아, 심지어, 한국의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에 초대되어 교수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한 것이다. 그 후 그 학생은 영국 런던 유니버시티에 초대되어 연구를 계속하여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와 교수로 재직하며 연구와 강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 유학생은 결국 큰 성공을 거뒀지만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철렁이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니 함부로 유학을 가겠다고 해서 보내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학생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또 다른 학생이 나에게 유학을 부탁했던 일이 생각난다. 어느날 그 학생은 내 연구실로 찾아와 느닷없이 덴마크에 유학을 보내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 학생에게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학부성적이 평균 B학점이 넘어야 하고 외국어에 불편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그 학생은 이제까지는 비록 공부를 못했지만 앞으로 잘하겠다는 결심을 보여 주었다. "선생님, 저도 한다면 합니다. 앞으로 선생님이 시키는대로 열심히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말 심기일전하여 열심히 공부하던 그가 하루는 색다른 제안을 해왔다. "...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제가 선생님 방에서 공부도 하고 선생님 심부름이나 청소도 하면 안 될까요?" 생각하는 것이 대견했지만 다른 학생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가 열심히 하는 것은 알지만 그것만은 안 되네. 다른 학생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나. 자네만 편애하는 줄 알 거 아닌가." "아, 선생님. 그것만은 걱정마세요. 제가 누군데요. 친구들은 이미 다 삶아 놨습니다. 그러니 선생님 허락만 있으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그 학생은 나와의 약속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수속상의 문제로 그 학기에는 유학길을 떠날 수가 없었다. 모처럼 망중한을 즐기던 시간에 그 학생이 다시 찾아왔다. "공부가 잘 안됩니다. 집에 있으니까 술과 친구들 생각만 나고... 외국에 나갔으면 합니다." "그래, 그럼 영국에 보내줄 테니까 다음 학기까지는 영어만 공부하고 있는 게 어떤가. 그리고 가더라도 명심해야 할 것이 있네. 절대로 주눅 들지 말게. 자네는 한국말을 잘하지 않는가. 영국인이나 미국인이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절대로 주눅 들면 안 되네." 그렇게 영국에 건너간 제자는 1년이 안 되서 신문 사설까지도 훌륭하게 번역할 정도의 영어 실력을 쌓았다. 그러나 애당초 덴마크로 유학하기를 원했던 그 학생은 타고난 여복 탓인지 영국 여선생의 배려로 런던 교외에 있는 농과 대학에 들어가 석사, 박사 학위를 우수하게 마친 후 귀국하여 대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선생이 알긴 뭘 알아? "...응, 그래. 그럼 어쩌겠니? 그래서 끌어다가 한 상 잘 멕여 보냈지... 그럼, 당연하지. 얘는, 봉투 싫어하는 선생님이 어디 있니? 아주 당당히 받아넣더라, 얘." 끌어다가 멕이고, 봉투를 좋아하다니? 독자들은 이 대화가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나도 그랬는데 뭐.'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수도 있다. 얘기인즉,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매일 좋은 자리에 앉혀주지 않고 구석진 자리에만 앉혀주더라는 거였다. 그러니 어머니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아이가 선생한테 무슨 미운 털이라도 박힌 거 아냐? 어떤 자식인데 그럴 수가 있어? 내가 선생한테 너무 무관심했나?' 그리고는 부랴부랴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그래, 아이 때문에 걱정이야, 작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한 학년 올라가더니 글쎄, 점점 곧두박질치는 거 있지. 어쩌면 좋겠니? 아이는 또 아이대로 자리는 맨 구석 자리에만 앉혀주고, 선생이 자기를 예뻐해 주지 않는다구 불평이고... 아, 그렇지! 그 선생이 작년에 네 아이 담임이었지? 그래, 어떤 선생인데... 응, 한 석 달 됐지. 물론, 주고 말고. 아, 그래? 지난번 선생은 안 그랬거든. 그 정도 했으면 잘 해주었는데, 그럼 당장 만나봐야겠구나. 그래, 고마워" 그렇게 해서 시간없는 선생님을 밖으로 불러내어 한 상 잘 대접해드리고 고생하신다며, 성의껏 돈봉투까지 드리면서, 자기 아이를 좋은 자리에 앉혀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다고 정중히 부탁했다는 것을 친구한테 다시 보고하는 전화가 그런 식이었던 것이다. 이런 통화를 하는 중에 옆에 아이라고 있었다면 이것만으로 전화의 내용이 일단락되는 것이 아니다. 따르고 존경해야 할 자기 선생님을, 끌어내어 멕였다는 어머니의 말은 아이에게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선생님과 제자간의 사랑과 신뢰가 곤두박질치는 순간인 것이다. "선생님이 뭔데요, 선생님이 뭔데 날 때려요...." 잘못을 해서 야단을 맞은 아이가 선생님에게 이렇게 대드는 경우, 무엇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부모들은 아이가 삐뚤어지거나 공부를 못하면 항상 학교나 선생님들한테 그 책임을 묻는다. "도대체, 너는 학교에서 어떻게 배웠길래 그 모양이냐, 응?" 교육 부재를 얘기할 때마다, 가장 먼저 입에 올리는 것이 선생님의 위상이다. 그만큼 선생님은 교육의 최일선에 교육의 주체로서 아이들에게 직접적이고도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아이들은 물론이요, 가정과 사회로부터 튼튼한 존경과 신뢰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그런 신뢰는커녕 선생님을 마치 세상물정 모르는 꽁생원으로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아이들 교육은 뒷전에 두고 돈봉투만을 밝히는 파렴치한으로 치부하는 이도 있다. 실제 선생님과 학부모에 대한 앙케이트 조사에서도 돈봉투 문제는 공공연한 현실로 나타났다. 심지어 어느 선생님은, 봉투를 받지 않았을 때, 다른 선생님의 따가운 눈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만큼 그런 비리가 넓고 뿌리 깊게 퍼져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현실을 인정하면서 나름대로 비판의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그들 대부분은 선생님의 입장을 동정하고 있다. 그들은 우선 한 선생님이 맡아야 할 아이들의 수부터 헤아린다. 그리고 그들의 과도한 업무량으로서는 도저히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킬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리고는 그들의 경제적인 부분을 말한다. 초등학교 선생님 중에 남자 선생님의 비율이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이 그들의 형편없는 경제적 여건을 입증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선생님들의 입장은 또 어떠한가. 많은 선생님들이 자기 직업에 만족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사회적 소명의식의 부재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는 교육 환경적 요소가 더 크게 자리하고 있다. 제대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도 점수와 등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학부모들 앞에서 선생님들은 더 이상 전인 교육을 펼칠 수가 없다. 만약, 소신껏 그렇게 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학부모와 학교 재단, 상사 선생님으로부터 감당할 수 없는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게 우리의 교육 환경인 것이다. "아니, 우리 아이 망쳐 놓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공부하기도 바쁜 아이들에게 무슨 놈의 특별 활동입니까?" "김 선생, 학교하고 무슨 웬수라도 졌소? 다들 자기 아이 전학시키겠다고 난리지 않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김 선생이 떠나줘야겠소." 아무튼, 모두가 문제인 것이 교육이다. 그러나 여기서 단정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 제대로 된 교육을 위해서는 서로간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선생님들이 제대로, 소신껏 가르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교육은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의 수요자인 학부모, 사회구성원 모두의 문제이다. 최일선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육자들에게 세밀한 교육 환경을 조성할 수 있도록 가정과 사회, 국가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교육 환경은 보다 알찬 수확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에 유학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의 소풍날이었는데, 거기에서는 그런 야외 학습시에는 학부모가 선생님의 보조 노릇을 하게 되어 있어 부부 동반을 하게 되었다. 그런 학부모 중에는 우리 사회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초등학교 선생님보다는 지위를 인정해 주는 대학 교수나 의사, 박사도 많이 끼어 있다. 그 날은 마침 같은 대학에 나가 잘 알고 있는 생물학 교수가 있어 우리 가족은 자연스럽게 그의 가족과 어울리게 되었다. 그 생물학자는 딸의 손을 꼭 잡고 마치 아이보다 더 즐겁게 소풍을 즐기는 듯 보였다. 그런데 딸아이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는지, 자기 아빠의 손을 끌고 가서는 그걸 가리키며 물었다. "아빠, 이 꽃 참 예쁘지요?" "그래, 정말 너처럼 예쁘구나. 이 꽃 이름이 뭔지 아니?" "몰라요. 무슨 꽃이에요. 아빠?" "글쎄다. 무슨 꽃인지 아빠도 잘 모르겠는 걸? 그래, 선생님은 아실 거야, 선생님은 모르시는 게 없거든. 그러니까, 저기 계신 선생님께 가서 물어보고 오렴." 아이는 꽃 한 송이를 꺾어 가지고 선생님 쪽으로 재빨리 뛰어갔다. 그것은 수선화였다. 그러니 생물학을 전공으로 하는 교수가 그 꽃이름을 모른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거 순 사이비 교수 아니야, 하는 의구심으로 그에게 슬쩍 떠봤다. "정말, 모르십니까?" "모르긴요." "그런데 아이한테는 왜 모른다고 그런 겁니까?"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요." 그때, 마침 선생님한테 달려갔던 아이가 뾰로통한 채 힘없이 걸어와서는 자기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선생님도 잘 모르시겠대요." "그래? 오늘은 소풍날이라 선생님께서도 정신이 없어서 그러신가 보다. 그럼, 가지고 있다가 내일 다시 선생님한테 여쭤보도록 해라." "피, 아빠는. 지금 모르는 걸 내일이라고 알 수 있어요?" "그럼. 너도 알고 있는 것을 곧잘 잊어버리고 그러잖니?" 아이는 그래도 못 미덥다는 듯, 고개를 씰룩거리면서도 꽃을 텅 빈 도시락에 담았다. 얘야, 그건 수선화라는 꽃이란다. 툭 튀어나올 듯 간질간질한 입을 다문 것은 그 교수의 계속되는 눈치 때문이었다. 답답함을 꾹 참고 아이들이 없을 때, 다시 그 얘기를 꺼냈다. "도대체 이유 좀 한번 들어봅시다." "...아이는 내일 아침이면 선생님으로부터 그 이름을 알게 될 겁니다. 그러면 아이는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빠도 모르는 것을 선생님은 알고 계시구나. 역시 선생님이 최고야. 이럴 게 아니겠어요? 그러면서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선생님을 존경하고 신뢰하게 되는 거지요. 거기에다 또 하나 좋은 점이 있다면 선생님에게 자신이 무엇을 물어보았다는 거지요. 그러면 선생님은 칭찬을 해주실 테고, 아이는 자신을 인정해 주는 선생님으로부터 자신감을 얻게 될 겁니다." "만약, 선생님이 내일도 모른다고 하면 어쩌겠습니까. 그러면 오히려 역효과만 가져올 텐데...." "다 방법이 있지요." 후에 들은 얘기지만 방법은 이러했다. 그 교수는 아침에 등교하려는 아이에게 봉투 하나를 건네 주며 약속을 했다. "너, 오늘 선생님한테 여쭤볼 말이 있지? 그러기 전에 먼저 이 봉투를 선생님한테 드리고 여쭤봐라. 꼭 그렇게 해야 한다. 알았지?" 아이는 영문도 모른 태, 학교에 가서 아빠가 시키는 대로 했다. "선생님, 이거 아빠가 선생님 갖다 드리랬어요. 급한 내용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선생님은 아이가 건네 준 편지를 펼쳐 보았다. 거기에는 안부 인사와 함께 어제 아이가 물어본 꽃에 대하여 적혀 있었다. '...그리고 어제 아이가 물어보았던 꽃 이름은 수선화입니다. 여러해살이 풀의 한 가지로서 잎은 갸름하고 너붓하며 꽃줄기는 잎 사이에서 나와 곧게 자라고, 끝에 5__6개의 노란색 꽃을 피웁니다. 선생님께서 이 편지를 다 읽으시고 나면 제 딸아이가 그것을 물을 것입니다...." 그것은 선생님에 대한 철저한 배려였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꼭 선생님만을 위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모두가 교육을 위한 배려였던 것이다. 이렇듯 이스라엘에서의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배려는 지극하다. 한 달에 한두 번 열리는 그들의 학부모 회의를 보면 그들에게 선생님이라는 위상이 어떤 것인지 보다 자명해진다. 아무리 대학 교수 할아버지가 학부모 자격으로 나와 있어도 선생님의 권위는 작아지지 않는다. 선생님은 오히려 더욱 당당하게 가정에서 지도할 사항을 학부모에게 전달한다. 자기 맡은 분야에 대해서는 자기가 제일 잘 알고 있다는 자신감 속에, 학부모를 대하는 데 한없이 겸손하면서도, 전문적인 직업상의 문제에 있어서는 거리낌없이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참 스승관은 있었다. 그리고 많은 선생님들이 그 길을 가고 있다. 그러한 선생님들을 위해, 내 아이들이 아닌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이다. "선생님이 그러셨단 말예요." "뭐야, 선생이 저런 아이들하고 어울리라고 그랬어?" "예, 선생님이 모두 사이좋게 놀아야 한다고 그러셨어요." "가만 보니 이거 안되겠네. 당장이라도 학부형 회의를 소집하든지 해야지. 나 원. ...그래도 안 돼! 선생이 알기는 뭘 알아? 내일 내가 선생 한 번 만나 볼 테니까, 너는 빨리 아이들 돌려보내고 공부나 해!"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굳이 아이를 학교에 보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이의 인격 완성은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오직 아이들의 성적과 등위에만 관심을 갖는 부모라면 당장이라도 아이를 학교로부터 끄집어 내어 지식 습득 전문 공장에 보낼 일이다. 그 아이가 어떻게 자라서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갈지 모르겠지만.... 너는 가서 공부나 해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가위로 천을 자르고는 그것을 꿰맸다가는 잘 안되는지 다시 뜯어내고는 했다. 밖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그러는 아이를 보고 물었다. "너는 학교에 갔다왔으면 공부를 해야지, 공부는 안하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니?" "...응." 갑작스럽게 나타난 어머니를 보자 아이는 큰 죄를 지었다는 듯 얼버무렸다. "아니, 이게 뭐야. 이거 엄마 치마 아니니? 이걸 어째, 이렇게 다 잘라 놓았니... 너,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응?" "사실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앞치마를 만들어 오랬어요." "앞치마를 만들어 오랬으면 엄마한테 말을 했어야 할 것 아냐. 이렇게 성한 치마를 다 잘라 놓으면 어쩌라는 얘기야. ...참, 선생님은 공부는 안 가르치고 애들한테 무슨 쓸데없는 일이나 시킨담. 그래, 알았으니까 너는 가서 공부나 해." "...앞치마 안 만들어 가면 선생님한테 혼나고, 성적도 안 나오는데...." "걱정말고 공부나 하라니까. 엄마가 만들어주면 될 것 아냐." 이런 대화들은 우리네 가정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어떤 어머니들은 이런 대화를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일로 여길지도 모른다. 사실, 앞치마 만드는 일이 당장 시험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더더구나 대학 입시에 나올 리는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것 아닌가. 그래도 우리의 어머니들은 행여 과제물이 성적에 반영되는 것을 염려하여 열심히 앞치마를 만들어 준다. 그것도 마치 아이가 만들었다는 느낌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조금은 서툴게, 그러나 또래 아이들이 만든 것보다는 조금은 잘 만들어 주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어떤 어머니는 아예, 옷가게에서 앞치마를 하나 구입하여, 새 것을 죽죽 뜯어서는 마치 만든 것처럼 다시 꿰매주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한다. 연을 만들어 오라면, 아이에게 돈을 주어 문방구에서 사가게 한다. 어떤 공작물이든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무엇인가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다. 가위질을 하면서 아이들은 손의 기능을 익힌다. 천을 자르면서 공간 개념과 창의력을 익힐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은 스스로 무언가 하나를 완성해 봄으로써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 풍토는 아이들로부터 이러한 기본적인 것마저도 박탈해 가고 있는 것이다. 막내아이가 초등하교 2학년에 다닌 무렵이었다. 아무리 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지만 그래도 큰아이보다는 훨씬 키우기가 수월했다. 아이는 누나 덕에 말과 글자도 빨리 깨우칠 수 있었고, 어려서부터 이스라엘에서 자란 덕에 적응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루는 아이가 당시 유행했던 육면체 퍼즐을 사달라고 떼를 썼다. 다른 아이들이 갖고 노는 것이 무척 부러웠던 모양이다. 아이는 퍼즐을 사주자, 온종일 거기에만 매달렸다. 그렇게 며칠간을 설명서를 보며 열심히 퍼즐을 맞추던 아이가 어느 날,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내 방으로 뛰어들어 왔다. 드디어 맞춘 것이다. "아빠, 아빠, 맞췄어요. 맞췄어!" "그래, 어디 보자, 잘했는데... 그런데 너 혹시 분해했다가 다시 꿰맞춘 것 아니냐?" "아빠는 무슨 말씀을... 그럼, 한번 보실래요?" "그래, 어디 한번 해봐라." 아이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색색이 맞춰진 조각들을 흐트러 놓더니 다시 맞추기 시작했다. 아이는 정말 능숙하게 맞춰가고 있었다. 마치 기계처럼 민첩하고 정확하게 움직이는 듯싶더니 아이는 자랑스럽게 다 맞춘 퍼즐을 내 앞에 내놓았다. "너, 정말 대단하구나.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었니? 며칠 밤을 새우는 것 같더니...." "으응, 그건 비밀이구요. 아빠, 이제 아빠가 한번 맞춰보세요. 아빠는 대학 교수님이니까, 금방 맞출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그럼 어디 한번 해볼까." 그러나 그것은 쉽게 맞춰지지 않았다. 다 된 듯싶다가도 끝마무리쯤 되면 틀어지곤 했다. 그래도 아이가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중도에 포기할 수도 없었다. 이마에 땀까지 맺혔다. "너 이거 설명서 보고 맞췄지?" "예, 하지만 아빠는 설명서를 보셔도 못 하실 거예요." 나는 내심 이 녀석이 날 무시하나, 하면서도 설명서를 보고 열심히 맞추어 나갔다. 아마, 내가 이 아이만 할 때에는 염소를 끌고 들로 산으로 돌아 다녔을 게다. 친구도 없이 새소리와 개울물 소리를 노래 삼아 산토끼와 어울려 다녔었다. 그러면서 참 많은 꿈의 나래도 펼쳤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 우주 속으로 날아가고 싶었고, 비행기를 보면 나도 새처럼 날고 싶었다. 세상 참 많이 바뀌었지. 나 같은 농투성이, 무지랭이가 이렇게 유학길에 올라 성공리에 학업을 마치고 귀국할 날이 가까워 왔으니... 그렇게 감상에 빠지면서도 열심히 설명서를 보며 퍼즐을 맞춰나갔다. "아빠, 잘 안되지요. 제가 가르쳐 드릴까요?" "그래, 설명서를 봐도 잘 안되니. 어떻게 된 거니?" "그게요. 사실은 설명서가 잘못된 거예요." 그러더니 아이는 자랑스럽게 설명서를 펼쳐들고는 잘못된 부분을 지적했다. "여기 에이 있잖아요. 이게 인쇄가 잘못 됐나봐요. 이걸 씨이로 한번 고치고 해보세요. 그러면 아주 잘 될 거예요." "이 녀석아, 잘못되었으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너 아빠를 놀린 거지?" "아니예요. 아빠를 어떻게 놀려요." 아이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빨리 해보라고 재촉했다. 아이의 말대로 퍼즐을 맞추자 그것은 너무도 쉽게 완성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매우 의아해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었다. 영어의 알파벳도 모르는 아이가 영어로 된 설명서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아이의 창의력에 의해 비롯되었을 터였다. 이스라엘의 교육 특성을 말하라면 무엇보다도 그들은 아이들에게 창의력을 키워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점은 교과서를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그들의 산수 교과서는 아이들 스스로 문제를 만들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렇게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봄으로써 그 주제를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창의력을 배양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던 아이가 한국에 돌아오자 많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항상 앞장서기를 좋아하던 아이가 점차 내성적으로 변해갔고 성적도 많이 떨어졌다. 우리 부부는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를 위해 지나치게 관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이 아이를 위해 바람직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금 힘들다고 해서 누군가에 의지하려 한다면 장차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 설 수 있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 아니겠는가. 역시 아이는 부모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부모의 간섭없이도 아이는 금세 적응해 나갔던 것이다. 스스로 해나갈 능력을 아이는 이미 갖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교육개혁안을 보면, 만 5세가 된 아이는 선별적으로 초등학교에 입학을 허용한다고 되어 있다. 부모가 원하고 아이의 체력과 지적 능력이 수학 능력에 합당하다고 판단되면 학교의 수용 능력 범위 내에서 입학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여기저기서 말이 많은 것 같다. 물론, 조기 교육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허용 기준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의 교육 여건 상 부작용의 우려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우리의 유아 교육 과정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각종 유치원을 비롯한 속셈 학원이니 하는 유아 교육 기간은 거의 사설 기관들이다. 그러한 유아 교육 기관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정도는 다를지 몰라도 아이들의 지혜나 창의력을 키워주는 데 주력하는 것이 아니라, 초등학교 과정에서 가르치는 숫자와 글을 가르치는 데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기 입학은 유아 교육 기관 자체를 입시 학원으로 전락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아니 할 수가 없다. 거기에다 자신의 아이는 남보다 다르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어머니들이 있는 한, 그것은 우려를 넘어 명확한 사실로 굳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유아 교육 기관의 공립화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로 인해 비롯될 소외감도 해소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지적 수준을 가늠할 틀이 없다는 것 또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벌써부터 5세 아이들을 위한 학원이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입학을 위한 국어, 산수 등의 학과목만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입시 학원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의 아이들은 언제쯤 이러한 입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언제쯤 아이들이 경쟁의 관계에서 벗어난 진정한 교육을 받을 수 있을까. 내 아이는 다르다고 외치는 어느 광고를 대할 때마다 섬뜩함을 느낀다. 이렇게 우리의 아이들을 입시 지옥에서 허덕이게 하는 것은 상업성에 물든 어른들 때문이다. 남보다 일찍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남과 다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 이전에 아이가 잃을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즘 아이들이 무척 영악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웬만한 지능만 가지면 학교를 조금 일찍 들어간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다고 지레짐작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지능 발달 속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 어린 아이들의 한 달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일 년과 같을 정도로 지능의 격차가 빨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다섯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같은 학년의 정상적인 아이들보다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미리 배운 것을 활용하여 처음에는 학업을 따라갈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이 나게 된다. 그때부터 천재로 믿었던 아이는 오히려 열등아로 변하게 되고 아이는 어린 나이에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단지 수학 능력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정서 발달에서도 아이는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어려서의 충격은 커서도 극복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 순간 부모의 착각으로 아이가 영원히 헤어나오기 힘든 수렁에 빠진다면, 그것은 너무도 큰 불행 아닌가. 어려서 공부를 잘하던 아이가 점차 성적이 떨어지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볼 수 있다. 부모의 지나친 간섭에 의해 천재로 길러진 그런 아이들은 성적이 떨어질수록 점점 더 자제력을 잃게 된다. 그 결과 어떤 아이는 심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자살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 모두가 잘못된 교육탓이다. 아이가 스스로 터득할 수 있는 지혜를 키워주기보다는 주입식으로 일관된 우리의 교육 풍토가 만들어낸 결과인 것이다. 조금 늦어진다 하더라도 아이에게 지혜와 창의력을 길러주면 결국은 다른 아이들보다 월등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것을 우리는 하루 빨리 깨달아야 한다. "엄마, 선생님이 비행기 만들어 오래." "그래, 그럼 문방구에서 하나 사가지고 가면 되잖아." 이제 이런 부모는 없어야 한다. 선생님도, 모두가 그러니까 하면서 그냥 내주는 과제는 지양해야 한다. 모두가 문방구에서 과제물을 사온다고 모두를 용서하는 식의 교육은 없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과제를 내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단 하나의 비행기라도 교실에서 만들어 보는 것이 바람직한 교육이 아닐까. 그리하여 아이들에게 손의 기능도 알려주고, 무게의 균형도 알게 하고, 바람의 성질도 알게 하고, 아이들에게 멀리 하늘을 향한 꿈도 심어주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 아니겠는가. 떠날 때, 심어놓고 떠나는 건데 '아파트에서 잠을 자기가 무섭다.' '아침에 출근할 때도 다리를 건너기도 무섭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는 것 같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리들이다. 한결같이 불안하다는 말들이다. 거기에다가 공무원 부정 사건도 터지고 지도자들도 칼도마에 오르고 있다. 게다가 전에 없던 홍수 피해까지 한 몫이다. 예전, 자유당 시절에 유행했던 말이 다시 돌고 있을 정도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그래도 다행한 것이라 여겼던 교육 재도 개혁도, 그 인사 문제를 놓고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모두가 너무 성급한 것이다. 모두가 너무 자기 자신, 자기 자신이 속한 소집단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다. 아무리 급하다고 실을 바늘 몸뚱어리에 꿰어서는 못 쓰는 법이다. 하물며 백 년 앞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교육 문제에 있어서는 더 이상 말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큰 저수지에 물이 빠졌다. 평소 열 길이나 되는 깊은 물이, 제일 깊은 곳이 무릎에 찰 정도로 줄어들면서 바닥이 드러나고, 물 속에서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던 고기들이 물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물고기가 탐이 나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맨손으로 고기잡이에 여념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옷을 입은 채, 바지만 조금 걷어올리고 뛰어들고, 어떤 사람은 저고리를 벗은 채, 또 어떤 사람은 속옷만 입은 채, 뛰어들어 고기를 잡으려 했다. 그 현장을 보는 사람마다 너나없이 때를 놓칠세라 끼여들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흥분으로 싸움까지 벌어졌다. 그런데 한 사람만은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집으로 갔다. 그리고는 다락 한 구석에 넣어두었던 그물을 끌어내어 해진 곳을 깁고 찢어진 곳을 손질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를 궁금하게 여긴 그의 아내가 물었다. "아니, 당신은 밖에 나가서 무얼 보았길래 갑작스레 다 떨어진 그물을 손질하시우?" "응, 저수지에 물이 빠졌는데 온통 고기 투성이더라구. 사람들도 그걸 잡느라고 생난리가 났구...." "그럼, 당신도 그걸 잡으려고 다 낡은 그물을 손질한다는 거예요?" "암, 그래야 많이 잡을 수 있을 것 아닌가?" "당신도 참, 그물 고치는 사이에 고기씨가 마르겠소." "...." 아내의 두털거림에도 이 사람은 하루 종일 그물만 수선했다. 그리고 급기야 해질 무렵이 되어 고친 그물을 들고 그는 저수지로 향했다. 여전히 저수지에는 사람들로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물이 고인 가운데 깊은 곳에는 사람들이 전혀 접근을 할 수가 없었다. 물이 얕은 가에서만 서로 잡겠다고 난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만 유유히 그물을 들고 저수지 가운데로 향했다. 그리고는 하루 종일 수선한 그물을 던졌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근접하지 못한 그곳에서 무지막지하게 큰 물고기들이 그물 가득 실려나왔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물을 뜨는 사람의 지혜가 아니다. 다만 모든 사람들이 당장 어떻게 해보려는, 힘을 축적하거나 준비됨이 없이 현실에 뛰어들어 한 건 해보려는 심정으로 법석일 때, 꾸욱 참고 자기 본분으로 돌아가 힘을 기르고 그물을 뜨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역사를 알고 역사를 운전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중국 고사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어머니가 몹시 아파 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았다. 의원은 이곳 저곳 진맥을 하더니 3년 묵은 쑥을 다려 먹으면 나아진다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어머니를 위해 3년 묵은 쑥을 구하려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3년이 넘도록 그 흔한 쑥을 구할 수가 없었다. 빈 손으로 돌아온 그는 툇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낙담을 하며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떠날 때 쑥을 심어놓고 떠나는 건데...."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린 것이다. 현자는 쑥을 심고 쑥을 찾으러 집을 나선다. 그렇게 하면 쑥을 못 구해도 최대한 3년 후면 3년 묵은 쑥을 구할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흔히 3년은 고사하고 3일 앞을 못 보는 경우도 많다. 좀더 긴 안목으로 눈을 돌리며 사는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할 때다. 당장 눈앞의 일로 흥분하거나 가벼운 행동을 취하는 것보다 깊은 뜻을 새기며, 좀더 먼 앞을 응시하며 확실하게 힘을 키워 나갈 때, 건물이 붕괴되거나 다리가 무너지는 엄청난 사고의 틈바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천하를 통일한 역사 가운데 위대한 전략가 한신 장군의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대 전략가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항상 무술을 익히고 전술 전략에 대한 연구를 하며 마음 속 깊이에는 그 뜻을 더욱 확고하게 다져나갔다. 길거리를 다닐 때에도 가보로 이어받은 보검을 품고 다니며 무사로서 기백을 잃지 않으려 했다. 그날도 보검을 품고 어느 마을을 향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갑자기 동네 깡패가 나타났다. 그들은 몸집이 호리호리한 한신을 그냥 보내지 않고 시비를 걸었다. "어디 감히, 조그만 녀석이 칼을 들고 설쳐? 당장 그 칼을 이리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요절을 내버릴 테니...." "...." 한신은 묵묵히 품고 있던 칼을 풀어, 기고 만장해 잇는 그들에게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바쳤다. "그렇지, 말을 잘 듣는구먼. 그럼, 내 다리 밑으로 기어서 가도록 해봐라." "...." 그러면서 그 깡패는 다리를 옆으로 넓게 벌렸다. 한신의 입장에서 보면 그 깡패는 한줌거리도 안 되는 조무래기였다. 그러나 한시는 이번에도 묵묵부답인 채, 깡패가 시키는 대로 다리 밑을 기어갔다. 그리고 애원했다. "제발, 시키는 대로 할 테니, 그 칼만은 돌려주십시오." "하하하, 사람 같지 않은 것이 칼은...." 그 깡패는 애걸하는 한신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칼을 돌려주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한신은 군사 전략가 공모에 응시하여 당당히 합격하였다. 그리고는 무사가 되어 군의 기강을 바로 잡는데 온 정열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군대의 위계질서나 기강이 너무나 해이해 쉽게 바로 서지 않았다. 그는 생각 끝에 한 방법을 짜내었다. 군 부대내 사령부 앞에서는 말을 달리지 말 것을 명하고 만일 어기는 자에게는 극형을 처하겠다는 방을 써 붙였던 것이다. 그런데 방을 붙인 풀이 채 마르기도 전에 먼지를 뽀얗게 내며 말을 타고 달리던 사람이 잡혀왔다. 기고만장한 그 젊은이는 한신 장군의 관할 최고 사령관의 외아들이었다. "당신이 감히 나를 처형할 수 있겠소? 그렇게 되면 당신 또한 극형을 면치 못할 것이오." 당시, 그를 처벌할 만한 사람은 없을 듯 보였다.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그런 그와 한신을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신은 단호했다. "이런 감히... 여봐라, 당장 이놈의 목을 쳐라. 그리고 앞으로 누구라도 내 말을 거역할 때에는 이렇게 된다는 것을 똑똑히 명심하라!" 한신은 그 자리에서 단호히 목을 베는 극형의 명령을 내렸다. 뒤늦게 이를 안 최고 사령관은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러나 한편으로는 군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한신 장군의 과감한 용단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육체적으로 나약했던 한신은 확고한 정신력과 가슴 속 깊이 끓고 있는 정의감으로 중국 통일을 향한 발걸음을 계속했던 것이다. 요즘, 세간에 유행하는 중국 드라마, '포청천'의 한 부분 같은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포청천을 표방하는 서울 시장 후보가 시장에 당선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부정이 없고 강직한 그런 사회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사회에 대한 바람뿐만이 아닌, 나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권투를 배워 훌륭한 선수가 되면 될수록 주먹을 쓰지 않는 법이다. 싸울 줄 아는 사람만이 싸워야 할 곳, 싸울 때를 알고 진정 싸울 수 있는 것이다. 아무나 붙들고 싸우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 주먹이 나갈 때는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바보처럼 비굴하게 모욕을 당하기도 하는지 모른다. 언젠가 오게 될 한 순간을 위해 그렇게 참으며, 힘을 비축하며. 이런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얄팍한 지식과 정보를 갖고, 극히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식견으로 지식의 오만에 빠지거나 학문의 자만에 빠지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좀더 배우고, 알아보고, 완전하려는 노력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시점이다. 풋내기 권투 선수는 항상 궤멸을 앞에 두고 도전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무적의 힘을 가진 자는 모든 작은 일에 양보를 해버린다. 많은 것을 다 주어도 최후에 남는, 그 소중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보루를 끝까지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가슴 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자기만이 간직할 수 있는 그 어떤 소중한 것을 갖지 못한 사람은 그래서 불행한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불행한 사람인 것이다. 사명이라는 말을 한자어로 풀어보면 재미있는 뜻이 있다. 부릴 사자와 목숨 명자가 합쳐져 사명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 뜻인즉 부림 받은 목숨이라는 것이고, 목숨은 몸으로, 몸은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부림받은 몸은 심부름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가장 작은 심부름꾼을 소사라고 하며, 대사나 특사는 나라나 국가 원수를 대신해 국가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다. 작은 심부름꾼인 소사를 생각해 보자. 담배를 사오거나, 사람을 데려오거나 하는, 가장 작은 단위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담배를 사오라고 했는데 껌을 사오거나, 이 과장에게 전하라고 했는데 김 과장에게 전한다거나, 무슨 심부름을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면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을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비록 작은 직장에서도 해고될 터이고, 아무도 그를 고용하거나 그와 함께 일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라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사람이 될 수가 있다.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자기의 역할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러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사고하고 있는가, 오늘의 내 임무는 무엇인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내 자신을 위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매순간, 이런 생각을 버리지 않을 때, 나와 우리 사회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사명 의식이란 이렇게 깊이 의식하고 긴장을 하며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의 깨달음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깨달음을 가지고 힘을 비축하는 것이다. 이런 글을 쓰면서도, 공중 전화를 길게 한다고 칼을 휘두른 사람이 떠오르고, 공사 기간을 단축했다고 좋아하는 어느 사장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교육은 모든 것의 으뜸이요, 근본이다. 서두르지 말고 먼 장래를 내다보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운용하는가이다. 벌써부터 치맛바람을 걱정하는 여론이 드높다. 교사들의 양식을 우려하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교육은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자성하고 힘을 비축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 냉철한 판단과 분석, 그리고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목표를 향하여 모두가 달려나가야 한다. 그물을 뜨는 기다림과 쑥을 심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인물이 없다, 인물이 없다 한탄하지 말고 인물을 키우려고 노력하거나 인물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 민족의 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역설이 더욱 생각나는 세상이다. 4. 이제는 어머니가 일어설 때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신화가 있다 처음 공항에 도착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택시에는 바라본 이스라엘의 풍경은 살벌하기만 했다. 평화를 상징하듯 눈부신 파란 하늘과는 달리 거리에는 온통 기관단총을 든 젊은이들로 가득했던 것이다. 그것도 그냥 빈총이 아닌 탄창을 끼우고 장전된 상태의 총이었다. 그제서야 내가 이제 서 있어야 할 곳이,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사막을 옥토로 바꾸어 세계 제일의 경제 부국으로 성장한 나라로만 생각했던 이스라엘이 아닌 주변 국가들과 수천 년을 대치하고 있는 고난의 나라,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백주 대낮에 서울 거리에, 장전된 총을 든 젊은이들이 활보하고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그들이 나라를 지키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한다지만 단 한 번의 실수가 벌어진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보고 들어온 바에 따르면 이스라엘에서 총기 사고가 발생한 것은 단 한 건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 이유를 알기까지는 그다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바로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교육에서 연유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가부장 제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율법상 여자들은 회당에조차 나갈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법률을 보면 아이러니컬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 국적 취득 조건을 보면 첫째, 부모가 모두 유태인일 경우에는 그들이 아무리 외국 국적을 취득하여 오랜 동안을 해외에서 생활했더라도 그들은 이스라엘에 이주하는 순간부터 자동적으로 이스라엘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둘째, 어머니가 유태인이고 아버지가 외국인일 경우에도 동일한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셋째, 아버지가 유태인이고 어머니가 비유태인일 경우에는 상황이 다르다. 그들은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만 비로소 유태인의 자격을 인정받는 것이다. 그만큼 어머니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종교에서 연유된 것임에 틀림없다. 구약 성경만을 인정하는 유태교의 안식일 풍습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그들의 교리에 철저한가를 알 수 있다. 안식일은 매주 금요일 해질 무렵부터 다름 날 해질 무렵까지인데, 이 기간 동안 외부에 여행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다. 유태교인이 아니더라도 외부에 나가 활동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밖에 나가봐야 택시든 버스든 모든 공공 교통 수단이 엄격히 정지되기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다. 물론 구멍가게에 속하는 아주 작은 상점을 비롯하여 모든 상점들도 그날만큼은 철시를 한다. 극장이나 박물관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니 나가고 싶다고 나가보아도 할 일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외지인의 시각에서 그런 것이지 결코 유태인들이 강압적으로 통제를 당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집 안에서 무엇을 할까. 텔레비전을 본다거나 라디오를 들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이날만큼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방송도 중단되기 때문이다. 다만 군 라디오 방송만이 흘러나와 그들이 처해 있는 전시 상태를 증명해줄 뿐이다. 그들은 안식일에 지켜야 할 율법을 한 점이라도 어김없이 지키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안식일이 되면 그들은 새벽부터 회당에 나가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린다. 정통파 유태인의 경우에는 전기 스위치에 손을 대지 않으며 전등이 켜져 있어도 절대로 끄지 않는다. 심지어는 캄캄한 밤이 되어도 불을 켜지 않는다. 그리고 전화를 걸거나 받지도 않는다. 회당이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간다. 몸과 마음을 쉬고 노비나 짐승까지 쉬게 하되, 세속된 생각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안식일은 여호와 날이라 하여 인간의 육체적인 안식을 취하는 한편 여호와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충정을 표한다. 하루 종일 여호와의 뜻만 생각하며 지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추호도 세상 사업에 관하여 이야기하거나 친구들과 놀러다니는 등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생각만 해도 안식일을 범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들의 신앙 태도이다.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며 거룩하게 지내는 것이 이 날에 할 일인 것이다. 이렇게 신앙심이 강하면서도 여자에게는 많은 차별을 두고 있는 유태인이 어머니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 것은 아마도 모세의 어머니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유태인들이 애굽의 노예로 있을 때였다. 애굽왕은 유태인이 사내 아이를 낳으면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사내 아이를 낳은 한 여인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 아이를 밀랍으로 방수한 바구니에 담아 강물로 띄워 보냈다. 그 후, 아이는 애굽 바로 왕조의 공주에게 발견되어 애굽왕가의 외손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왕궁 내에서는 젖을 구할 수가 없자 왕실에서는 급하게 유모를 구하게 된다. 그러자 숨어서 그때까지 지켜보던 아이의 누이가 어머니를 유모로 추천, 아이의 생모가 왕궁에 들어가 아이에게 유태인의 정신을 심어주며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내 끝내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만들었다. 그가 바로 모세였다. 어느 날, 어느 사회, 어느 가정을 막론하고 여성의 역할은 그 사회, 그 민족을 어려움에서 일으키고 부흥시키며, 때로는 쇠망케 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어 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덴마크 민족이 농촌 부흥 운동을 시작할 때 여성들이 나서서 소금 역할을 하여 사회가 개혁되었고, 패전 후의 독일이 부흥할 때도 그러했으며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과 나라의 번영에도 역시 여성들의 의지와 꾸준한 노력, 그리고 헌신적인 사회 봉사가 획기적인 영향을 주어왔다. 거기에 유태인 여성들에게는 다른 나라 여성들보다 부여받은 의무이자 권리가 하나 더 부여되어 왔다. 그것은 아이들에 대한 교육이다. 특히 유태인들의 종교 교육은 반드시 어머니인 여성들에 의하여 전수되어 왔다. 그 어머니들은 무슨 명절 때 뿐만 아니라, 식탁에서나 잠자리, 아이의 귓가에서도 그들의 선민 의식과 고난사, 그리고 그들의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한 종교 교육은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의식에 심어져, 고난을 피래 세계 도처로 흩어져 생활활 때에도 결코 변질되지 않을 만큼의 굳건한 전통 문화와 사회 윤리로 가꿔져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단순한 신앙에 머무르는 종교 교육에 국한됐던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종교를 가르치면서 아이들에게 장차 창의력으로 나타날 신화적 상상력을 심어주었고, 숱한 지혜들을 그 속에서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들의 어머니와 우리의 어머니는 참으로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많다. 교육에 대한 열정은 두 나라 어머니 모두, 다른 나라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열성적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교육의 목표에 있다. 그들의 교육 목표는 인간됨을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공부 못하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해 주지만 거짓말하거나 비겁한 행동을 하는 것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우리의 교육 목표도 물론 전인 교육에 있다. 그러나 다만 실제 상황의 목표는 이와 거리가 멀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머니는 아이의 성격이 조금 잘못되어 있다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몇 점을 맞고 몇 등을 했는가에 더 관심을 갖는다. 또 다른 점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이다. 신앙 때문일까. 그들은 아이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 반드시 솔선수범을 한다. 부지런하라고 말하기 전에 스스로가 먼저 일어나 청소를 한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거짓말하는 법이 없다.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아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준다. 받기 싫은 전화가 왔다. 아니면 샤워중이라 받을 수가 없다. 이때 우리의 어머니는 전화를 받으려는 아이에게 무어라고 말할까. "엄마 찾는 전화면 없다고 그래라." 아이는 영문도 모르면서 무조건 그렇게 전한다. "여보세요, 아빠야? 엄마? 엄마 지금 안 계시는데요. ... 잘 모르겠어요. ...예, 아빠. 일찍 들어오세요." 아이는 어리둥절한 채, 전화를 끊고 어머니는 전화에 관심도 없는 듯 머리의 물기만 털어낸다. 잠시 후에 남편이 허겁지겁 들어오며 아내를 찾는다. "어머니, 아직도 안 들어오셨니?" "엄마요? 방에 계시는데요." 남편이 방으로 뛰어들어가자 곧이어 큰소리가 흘러나온다. "도대체 어딜 갔었어?" "가긴 어딜 갔었다고 그래요?" "한 시간쯤 전에 전화를 했었잖아. 애가 어디 나갔다고 그러던데 무슨 거짓말이야." "당신도 참, 샤워 좀 하느라 없다고 하란 것을 가지고 뭘 그러세요." "거짓말을 할 걸 해야지. 아이한테 한번 물어볼까?" "아, 그러세요." "아까 너 어머니 집에 계셨다는데 왜 거짓말 했니?" "거짓말 안 했어요. 엄마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런 건데...." 아이는 졸지에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아 기분이 상했는지 뾰로통한 표정이다. "그럼, 엄마가 시켰다는 거야?" "예." "애한테 시킬 걸 시켜야지. 벌써부터 거짓말하는 법부터 가르쳐?" 아무것도 아닌 일에 핀잔을 들은 아내가 이제는 아이에게 꾸중을 하기 시작한다. "너는 뭐가 되려고 그렇게 눈치가 없니? 아빠였으면 엄마 샤워한다고 하고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를 하시라고 해야 할거 아냐? 얘가 누굴 닮아서 이리 맹할까?" 우리의 어머니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이렇게 하나 둘 거짓말을 배우면서 커갈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행동을 모방하면서 자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태인 어머니는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아이에게 얘기할까. 그들은 사실대로 얘기한다. "엄마가 지금 샤워 중이니까 조금 있다가 다시 걸라고 해라." 아이의 책임은 그만큼 단순해지고 쓸데없이 공범에 몰릴 이유도 없다. 아이가 '엄마는 거짓말하면서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는 거야.'하는 반항의 싹까지도 일찌감치 제거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이들은 부모를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이스라엘의 여성들에게는 아이를 키우는 일 이외에도 의무적인 일거리가 많다. 모든 여성들도 남자와 동일하게 군 복무를 마쳐야 하고 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의 여성이 직장을 나간다. 각계 각층의 직장, 단체의 여성 취업률이 70퍼센트를 넘고 있다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해 준다. 그 가운데 초등학교 교사들은 여성들이 98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으며 공무원, 경찰관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이 남성들의 수보다 더 많을 정도다. 오죽하면 직장 여성들 사이에서 '그래도 우리 직장에 남자 한둘은 있어야 분위기가 부드러워질 거 아냐.'하는 푸념 섞인 소리까지 나오겠는가. 그러면서도 그들은 아이들의 교육 문제에 결코 소홀함이 없는 것이다. 패전 후의 독일 여성들이 '독일의 부흥은 부엌에서부터'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검소한 생활과 근면한 성품을 조성하는 데 큰 몫을 하였듯이 이제 우리 여성들이 일선에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치맛바람으로 대표될 정도로 높은 우리의 교육열을 바람직하게 살려나가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내 자식만을 위한 그런 열정이 아닌 모두가 참되게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열정만이 우리의 교육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에 그들만의 종교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신화가 있고 전설이 있으며 설화가 있지 않은가. 죽은 조상 여행시켜 드리기 "아니, 어머님은 도착하실 시간도 지났는데, 왜 아직 안 오시는 거야... 애야, 할머니가 길을 잘 모를지도 모르니까, 큰 길까지 나가봐라." "여보, 준비는 다 된 거야?" "준비랄 게 뭐 있나요? 모처럼 연휴라고 해도 남들처럼 해외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겨우 설악산이나 가는데...." "이봐요, 어떻게 당신은 양심도 없어. 남들은 죽을 고생해 가며 고향 찾아 떠나는데... 당신은 남편 잘 만난지나 알라구." "그래도 조금 찔리기는 찔러요." "모처럼 떠나는 건데, 기분 구기지 말고 어서 준비나 서둘러. 어머니한테는 평상시에 잘 하면 되지 뭘 그러나." "참,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상도 해요. 평상시에는 나 몰라라 하다가도 명절 때만 되면 온통 난리 법석을 피우니." "엄마, 할머니 오셨어요." "아이구, 어머님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벌써부터 차가 막힐 텐데, 이거 큰일났네. 저기 어머니, 밥은 여기 밥통에 들어 있고, 찌개는 여기 있으니까, 때 거르지 마시고 잘 챙겨 드세요. 그리고 가스 잠그는 거 잊으시면 안돼요. 여보, 빨리 가요. 얘들아, 빨리 나와라." 언젠가부터 우리에게는 이상한 풍속도가 생겼다. 명절 때만 되면 길게 고향으로 이어지던 행렬들이 그 행태를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고향이 강원도 설악산이나 제주도로 바뀐 것도 아닐 텐데, 그쪽 방향으로 가는 도로가 가장 붐빈다. 비행기 예약도 일찌감치 끝난다. 더 웃지 못할 것은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서울에 있는 아들 집으로 올라와 간단하게 차례만 치른 다음에 아들 가족은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부모님이 대신 집을 보아주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는 거다. 어떤 사람들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위패까지 여행지로 모시고 가 차례를 지낸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인다. "아, 여행까지 시켜드리는데 더욱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 정성이 지극하다. 죽은 조상 여행까지 시켜줄 정도로 사려가 깊으니 표창까지 해야 마땅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웃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가슴이 아픈 일이다. 나는 본래 시골하고도 두메 산골 출신이어선지 모르지만, 어려서부터 사람이 있는 곳이 항상 좋았다. 그래서 명절에 먼 일가 친척들이 모이는 날이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 우리 부모님의 심경은 더더구나 말할 필요가 없다. 외지에 나가 있는 가족 중 한 명이라도 눈에 뜨이지 않으면 사립문이 닳도록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던 것이 우리네 부모가 아니었는가. 이것은 우리 가족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터이다. 좋은 게 좋다고 남들 모두 고향으로 향할 때, 거꾸로 부모님이 상경하는 모습도 일리는 있어 보인다. 물론 부모의 입장에서야 그러고 싶지 않겠지만, 애지중지 키워 놓은 자식이 행여 고생이라도 할까 하는 염려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편리함으로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많다. 그 첫 번째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망각이요, 그 두 번째가 공동체 문화의 상실이다. 예전 우리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신분을 속이기 위해 떳떳하지 못한 일들을 많이 행해 왔다. 열심히 돈을 벌어 양반이 되기 위한 문서를 사기도 하고 아예 본을 바꿔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한 천민 의식이 지금에 와서 힘들게 자라온 삶의 터전을 잊으려 하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과거를 잊는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오늘의 현실을 부정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오늘날의 변질되어 가는 우리 명절 풍속도를 보면서 자꾸만 이스라엘의 명절이 생각나는 것도 아마 잊지 않으려는 내 잠재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그들의 명절은 거의 종교와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그러한 명절들을 그들만의 유태력 날짜에 따라 행해 왔다. 우리가 오랫동안 사용했던 태음력과 마찬가지로 유태인들도 사용한다. 따라서 그들의 명절은 우리의 설날이나 추석처럼 태양력에 의하면 날짜가 일정치 않다. 그들의 모든 명절이나 기념일의 특징은 모두가 한결같이 온 가족이 모여 그들의 고난의 역사를 반추해 보며 경건하게 보낸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정원 초하루로부터 10일이 되는 날을 '염키풀'이라 하는데, 이 날은 속죄일로써 성경에 기록된 대로 스스로 지난 1년간의 잘못과 죄과를 참회하고 기도하며 경건하게 지내는 날이다. 모든 유태인들은 이 날을 맞으면 금식하고 금주할 뿐만 아니라 가죽띠나 가죽신도 신지 않고, 좋은 옷을 입지도 않는다. 물론, 여성들도 화장도 하지 않는다. 모두가 죄인이라는 의식 속에서 하루 종일 뉘우치며 지내는 것이다. 여기에 그들 민족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모습이 있다. 그것은 속죄를 하는 그들의 대상이다. 어느 민족이나 마찬가지로 그들도 첫번째의 속죄 대상을 하나님으로 한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는 순서로 본다면 그들의 첫번째 속죄 대상은 이웃에 있다. 먼저 이웃에 대한 속죄 행위를 하여 완전히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맺힌 것을 풀고, 용서를 해주고, 용서를 받아 화해하고 난 뒤에라야 하나님께 나가 용서를 빌 수 있는 것이다. 남은 어떻게 되더라도 나만 용서받고, 구원 받으면 된다는 생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날, 유태인들은 1년 동안의 모든 잘못을 뉘우치고 실제로 그렇게 행하여야만 한다. 도둑질한 것이 있으면 마땅히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을 찾을 수 없는 경우에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여 그 빚을 갚아야 한다. 특히 이 날은 성경 중에 요나서를 읽는데, 이는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나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니느웨 성으로 가는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마음 속으로 재삼 음미하며 지내려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973년의 10월 전쟁을 '염키풀'전쟁이라고 부르는 것도 전쟁이 바로 이날 일어났기 때문이다. 유태인들에게 무엇보다 의미있고 큰 절기는 바로 '페싹'이라고 부르는 유월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날은 애굽의 긴 노예 생활로부터 모세에 이끌려 가나안으로 향한 날을 기념한 것으로 유태력으로 일곱 번째 달 14일 저녁부터 21일 저녁까지의 일 주일간을 일컫는 데에는 누룩 없는 빵을 먹는데 요즘에는 '맛솟'이라는 빵을 먹는다. 이 빵은 비스켓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마치 골이 파인 슬레이트처럼 기계로 눌러 만든 빵이다. 유월절 기간에는 식빵을 먹으려 해도 살 수가 없다. 팔다 남은 빵까지도 판매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밀가루 식품 중 누룩이 들어간 것도 제조나 판매가 전혀 불가능하다. 이날 농촌에서는 대대적인 행사를 하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회식을 하고 우리의 차례와 비슷한 '세데르'에 참여한다. 나도 몇 차례 이 '페싹' 행사에 참석해 본 적이 있다. 방향을 알 수 없는 허허벌판, 희망이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황무지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광야의 생활을 했던 그들,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 출애굽시키신 하나님의 능력, 이러한 것들을 상기하면서 '페싹'에 참가하노라면 출애굽 때 살아서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의 자녀들에게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신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유월절 행사 중에 가장 흥미로운 것은 사마리탄 종족의 유월절 행사이다. 이들은 현재 이스라엘의 '나불루스'라는 곳에 거주하고 있는데 이곳은 주로 아랍인들이 사는 사마리아 지방의 한 마을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그들만의 독특하고도 전통적인 유월절 행사를 거행해 왔는데 남자들은 모두 흰 두루마기를 입고, 야곱 때부터 축복의 산으로 전해 내려오는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가 많은 양을 잡아 제사를 올리며 그 양의 피를 모든 사마리탄 종족의 흰 두루마기에 묻혀 온통 피투성이가 된 두루마기를 입은 채로 기도를 한다. 그리고 성경을 읽은 다음 번제를 하는 이들은 이 의식이 그들을 성화시키며 이를 통해 그들이 속죄함을 받는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구약시대부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의식인데 오늘날에는 사마리탄 족만이 행하고 있다. 성지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특별한 행사는 기독교인들이 벌이는 수난 주간 행사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길을 따라 종려나무 가지를 하나씩 들고 찬송을 부르며 예루살렘 성문까지 행진한다. 그리고 그들은 감람산 기슭에 있는 동산에서 기도를 하고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던 골고다 언덕까지 여러 사람이 십자가를 메고 행진한다. 이 행사에는 스스로 고행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겠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어떤 사람들은 길 위를, 무릎이 까져 피까지 흘려가면서 기어서 가기도 한다. 이렇게 그들은 예수님의 고통을 자신들의 육체의 고통을 통해 조금이나마 느껴보자는 신앙적인 행위에서 그런 행위를 기쁘게 감수하고 있다. 언덕까지 올라간 그들의 표정이 한결같이 엄숙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 뜻을 마음 속 깊이 새기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독립 기념일에는 그들의 뼈아픈 과거를 되새기며 환희의 춤을 추고, 전쟁 추념일에는 하나같이 그들의 조국과 민족을 위해 숨져간 넋들을 기리며 그들은 자신들의 오늘이 있기까지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한 몸부림은 평상시, 어느 곳, 어느 때에도 변함이 없다. "엄마, 나 이런 거 먹기 싫어, 다른 거 줘." "그래, 매일 같은 거 먹기 힘들지?" "응, 맛있는 걸로 주세요." "그것도 좋지만, 엄마가 얘기 하나 해줄게. 들어보련. ...옛날에 애굽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살고 있었어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힘들게 일만 해야 했지요. 그런데 거기에는 모세라는 훌륭한 한 분이 계셨었어요. 어느 날 모세는 고난의 땅을 피해 사람들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떠나게 되었지요. 그러나 가는 도중에 먹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요. 그래서 쓴 나물을 뜯어 먹으며 겨우 주린 배를 채우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많은 메추라기 고기를 주신 거예요. 사람들은 베풀어주신 은혜에 너무나 감사하며 메추라기 고기를 맛있게 먹었지요. 그런데 한 사람만은 메추라기 고기가 맛이 없다고 먹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힘을 내어 맛있는 것이 많이 있는 곳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어요. 결국은 아름다운 땅에 도착하였지요. 그런데 한 사람만은 끝내 보이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겠니?" "응, 힘이 없어서 쓰러졌어요." "그래, 그러다가 죽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맛있는 걸 많이 많이 먹었을 거예요." "그렇지? 맛이 없다고 먹지 않으면, 나중에 맛있는 게 있어도 못 먹는 거예요. 알았지? ...그런데 그 모세가 누군지 아니?" 아이들을 유적지나 전적지에 데리고 다니면서, 그리고 아이들이 잠든 머리맡에서도,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도 그들은 이러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명절이 되면 온 가족이 모여 함께 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송편을 빚고 윷놀이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아이들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작게는 가족 공동체로서, 크게는 민족 공동체로서 나를 확인시켜 주는 작업이기도 하였다. 편리하다는 이유로 나와 우리를 상실해 가는 명절의 풍속도가 더없이 쓸쓸하게만 느껴진다. 용돈도 주지 않으려면 무엇하러 낳았어 요즘, 교육 평가 제도의 변화로 여기저기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어느 공연장은 비철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넘쳐난다고 야단이고, 또 어떤 박물관에는 언제부터 그렇게 우리 역사에 관심들이 많았는지 발디딜 틈도 없다고 한다. 심지어는 입장권을 미쳐 구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다가는 뒤돌아가는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객들이 대부분 청소년층이라는 데 눈을 돌려볼 필요가 없다. 정말 자발적으로, 아니면 부모의 강제에 의해서라도 아이들이 공부라는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어 문화적 향유를 누린다면 그것은 방법이야 어찌됐든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공연장에 들른 어떤 아이들은 아예 공연은 관람할 생각도 하지 않고, 공연 티켓과 팜플렛만을 주워들고 쏜살같이 빠져나가는가 하면, 어떤 아이들은 입장권을 미처 구하지 못했는지 보고 나온 사람들이 바닥에 흘린 티켓까지 다투듯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증거물이 있어야 학교 과제물로 제출해 평가에서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해도해도 너무 지나치다는 느낌이 떨쳐버릴 수가 없다. 새로 개혁된 교육 평가 제도에는 사회 봉사 활동이나 문화적 취미 활동을 반드시 학생 평가에 반영하게 되어 있다. 그것이 목적하는 바는 물론 전인 교육에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지나치게 입시 교육에만 매달려 인성이 거칠어지고 결과적으로는 심각한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다는 비판을 수용한 터였다. 그러나 목적한 바와는 다르게 그 행태가 전개되어 가고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아이들만 더욱 고생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보기도, 듣기도 싫은 신석기 시대 유물이나 판소리를 전혀 이해도 하지 못하면서 억지로 감상해야 하고, 때로는 보지도 않을 공연 티켓을 구입하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한다. 어떤 집은 심지어 부모까지 동원되기도 한다. 봉사 활동으로 초점을 맞추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봉사 활동을 할 수 있는 기관을 찾아봐야 기껏 양로원이나 고아원 정도이다. 그것도 부모가 그래도 좋은 양식을 갖고 있어야만 봉사가 가능하다. 웬만한 아이들은 말도 꺼내기 전에 욕부터 얻어먹기 십상이다. "봉사는 무슨 봉사? 잔소리 말고 너는 가서 공부나 해." "그러면 성적이 나빠지는데...." "그런 건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서 공부나 해." 그러면서 어머니는 이곳 저곳에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혜경이니? 난데 글쎄, 이게 무슨 일이라니? 가뜩이나 아이 성적이 안 올라 죽겠는데 무슨 봉사 활동을 다 시키라고 그러는 거니? 그래서 그러는데 너, 예전에 양로원에서 자원 봉사한 적 있지? 거기에서 도장 하나만 찍어다 주지 않겠니? ...그래, 내가 오죽하면 그런 부탁을 다 하겠니? ...그래, 그래, 고맙다야. 한번 놀러와라. 그래." 그리하여 아이는 하지도 않은 봉사 활동 확인서를 제출하고 평가를 받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교육이 학교와 가정, 그리고 사회가 원활하게 연결되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다. 이스라엘의 초등교육 과정은 우리의 중학교를 합친 9년제로 되어 있는데 이들은 고학년이 되면 방학을 이용해 반드시 사회 실습을 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아이들은 대부분 담임 선생님의 관장 아래 인근에 있는 농촌 키부츠에서 집단으로 자원봉사로 일을 하거나 공장 일꾼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회 실습은 우리와는 다르다. 물론 봉사라는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철저한 고용인으로서 관리되며 정규 노동자보다 약간 적은 급료도 받는다. 그들은 그것을 결코 학교 교육과 무관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교 교육의 연장으로 생각한다. 나아가서는 여러 일들을 거쳐 자기의 적성에 알맞는 미래까지도 설계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사회 실습을 통해 여러 경험을 쌓은 아이들은 서로 다른 직업들을 이해하게 되고, 사회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갖게 된다. 그러한 애정을 바탕으로 아이들은 진정한 봉사 활동으로 연결하는 경우도 많다. 한 번은 이스라엘의 그런 아이들 때문에 무안을 당한 적도 있다. 어느 날이었다. 늦은 시간에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와르르 내려가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아이들이 안보일 때까지 바라보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한 일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 이어졌다. 너무 궁금한 나머지 하루는 한 아이를 붙잡고 물었다. "너희들은 매일 무엇을 하는데 그렇게 몰려다니는 거니?" 그러자, 아이는 대수롭지 않게 별거 아니라고만 얼버무리고 앞서 달리는 패들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몇 달, 마침내 아이들의 본색이 드러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전거 짐받이에 무엇인가를 수북이 쌓아올리고는 힘겹게 페달을 밟고 있었다. 틀림없이 도둑일 터였다. "이 놈들, 잘 만났다. 수상하다 싶었더니, 도둑질을 해!"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에 놀랐는지 앞서 오던 아이가 짐의 무게를 못 이기고 옆으로 나뒹굴었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아이들도 연달아 쓰러졌다. "아이 참, 아저씨는 또 왜 그러세요." 간신히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며 한 아이가 투덜거렸다. "이 놈아, 몰라서 묻는 거냐? 거기 싣고 있는 게 다 뭐야." 자전거에는 온갖 푸성귀들이 실려 있었다. 아이들은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서로의 눈치만 보면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도 이 녀석들이 대답을 안해? 너희들, 그거 훔친 거지, 그렇지?" 한참을 다그치자 도둑으로 몰린 것이 억울한지 한 아이가 불평스레 입을 열었다. "아니예요. 우리는 그저...." 알고 보니 이런 얘기였다. 얼마 전에 오랜 동안 외국에서 생활하다가 귀국한 사람이 동네로 이사를 왔는데, 적응이 안 되는지 생활이 궁핍하게 보여 그들을 돕기로 하고, 도와줄 것이 없을까 하다가 생각해낸 것이 노는 땅에 농사를 짓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맞는 친구끼리 매일 번갈아 가며 조를 나누어 푸성귀를 길러 오늘 첫 수확을 했다는 거였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그 순진한 아이들을 잠시나마 도둑으로 오인한 미안함과 기특함에 나도 모르게 너털웃음이 터져나왔다. "이 녀석들아, 그러면 그렇다고 진작 말을 했어야지. 너희들, 몇 학년이냐?" "8학년이요." "그럼, 거기 있는 거, 두 짐만 내려놓고 가거라." 그러자, 이제는 아이들이 오히려 날 강도 보듯 바라보았다. "야, 이 녀석들아, 그럼 그 푸성귀를 팔지 않고 다 집에다 갔다 줄 거냐?" 그러면서 푸성귀의 가격보다 상당한 가격의 돈을 지불하자, 아이들은 안도하며 함박 웃음을 피워 보였다. "아! 알았어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일을 할 때는 괜히 오해받는 일이 없게 알리고 하도록 해라." "아저씨는 참,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알지 못하도록 하랬잖아요." 아이들이 짐을 내려놓고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한 마디 던진 말이 다시 내 가슴을 찔러왔다. 귀국 후에도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사회 실습을 설명해 주며 한동안 그 아이들 생각을 하곤 했던 기억이 있다. 한 번은 제자들에게 체험담을 들려주고 연구실에서 그 아이들을 생각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찾아왔다. 신입생인 듯, 단발머리를 한 여학생이었다. 그 학생은 들어오자마자 숨쉴 겨를도 없이 말했다. "선생님, 저도 그런 실습을 해보고 싶은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그래, 그런데 왜 하고 싶니?" 부유한 집의 외동딸로 태어난 그 학생은 지금껏 남을 위해 일해보기는커녕, 손에 물 한 번 묻혀 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그래서 그러는데,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에 감명도 받았고, 또 늘 다른 삶을 한 번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YWCA를 찾아가 보려무나."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렇게 학생을 돌려 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 학생이 다시 찾아왔다. "갔던 일은 잘 됐니?" "예, 대학교에 다닌다고 하면 잘 안 해줄 것 같아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집에서 논다고 했더니 가정부 자리를 알선해 주었어요. 그래서 내일부터 일을 하기로 했어요." "그래, 자신은 있는 거니?" "사람이 못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일을 해서 돈을 번다는 생각은 하지 말고 새로운 삶을 경험한다는 생각으로 일하면 좋은 열매가 있을 거야." 그렇게 떠난 후, 한 달이 지나자 그 학생이 다시 찾아왔다. 얼굴은 좀 핼쑥해 보였지만 눈빛만은 초롱한 것이 체험은 제대로 하고 온 모습이었다. "소감이 어떤가?" "쑥스러워도 솔직히 말해야 되겠지요. 처음에는 제 인격은 안중에도 없고, 무슨 물건 대하듯 하는데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뛰쳐나오고 싶었지만 꾹 참고 기다렸는데 글쎄, 생각이 바뀌더라구요. 내가 그동안, 다른 사람에게 했던 말이나 행동이 상대방에게 잘못 전달된 게 없는지... 특히, 저희 집 가정부가 가장 먼저 생각났어요. 앞으로 잘 해주어야겠다는...." 그 학생은 그 짧은 한 달 동안에 인생을 배운 것이다. 그 후 그 학생은 다시 나에게 뜻밖의 부탁을 해왔다. 외딴섬 사람들에게 봉사를 하고 싶다는 거였다. 만류도 해보았지만 그녀의 굳은 결심을 만류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교회 관계자를 통하여 가까스로 목포 앞바다의 작은 섬에 소개시켜 주었다. 실제로 그녀는 그 섬으로 떠났다. 그리고는 조그마한 개척 교회에 들어가 가난한 아이들을 세수도 시키고 율동도 가르치며 한 해 여름을 보냈다. 그 학생의 결심도 대단했지만 그 학생을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 준 그 학생의 부모가 더 위대하게 생각되었던 것은 왜였을까. 그 후 그 학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의 주례하에 결혼을 하고 부부 동반하여 이스라엘에 유학을 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부모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니 십중팔구가 그럴 것이다. "어휴, 기껏 대학까지 가르쳤더니 고작 그딴 짓이야." "잘먹고 배부르니까 쓸데없는 짓들 다 하는구먼...." 그러나 이러한 말은 삶의 길에서 중요한 의미를 옳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가치관이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돈을 벌어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을 가장 행복한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예술에 심취되어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라 말하고, 어떤 사람은 희생과 봉사의 생활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것을 하나의 잣대로만 기준하여 누구는 행복하게 잘사네, 누구는 불행하네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남에게만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자신의 아이들에게까지 이어져 무조건 공부 잘하는 아이만을 키우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아무튼, 사회 실습, 사회 봉사 활동이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교 교육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아야 할 문제이다. 내 자식은 공부해야 하는데, 하는 마음으로 거짓 봉사 활동을 하게 할 바에야 차라리 자식을 위해서는 시키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전인 교육이라는 큰 틀 속에서 그리고 미래의 사회 생활에 적응하는 과정으로서 사회 봉사 활동은 실행되어야 한다. "용돈도 주지 않으려면 무엇하러 낳았어." 다시는 다 큰 자식한테 이러한 말을 들어서는 안될 일이다. 그것은 오직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손에 달려 있다. 나는 형이 아니라구요 어느 넉넉하지 못한 시골 집안에 쌍둥이가 태어났다.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였다. 이란성 쌍둥이였던 것이다. 없는 상황 속에서도 어머니는 온갖 정성으로 사내 아이를 키운다. 그러나 여자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사내 아이의 기를 빼앗아 먹은 년이라는 심한 욕설과 함께 온갖 천대를 받으며 자란다. 그러나 그런 구박도 가슴에만 수북이 쌓아놓을 뿐, 여자 아이는 온갖 학대를 견디어 내며 묵묵히 궂은 일을 도맡아 한다. 사내 아이가 집안의 기대 속에 법학 대학에 다닐 때에도 여자 아이는 학교도 못 들어간 채, 구박만 받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 아이의 쌓였던 분노가 폭발한다. 그리고 여자 아이는 서울로 향한다. 빈 몸뚱이만 달랑 가지고 떠난 여자 아이의 고생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거기에다 몹쓸 병까지 얻게 된다. 그러나 갖은 역경을 딛고 일어나 여자 아이는 사회에서 인정받는 작가로 성공한다. 그리고 변호사인 남편을 만나 행복한 삶을 누린다. 그러나 사내 아이는 집안의 기대와는 달리 번번히 고시에 실패하여 평범한 은행원으로서 사회 활동을 시작한다. 이것은 당시 장안의 화제였던 텔레비전 드라마의 일부분이다. 물론, 결론의 매체의 특성상 여자 아이가 어머니와 화해하는 해피 엔딩으로 끝을 맺었지만, 이 드라마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너무도 자기 자신의 어릴 적과 흡사하다며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하면서 드라마의 일부로 치부했을 수도 있다. 나는 그 드라마를 보면서 나의 고학 시절을 많이 회상했다. 얼마나 힘든 생활이었던가. 그렇기에 그 여자 아이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의 가정 환경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예로부터 남녀 차별이 심했던 우리네 가정에서 이러한 상황은 실제로 비일비재했던 일이다. 남자 형제를 위하여 학업을 포기한 채, 일찌감치 직장 생활에 뛰어들어 오빠와 동생들의 학비를 말없이 대주던 우리의 딸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래도 우리의 딸들은 묵묵히 그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였었다. 예전에는 그러한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오히려 하나의 미덕으로까지 여겨지지 않았던가.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여성들의 의식이 그만큼 높아진 점도 잇지만 사회가 여성들을 강력히 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차별도 많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알게 모르게 그러한 차별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다만 그것이 조금 성격을 달리했다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측면의 차별이 더 강했다면, 지금은 정신적, 습관적인 차별이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계집애가 그건 알아서 뭐해." "계집애가 건방지게 그게 뭐야." "계집애가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아니, 계집애가 배워서 어디다 써. 잔소리 말고 얌전히 집구석에 틀어박혀 살림이나 하다 시집이나 가." 아마 오늘날을 살아가는 여성들이 한 번쯤은 듣고 자란 말일 것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어떤 사람들은 내심 반발도 많이 하여 여성 운동쪽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도 있었을 테지만,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말에 길들여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여자가 뭐 별수 있나." "에이 난 여잔데 뭐...." 주위를 둘러보면 스스로 이렇게 체념하는 경우도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차별은 여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속담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으랴.'하는 말이 있지만, 실제 상황을 살펴보면, 그것이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 것은 왜일까. 이런 형제간의 차별을 영화 소재로 한 것들이 많이 있는 것도, 의외로 그러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들과 딸 하나씩을 둔 집이 있었다. 아버지는 무슨 장사를 한다고 외지를 떠돌아 아이들은 어머니의 손에 의해 길러졌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딸만을 편애했다. 딸에게는 땅을 팔아서라도 좋은 옷을 입히고 학교도 일찍부터 서울로 보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아예 딸에게 눌러 있기로 했는지 동생이야 어찌됐든 나몰라라 하고는 땅을 팔아 올려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맡게 된 할머니도 이미 칠순을 넘겨 아이를 감당하기 힘든 몸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동생은 공부를 잘했음에도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가 없었다. 가금씩 들르는 그의 아버지도 그를 구박만 할 뿐 어떠한 힘이 되어 주지 못했다. 근근히 농사를 짓던 동생은 나이 스무 살이 다 되어, 동네 사람들의 주선으로 직업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때부터 아이가 돌변하기 시작했다. 말이 없고 성실했던 아이가 점차 술과 여자를 탐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술에 취해 돌아와 할머니에게 행패를 부리는 일도 잦아졌다. 동네 사람들이 아무리 달래고 꾸짖어도 한번 변한 그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딸과 함께 지내던 어머니가 딸의 결혼과 함께 시골로 내려온 것이다. 아들의 행패는 더욱 심해졌다. 급기야 교도소를 전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일이 벌어졌다. 교도소에서 나와 술집 여자와 동거를 하던 아들이 결혼한 누나가 시골에 내려와 있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동생은 술에 만취되어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집 담장에 세워져 있던 도끼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미친듯이 소리쳤다. "다, 나와! 다 나오란 말이야. 내 인생을 망친 년들은 다 나오란 말야!" 동생은 도끼를 휘두르며 미쳐 날뛰었다. 다행히 큰 사고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로 어머니와 딸은 영영 고향을 등져야 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 긴 목숨을 스스로 끊고 말았다. 사람들은 남편의 외도로 어머니가 딸에게 편향된 애정을 보이게 한 이유라고들 했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됐든 어머니의 잘못된 사랑이 아이의 인생을 깊은 수렁에 떨어뜨린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과장된 얘기로 들릴 것이다. 믿지 않으려 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을 반성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인륜적인 사건의 내막을 살펴보면 차별적인 자식 사랑이 그 원인인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어머니들이 모이면 심심치 않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의 아이를 편애하고 있는 것 같다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들 한다. 고치려고 해도 잘 안 된다고 한다. 그래도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는 어머니는 좀 나은 편인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자신이 하는 행동을 느끼지 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형제의 개성을 비교하면 모두 살릴 수 있지만, 형제의 머리를 비교하면 모두 죽인다.' 이 말은 탈무드에 나오는 말이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코 형제를 차별하거나 비교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교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물론, 아이들의 터울이 많은 것도 하나의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그것보다는 서로 비교함으로써 아이들에게 끼치는 악영향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남들과 비교함으로써 아이들에게 충격을 주어 바람직하게 성장하리라고 믿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와 반대로 흐르는 경우가 훨씬 많다. 오히려 기대와 달리 열등감을 갖게 되는 아이는 모든 일에 의욕을 보이지 않게 된다. 자칫 이런 아이들 중에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우울증에 시달리다 끝내 죽음에 이르는 아이도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이들에게는 누구나 타고난 재능이 있다. 그러한 재능을 키워주는 것이 부모가 할 일이다. 결코 남과 비교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유태인 어머니들은 항상, 남보다 뛰어나려 하지 말고 남과 다르게 되라고 아이들에게 주문한다. 사실, 남과 다른 분야를 잘한다는 것은 그 분야에서 만큼은 최고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의 어머니들은 학과 성적이라는 획일적인 분야에서 뛰어남만을 원한다. 그리하여 아이가 남보다 잘하는 분야가 있음에도 공부를 못하여 우둔한 아이도 단정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여덟 살 때까지 열등아였던 아인슈타인은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기 좋아하는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놀림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열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이미 뉴턴이나 스피노자, 데카르트를 독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당시의 자신이 아주 강한 지식욕을 가지고 있었다고 술회했는데, 아무도 이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다른 선생님도 초등학교 때의 선생님처럼 다른 아이들과 같이 되기를 강요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오늘날의 아인슈타인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유태인의 어머니들은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무엇을 잘하는가 늘 찾으려 하지 않고 무엇이 다른가에 찾아내어 그것을 키워주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스라엘의 교육법은 시간이 많이 걸려 조급한 우리의 어머니들에게는 맞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탈무드'에 나오는 그들의 두 가지 학습법을 보면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 두 사람의 여행자가 있었다. 둘은 제대로 끼니를 먹지 못하여 몹시 지친 상태로 길을 가다가 마침내 집 하나를 발견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실망해 있던 두 사람은 천장을 바라보고는 비로소 밝은 미소를 지었다. 천장에는 과일이 가득 들어 있는 바구니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뻗쳐도 높이 매달린 바구니에는 닿을 수가 없었다. 얼마 동안을 그렇게 노력하다가 마침내 한 사람은 화를 벌컥 내며 집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먹을 것을 놓고도 먹지 못하는 심정이야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한 사람은 달랐다. 몸을 움직이지 못할 만큼 지치고 배도 고팠지만 그는 생각에 열중했다. '그래, 저렇게 높은 곳에 걸려 있지만, 과일 바구니가 혼자 올라가 걸려 있는 것이 아닌 바에야 누군가가 매달아 놓았기 때문에 있는 것 아니겠어?'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그 사람은 주린 몸을 끌고 집 안팎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사다리를 찾아낼 수가 있었다. 그 사람은 사다리를 옮겨 기대어 놓고는 바구니를 내려 맛있는 과일로 굶주린 배를 실컷 채울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교육은 이렇게 아무리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믿음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이들의 지적 성장이 아무리 늦더라도 조급해 하지 않는다. 오직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아이들을 관찰한다. 우리와는 달리 그들은 아이의 잘난 점만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점까지도 아주 유심히 관찰한다. 결국 그들은 아무리 손에 닿지 않는 과일이라도 생각을 하고 관찰을 하여 자신의 입 속에 넣는 지혜로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네 형을 봐, 장학금까지 받는 형이 부럽지도 않니? 넌 도대체가 언제 철이 들래?" "나는 형이 아니라구요, 왜 매일 얘기해도 몰라주는 거예요? 형은 형대로 공부를 잘하는 것이고, 나는 또 나대로 잘 하는 것이 있잖아요." "뭐야? 그러니까 끝까지 그 놈의 그림을 그리겠다는 거냐? 날마다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까 공부가 그 모양이지. 너는 도대체가 네 형이 부럽지도 않니?" "엄마, 이제 제발 나를 인정해 주시거나, 아니면 제발이지 내버려 두세요. 나는 다만 나일 뿐이라구요." 지금도 어디선가 이러한 대화가 들려오는 듯하다. 몇 번을 강조하지만, 남과 비교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교육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차분히 아이의 개성과 장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키워주는 것이 바람직한 교육인 것이다.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쉽게 손에 닿지 않는다고 포기하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참된 교육이라는 과일을 잡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야 한다. 급하게 먹으면 체하기 마련이니까. 그렇지만, 반드시 애는 낳아야 한단다 "엄마, 아이는 어떻게 만들어져?" "어디로 낳았어?" 우리 부모들이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장 난처하고 힘들어 하는 부분이 바로 이와 같이 시작되는 아이들의 성적 호기심에 대한 교육일 것이다. 유아에서부터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이 많이 있지만 막상 아이들의 물음에는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그래서 부모들은 대부분 대충 얼버무리기 일쑤다. "그건, 몰라도 돼. 네가 엄마처럼 크면 알 수 있는 거야."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단다." "배꼽으로 낳았단다." 하지만 이런 식의 대답은 오히려 아이들에게 궁금증만 더 불러 일으키게 마련이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이성에 대한 막연한 환상에 빠져들기 쉽다. 이스라엘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나는 그 나라의 청소년을 많이 접할 수가 있었다. 요즘의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다른 서구와 마찬가지로 남녀 관계가 무척 개방적이다. 그들은 18세만 되면 남녀 공히 군복무를 하는데 실제적인 모든 인생 공부는 군에서 마스터한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한다. 종교적이 아닌 젊은이들이 약혼 후, 곧장 동거 생활에 들어가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고, 서로 사랑한다는 확인만 하면 동거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이제는 처녀를 찾는 이들도 없고, 극히 종교적이 아닌 여자들 중에서는 처녀를 찾을 수도 없다고 한다. 이러한 그들의 풍속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대학 기숙사이다. 이스라엘의 대학 기숙사는 한 건물에 남자층과 여자층으로 층별 구분하여 함께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남녀가 방을 따로 쓰지만 일상생활은 마치 한 식구처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으나 그들은 부모건, 학교건 예사로 생각한다. 상당히 많은 학생들은 결혼하여 애까지 낳아 기르며 학교생활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성범죄나 미혼모 문제가 아주 미미한 것은 어려서부터 비롯되는 그들의 성교육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태민족에게는 일부일처제가 합법화되기 전까지 일부다처제가 용인되는 가부장적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그들의 옛 전통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테마니'라고 하는 예맨에서 이민온 유태인들인데, 이들의 초대를 한 번 받아 그 이민촌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5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 마을은 마치 우리의 농촌을 연상시킬 정도로 아늑했다. 커피나 홍차를 대접받는 가운데 절로 향수를 느끼기도 하였다. 단지 조금 이상한 게 있다면, 같은 형제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세 여자가 항상 그 집 주인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점이었다. 한 여자는 오십 세쯤으로 보이는 할머니 타입이었고, 또 한 여자는 사십여 세쯤 보이는 중년 부인, 그리고 다른 한 여자는 삼십여 세쯤 되어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그래서 턱수염을 곱게 기른 50대의 주인에게 살짝 말을 건넸다. "이렇게 친척들하고 같이 사시니 좋으시겠습니다." 그 주인은 내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는지 잠시 의아해 하다가 내가 고갯짓으로 그 여자들을 가리키자 이내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천만예요, 다 제 처입니다." "아니, 처라니요?" "예, 다른 사람들은 너댓 명씩 되는데, 저는 능력이 부족해서 겨우 셋뿐입니다." "아하!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유태인이 그럴 수 있습니까?" 내 말의 의도는 당연히 종교인이면 신성한 일부일처제의 결혼 풍속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대체 성경 어느 구석에 그런 구절이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 장가 세 번 가지 말라는 구절, 보신 적 있습니까? 구약 성경을 보세요. 모세나 야곱이나 아브라함이나 모두가 부인이 여럿 아닙니까." 그건 맞는 말이었다. 내 기억 어디에도 그런 구절은 없었다. 그래서 슬쩍 말을 바꾸어 물었다. "그럼, 아이들은 몇이나 두셨습니까." "아들 셋에, 딸이 여섯입니다." "어휴, 그럼 키우시기가 꽤 힘드시겠습니다. 저는 겨우 둘인 데도 애를 먹는데...."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아이를 낳았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하나님이 다 먹여주십니다.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를 보십시오. 어디, 굶어죽는 걸 보셨습니까. 다 그렇게 하나님이 먹여주시는 법입니다." 내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그들의 문화가 그러한데 달리 할 말은 없었다. 중동이나 다른 아랍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열대 건조 지역의 결혼 풍속도는 거의 비슷하다. 아마도 예전에는 상대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많았기 때문에 종족 보존의 차원에서도 일부 종교인을 제외한 모든 남성들이 당연히 처를 여럿 거느렸을 것이다. 그 처들은 서로 언니, 동생으로 호칭하고 있었는데, 첫째는 집안의 어른으로서 명예를 누리고, 둘째는 재정권을 쥐고 있으며, 셋째는 비교적 많은 밤을 남편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사이좋게 지내는 것 같으면서도 어떤 때는 마치 이스라엘의 국경처럼 긴장감이 고조되기도 한다고 그 집 주인은 귀띔했다. 같은 옷을 사다 주어도 색이 같으면 나이와 기호에 따라 달라야 하는데 어느 부인은 좋아하고 어느 부인은 싫어한다. 크고 작은 체격에 따른 각기 다른 색, 다른 것을 사다 보면 가격의 차이가 있어 누구에게는 더 좋은 것을 사주었다고 말썽이 일기 시작하여 곧 집안이 시끄러워진다. 같은 울타리 안에서 살다보니 사랑의 시기가 보통이 아니어서 한 부인에게 하룻밤만 더 자도 다른 부인들의 입이 뾰로통해진다는 것, 그래서 결국 그는 집을 세 채 사서 각각 다른 동네로 분가시키고 자기는 이집 저집 찾아 다니며 살려고 한다는데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아 고민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그는 많은 부인을 거느렸던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고 싶다고도 했다. 그러나 비교적 다른 가정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질서를 찾아 평화를 유지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남편의 건강과 경제력 그리고 통솔력에 좌우된다고 했다. 가정은 인류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의 사회다. 그리고 그것은 건전한 성을 바탕으로 한 결혼으로부터 시작된다. 성경에서도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최초의 가정으로, 결혼의 효시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음받은 배필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결혼의 목적은 사람이 홀로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남자를 돕는 배필자로서, 또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기 위해 하와를 지으셨다.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가정은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며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이 없는 사이였다. 하나님은 이 가정에서 세상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는데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계승되어온 권세인 것이다. 성경에서 결혼은 흔히 여인을 취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모든 결혼은 부모에 의해서 결정되었고 때로는 당사자들의 동의를 구하기도 했다. 구약에서도 연애 결혼은 부분적으로 있었는데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고,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했으며, 다윗 임금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했고, 르호보암과 압살롬의 딸 마아가 등이 그 예이다. 구약시대에는 또 친족 결혼이 유행했다. 아브라함이 그 이복 동생 사라와 결혼했고, 나홀은 형의 딸 밀가와 결혼했으며, 이삭은 고향 친족 가운데서 아내를 취했고, 야곱은 외삼촌의 딸과 결혼했다. 특히 레위족은 의무적으로 친족과 결혼했다. 여기에는 근친 상간의 예도 심심치 않게 있다. 또 하나님께서 최초의 가정을 창조하실 때에는 일부일처주의의 본을 보이셨지만 구약시대 상류 사회에서는 일부다처주의가 유행되기도 했다. 결혼 금지 대상도 있었는데 여기에는 제사장, 과부, 이혼 당한 여인 등이 속했다. 다른 신을 섬긴 이교도들과 결혼 또한 엄금되었다. 결혼에는 반드시 동정녀가 요구되었고 혼외 정사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해 돌로 쳐죽였으며, 동네 가운데서 강간을 당해도 여자가 소리질러 외치지 않으면 화간으로 취급되어 죽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구약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도 많이 바뀌었다. 그들의 혼인법에 의하면 결혼은 17세 이상이어야 가능하고 반드시 랍비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게 되어 있다. 만일 유태교식 결혼을 하고 싶지 않으면 이웃 나라에 가서 결혼식을 한 다음, 공관 확인을 받아오면 등록이 허락된다. 이혼한 후에는 다시 같은 사람과 재혼할 수 없게 되어 있는데, 형이 죽고 동생이 미혼인 경우 자동적으로 동생이 형의 부인과 결혼을 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서로 부부가 되고 싶지 않을 때에는 결혼식을 한 일이 없어도 이혼 수속을 밟아야 한다. 사촌 이상의 친족 결혼은 허락되지만 일부일처제가 채택되어 원칙적으로는 첩을 둘 수가 없다. 하지만 결혼 후 10년이 되어도 아이가 없으면 재판부의 허가를 얻어 이혼을 한 후 재혼을 하거나 본부인을 두고 첩을 얻을 수도 있다. 오늘날, 유태인의 결혼 절차는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 50년 전만 해도 예전의 우리나라처럼 양가 부모가 자녀의 동의 없이 결정했는데 '모악'이라는 결혼 지참금을 신랑이 신부댁에 지불해야 했다. 지금은 모악 제도도 찾아보기 힘들고 본인들이 스스로 결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종교적인, 특히 정통파 유태인들은 자기 딸이 반드시 유태인에게 시집가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 딸이 이교도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될 경우, 그날 그 집에서는 그 딸의 장례식을 치르며 온 식구가 슬퍼한다. 그 후에는 딸이 아무리 찾아와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르고 애원해도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말 그 딸이 죽은 것처럼 취급해 버리는 엄한 풍습이 아직까지도 있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속도는 그들의 인종만큼이나 다양하다. 아직도 일부다처제를 계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엄격한 그들의 율법대로 이른 나이에 부모의 뜻에 따라 짝을 맺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혼에 있어 자유롭다. 그만큼 이성 간의 관계도 자유롭다. 그들은 17세가 되면 부모에 의해 결혼하는 것과는 다르게 대개가 20대 후반의 나이에 자유 연애 결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의 개발은 물질 만능주의라는 비판의 도마 위에 오라 있으면서도 너무나 빨리 우리도 개방하고 있다. 이혼율과 미혼모의 수만으로도 가히 지금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서구에서는 이미 동거 부부가 반수를 넘어섰다는 보도도 심심치 않게 접할 수가 있다. 아이들은 부모의 몰이해와 무관심 속에 홀로 생각하고 상상한다. 그리고 그들은 컴퓨터, 비디오를 통해서 일그러진 성과 무차별적으로 접촉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그런 문제로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학교에서 포르노 그림을 보다가 선생님에게 들켜 꾸중을 듣고, 부모님을 학교로 모셔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차마 부모님에게 전할 수 없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을 말하기는 쉽다. 그것은 성교육의 부재로 인해 아이는 호기심을 발동하게 됐고, 부모님에게 말씀 못 드리게 된 것은 그 아이의 수치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 아이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차피 아이들은 그러한 성의 상품화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을 그러한 노출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이들 스스로 왜곡된 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성교육에 관한 한 아이들에게 절대로 호기심이나 쓸데없는 상상을 하지 않도록, 단호하게 가르친다. 모든 질문에는 짧고 간결하게 사실만으로 답한다. "만약,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육체 관계를 가져도 괜찮아. 하지만 매독이나 임질 같은 성병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넌 그런 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잘못 걸리면 코가 썩어 문드러지기도 하는 병이지." "그래, 네가 임신을 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 네 자유니까. 하지만 임신을 하면 반드시 애를 낳아야 한다. 그리고 그 아이를 업고 너는 학교에 가야 한단다." 딸아이가 임신을 하면, 쉬쉬하며 산부인과로 먼저 달려가는 우리네 부모들이 마땅히 귀기울여야 할 대화 방법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대학에는 한때 영어로, '하우스 마더'라는 아줌마가 기숙사 한 구석에 살고 있었다. 환경 미화원도 아니요, 식당일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학생이 실수하여 임신할 경우, 그 학생이 안심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돌보아 주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결혼할 수 없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이렇게 하여 입양 기관을 통하여 새부모를 만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전 성교육이지만, 이후에도 배려를 아끼지 않는 이스라엘의 풍토는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엄마, 나 얼마 주고 사왔어? 6.25 이후, 우리에게는 눈에 띄게 고아들이 사회 문제화 되어 왔다. 6.25는 되새기기만 해도 가슴 아픈 민족의 비극이다. 그로 인하여 부모 형제를 일시에 잃고 오갈 데 없게 된 고아들이 수도 없이 생겨났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전흔이 깨끗이 씻기운 오늘에도 고아들은 여전히 늘어만 가고 있다. 이는 불행히도 현대라는 문명의 그림자에 묻어 들어온 어두운 유행과 그릇된 성교육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혼모, 가정 불화, 생활고에 못 이긴 사람들이 아이들을 수없이 버리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의 고아 보호 시설은 이미 그 수용 인원을 넘어선지 오래고, 시설면에서도 열악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국내 입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대부분의 입양은 해외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마땅히 입양할 국내 가정이 없을 바에야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외국 가정에 입양되어 자라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그들이 살면서 겪어야 할 이방인으로서 눈총과 모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한 성격의 불완전성을 생각할 때, 해외 입양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에 거주할 때, 입학을 시키기 위해 딸아이를 데리고 예루살렘의 한 유태인 초등학교 예비 소집에 간 일이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처럼 보는 동양인이라선지 여기저기에서 우리를 쳐다보며 소근거리고 있었다. 검은 눈에 검은 머리를 한 우리가 신기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소란 속에서 불쑥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하나 더 있다, 하나 더 있어!" "그래, 정말 똑같이 생겼는데...." 무슨 말인가 하여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단발머리의 동양 아이가 있었다. 난 그 아이가 설마 한국에서 입양된 아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서는 원칙적으로 유태인이 아닌 외국인의 입양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막연히 일본 외교관의 딸인 줄만 알았던 그 아이는 이스라엘의 유태인 가정에 입양된 몇 안되는 한국의 고아 중 최초의 아이였다. 딸아이와는 한 학교에 다니고, 같은 반이어서 우리는 매우 가깝게 지낼 수가 있었다. 그 아이의 양아버지는 이스라엘의 유명한 초현실파 화가였는데 그가 프랑스에 머물 때 양녀로 입양해 기르게 되었다고 했다. 부유한 가정에 입양된 아이는 양부모가 자식이 없어서인지 무척 귀여움을 받으며 자라고 있었다. 50여 평 연립주택에서, 서구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높은 문화 생활 속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고 있었다. 주말이면 양부모의 고급 승용차를 타고 명승지를 찾아 다니며 여행을 하기도 하고, 피아노 등 특기 교육도 받으며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같은 동포라서 그럴까, 그런 모습을 보니 그래도 안도가 되었다. 이마도 그 아이에게는 고아원에 있을 때에 비하면 모든 것이 지상낙원이었을 것이다. 풍요로운 음식과 의복, 무엇보다도 그 아이에게는 양부모의 따스한 사랑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도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피부와 눈빛, 머리카락의 색깔이 다름으로 인하여 겪게 되는 슬픈 일들이 시도 때도 없이 닥치고 있는 것이다. 하루는 그런 아이를 바라보던 아이의 양아버지가 나에게 물었다. "한국 가정에서는 왜 입양을 꺼려 하는 겁니까." 그 목소리에는 분명히 원망과 분노가 스며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다. 그들은 타지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그들의 민족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그들이 완전히 정착할 때까지 한시도 관심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이 고아들을 무차별 해외 입양시키는 우리 입장을 이해할 리 없었다. "그동안은 너무 가난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리고 지금도 깊이 박혀 있는 뿌리 의식이 문제입니다." "뿌리 의식은 어느 민족에게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는 거지요. 오히려 바람직한 것 아닙니까?"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우리 민족은 혈연으로 맺어진 우리 가족만을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 핏줄이 아닌 아이를 입양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타지에 나와서까지 내 민족을 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은 내 얼굴에 침뱉기일 테니까. "차츰, 나아지겠지요." 이런 나의 어정쩡한 대답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계속 고개만 갸웃거리는 그 사람을 등 뒤로 하고 나는 서둘러 그 집을 나섰다. 그리고 나서 만난 것이 여호슈아라 불리는 여섯 살 된 사내아이였다. 그 아이는 유서 깊은 유태인의 조상 아브라함의 우물이 있는 브엘쉐바 시의 교외에서 포도원을 경영하는 농부의 집에 입양되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브엘쉐바의 벤구리온 대학교에서 초빙 교수로 재직하여 농촌 사회학과 한국학을 강의하고 있는데, 우연히 거리에서 동양 아이를 만나 반가워 말을 걸었는데 한국 아이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사람 사귀는 일이 참 편하다. 가족 중 한 명만 알고 있으면 아주 자연스럽게 그 가정을 방문할 수가 있는 점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 가족은 그 아이의 부모와 친하게 되었다. 그 아이의 본명은 유문수라고 하였다. 현재 가정은 부부가 다 이혼을 한 뒤, 재혼을 한 사이였다. 그리고 양편이 각각 아이들 둘씩을 데리고 만난 사이로 복합 가정이었다.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별로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 가정은 생활 수준과 교육 수준이 아주 높은 유복한 가정이었다. 아이는 피아니스트인, 이태리계 유태인 부인이 입양을 했다고 했다. 그렇게 하여 그 가족은 각자의 딸 둘씩과 양자 한 명으로 이루어진 대가족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유태인들에게 남아 선호 사상이 있다고 해도, 유럽에서 오랜동안 생활한 사람들이 또 한 명의 아이를 입양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물어본 적이 있다. "딸 넷만 해도 벅찰 텐데, 또 한 명을 입양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특별한 이유보다는 우리 가정이 충분히 키울 만한 여건이 되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민족은 수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을 떠올리면 어느 민족이든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을 쉽게 그냥 넘겨버리지는 않겠지요. 그것이 아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나의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그들은 그들의 과거를 잊지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핍박과 고통을 커다란 인간애로 승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말은 실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네 명의 딸 모두 여호슈아보다는 나이가 위인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그럼에도 이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는 구석 하나 없이 서로 경쟁하듯 귀여워해 주고, 사랑해 주고 있었다. 아이의 양부모는 아이에게 한글과 한국말을 가르치고 싶다며 한국 유학생을 소개시켜 달라고까지 하였다. 아이에게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가르쳐 한국의 얼을 넣어주어 아이가 성인이 된 뒤, 한국에서 살기를 원하면 한국으로 보내고 싶어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대학은 한국으로 유학을 보내겠다고도 했다. 차분히 그 아이의 장래 이야기를 하는 그 부모에게서 인간의 뜨거운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일찍이 유태인들은 독일군에게 대량 학살을 당할 때에도, 죽어가는 부모 대신 아이를 번갈아 물려받아 아이에게 유태인의 혼을 불어넣는 교육을 시켰다. 그러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지금도 그들에게는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당연히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자라야지요. 우리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수천 년을 떠돌던 그 고난의 시절...." 사막의 중심 도시 브엘쉐바에서 서북쪽으로 차를 몰고 20여분 가게 되면 오파킴이라는 소도시가 나타난다. 이 도시는 정착민들이 농촌으로 건설했으나 점차 도시화하여 시가지의 형태를 띠게 되어 지금은 전원 도시로 바뀐 마을이다. 그러므로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곳에도 한국 고아 남매가 입양되어 자라고 있었다. 심쇼니씨 댁 부인은 20여 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훌륭한 여자 선생님이었다. 남편은 지역 사회 개발 위원장을 오랫동안 역임하고, 지금은 건축물을 지어 세를 놓아 관리하며 지내는 부동산업을 주로 하는 사람이었다. 부인은 모로코에서 이민 해 왔고 남편은 러시아에서 이민온 사람이었는데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그렇게 외롭게 지내던 중, 알고 지내던 네덜란드 화가로부터 한국 고아를 소개받았다고 했다. 이들은 교육가답게 퍽 생각이 깊어 보였다. 혈육이 아닌 아이들을 혈육인 자녀처럼 관계를 맺기 위한 그들의 노력도 대단하였다. 내가 그 가족을 만난 것은 퍽이나 우연이었다. 그 당시, 텔아비브에서는 한국과 이스라엘의 축구 시합이 열리고 있었다. 외롭기도 하고 향수병에도 시달리던 터라 모든 일을 제쳐 놓고 온 가족은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열심히 응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옆에 앉아 있는 유태인이 더 열심히 한국 선수단의 응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유심히 살펴봤더니 그 옆에는 한 동양 아이가 조그만, 대충 그린 태극기를 열심히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가슴에 뭉클한 무엇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이는 분명, 한국 아이였던 것이다.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는 서로 가족을 대동하고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이 브엘쉐바에 있는 벤구리온 대학교의 교수 사택으로 이사를 온 후로는 더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자주 방문할 수가 있었다. 얼마나 빈번하게 왕래를 했는지 동네 사람들은 우리들을 그 애들의 친척이라도 되는 줄 알고 있기도 하였다. 심쇼니씨는 아이들의 저택을 짓기 위해 별도의 택지와 설계를 해두었다고 자랑도 대단했다. 건평이 80여 평이나 되는 호화 주택을 지을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했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마음, 아이들의 장래를 설계해 보는 부푼 꿈속에 생의 보람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도 역시 아이들이 한국 민족의 피를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한국 민족의 얼을 넣어 주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가족에게 나는 우리나라 해외 공보관에 요청하여 보급받은 한국에 관한 책자들을 상당수 보내 주기도 하였다. 언젠가 그들 품을 훌쩍 떠나 조국의 품으로 떠나가 버릴지도 모를 아이들을 그들은 그렇게 최선을 다하여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때가 되면 돌아가야지요. 그래도 여건만 허락된다면 몇 명 더 데려다 키우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자기가 낳지 않은 자녀와 친자식처럼 지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외국에서 입양한 아이는 여러가지로 더 많은 문제가 따르게 된다. 어떤 아이는 피부를 비롯한 신체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다. 그런 아이를 입양한 부모는 부모대로 더욱 세심한 배려를 필요로 한다. 어떤 아이는 과거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해외로 입양된 아이에게는 자기 모국에 대한 증오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있다. 그는 운동 경기에서도 결코 한국을 응원하지 않고 상대편을 응원했다. 그리고 검은 머리를 노랗게 염색까지 하고 다녔다. 그 중에서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아이가 있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그 아이는 올바르게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너는 참 예쁘게 태어났어." "어디가 예뻐?" "응, 눈빛이 특히 예쁘고, 네 피부색도...." "그러면 엄마 눈하고 내 눈하고 바꿔." "...." 주위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아이가 없으니, 예쁘다고 해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더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질문으로 그의 엄마를 항상 괴롭히고 있었다. "엄마, 나를 얼마주고 사왔어? 아이가 없어서 사왔어? 어때, 내가 있으니까, 엄마 심심풀이가 되는 거야?" "왜, 나를 낳은 엄마는 나를 버렸어? 만일, 엄마도 심심해지면 나를 버릴 거야?" 다섯 살 먹은 그 여자 아이는 이렇게 끊임없이 자신을 자학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경제도 이제 놀랄만큼 발전했다. 그에 따른 우리의 문화 수준도 무척 향상됐다. 다만, 우리의 의식만 제자리 걸음인 느낌이다. 나만을 생각하고, 내 가족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을 이제는 과감히 벗어던질 때다. 더 이상 우리의 아이들을 고통 속에 방치해서는 안될 일이다. 머리를 두 배로 활용하는 법 고3병이라는 말이 일반화된 지는 이미 오래다. 고3 아이들의 절반 이상이 자살 충동을 느낀다고 할 정도로 이 고3병은 매우 심각한 양상이다. 실로 입시철마다 중압감에 못 이겨 탈선하는 경우가 평상시보다 몇 배가 많다는 보도도 있었다. 어디 아이들 뿐인가. 고3 학생을 둔 집안은 온 가족이 크든 작든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고3 학생이 있는 대부분의 가정들은 모든 생활의 리듬을 아이에게 맞추어가기 마련이다. 모두가 아이 눈치보기에 급급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에게 죄책감이 들어 부인도 동침도 꺼렸더니, 이제는 아예 불구가 되어 버렸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들린다. 또 어떤 어머니는 아이로부터 입학 시험을 잘 치렀다는 말을 듣고는 자리에 누워 영영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고도 한다. 그 어머니가 쓰러지면서 했다는 한마디 말이 그간의 가족들이 받았던 스트레스를 더없이 웅변해 주고 있다. "이제는 도시락을 그만 싸도 되겠구나...." 어디 그뿐이랴. 어떤 어머니는 백일 기도를 드린다고 하루도 빠짐없이 험한 산을 오르기도 하고, 어떤 어머니는 생각다 못해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 몇백만 원씩 하는 부적을 사다가 아이에게 소지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고도 모자라 입시 날이 되면 고사장에는 수험생보다 가족들이 더 많이 모여 추위도 이랑곳하지 않고 엿을 붙여놓고는 빌고 또 빌어댄다. 이렇게 한 바탕 아수라장을 피워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우리의 대학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대학에 들어가면 그나마 다행이다. 떨어지기라도 한 학생은 오직 죽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고, 가족들은 또 가족들대로 그 충격 속에서 헤어나오려면 몇 날을 고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어렵게 입학을 하고서도 제대로 적응을 못해 방황하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 그들 중에는 그 동안의 입시 지옥으로부터 해방감으로 비롯된 순간적인 탈선자들이 대부분이다. 문제는 자기 적성에 맞지 않는 학과에 입학한 학생들에게서 심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자기의 적성에 맞는 학과를 선택하기 이전에 자기 성적에 맞는 학교를 선택한 데서 이미 예견되는 문제였음에도, 오직 입학이라는 것에만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 원인이 있다.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도 진학 상담시 학생의 적성보다는 인기가 없는 학과를 들어가더라도 소위 일류 대학에 진학할 것을 권유하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물론, 일류 대학에 들어간 학생의 수로 학교의 위상을 측정하는 우리 사회의 풍토 때문이다. 입시철이 지나면 신문 광고란은 각종 입시 학원으로 가득 채워진다. 그들이 선전하는 문구도 대부분이 어떤 대학에 몇 명이 들어갔다는 것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 다른 과로 전공을 바꾸기도 쉽지가 않은 것이 우리 대학의 현실이다. 전공을 바꾸려면 그 지긋지긋한 대학 입시를 다시 봐야 하는 것이 지름길이다. 그러니 누가 감히 전공을 바꿀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방황을 하다가 제적을 당하는 학생도 생기고, 제적은 간신히 면했다 해도 무엇 하나 제대로 배운 것 없이 졸업을 하는 학생도 생기는 것이다. 나도 전공 때문에 고민을 한 적이 있다. 사회 봉사 활동을 내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나는 그러한 힘을 얻기 위해 변호사가 되려고 일찌감치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학과가 있는 대학교는 많았어도 내가 갈 수 있는 학교는 단 한 군데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고학생이라서 야간 강좌가 있는 학교를 가야 했던 것이다. 결국 선택의 여지없이 나는 대학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서도 고민이 많았다. 처음의 꿈이었던 변호사에서 내 꿈이, 농촌을 잘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교수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두 가지 전공을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 제도는 교직 과목을 제외하고는 다른 전공 과목을 동시에 이수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고민 고민하다가 예전의 고등학교 시절처럼, 그래도 뭔가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이 있으리라 믿고 정치학과가 있는 대학교에 다니기로 마음을 다져 먹었던 것이다. 내 학력을 보면 의아해 하는 사람이 꽤 많다. 고등학교만 해도 그랬다. 지금의 내가 하고 있는 일과는 전혀 무관한 듯한 공고를 졸업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절의 나를 아는 사람은 나의 그러한 행로에 대해 고개를 끄덕여 줄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서울에 막 상경하여 구두닦이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오직 고등학교에 진학하리라는 꿈으로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러나 서울에 대하여, 고등학교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던 나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마침 동료가 공업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을 알고 공업이라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면서도 무작정 입학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내심 마음을 다져먹곤 했다. '무엇이든 배워두면 내 인생에 보탬이 될 것이다. 그러니 열심히 하는 것이 최선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그 시절, 나는 한강 철교 놓는 법을 열심히 배웠었다. 결국, 나의 꿈은 덴마크와 이스라엘에 유학함으로써 이룰 수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누구나 두 가지의 전공을 이수해야 한다. 그것도 전혀 다른 성격의 학과를 선택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학생들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만큼 학습량이 많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룹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형성된 그룹 멤버들끼리 협력하여 일정량씩 할당을 맡아 학습량을 소화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인 공동체 생활의 연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서로 전혀 다른 과목을 이수함으로써 각 학문의 연계성을 인지할 수가 있다. 외국에 거주하는 유태인들은 아예 어려서부터 두 학교를 동시에 다니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들의 유태 정신을 잊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함으로써 두뇌를 최대로 활용할 수 잇도록 기르는 방편도 되기 때문인 것이다. 친구로부터 전해 들은 얘기다. 어떤 사람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두 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그 친구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침 8시에 집을 나가 보통 미국 아이들이 다니는 일반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그 학교가 끝나면 즉시 버스를 타고 다른 학교로 가 거기에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태 문화 교육을 하루 4시간씩 받았다고 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교육은 대학에까지 이어졌다. 그리하여 대학을 졸업할 때에는 두 개의 학위를 동시에 받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두뇌를 남보다 훨씬 더 많이 활용할 수 있는 능력까지 배양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다른 고민이 있었다. 대학 때 취미로 했던 운동으로 인해 프로 팀의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프로 운동 선수는 다른 어느 직종보다도 인기가 높은 직업 아니던가. 고민 끝에 결국 그는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니 아버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것은 네가 결정할 문제이다." 모든 유태인의 아버지가 그렇듯이 그의 아버지도 모든 결정권을 아들에게 넘겼다. "그래도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정 그렇다면 한 마디 하마. 나는 네가 지금까지 운동을 위해 노력했다기보다는, 머리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힘을 써서 일하기보다 머리를 써서 일하도록 교육해 왔다는 것을 네가 한 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역시 이번에도 '탈무드'에 의거하여 입장을 정리했다. 그러자 그 아들은 흔쾌히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는 스카우트 제의를 물리치고 다시 학업에 전념하여 훌륭한 학자가 되었다는 거였다. 이렇게 그들의 교육은 전 과정을 통하여 빈틈이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적성에 따른 방황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결국 그들은 대학 교육을 고등 교양 과정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각 대학 도서관을 보면 3,4학년만을 위한 도서관을 분리, 운영하는 학교가 꽤 많음을 볼 수가 있다. 물론, 1,2학년 때의 교양 과목보다 학습량이 많은 전공 과목을 이수해야 하는 고학년들에 대한 학교측의 배려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어떠한가. 그곳은 이미 또 다른 시험에 대비하기 위한 입시 준비실이 된 지 오래다. 그 어려운 대학의 관문을 통과한 학생들이 이제는 다시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것이 사회에서 제대로 쓸만하게 통용되는 것이라면 또 모른다. 그러나 오직 순간의 시험 통과만을 위해서 모든 대학 생활을 투자하는 것이다. 대학 졸업생을 받아들이는 기업체는 또 기업체대로 불만이다. 도대체 대학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다고, 재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법석을 떨고 있는 것이다. 기업이 스스로 그러한 시험에 통과해야 받아들이겠다고 해놓고서는, 무슨 대학 교육이 잘못됐다고 떠드는 그들을 보면, 무언가 꼬여도 참 많이 꼬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최근에는 그런 쓸데 없는 시험은 보지 않는 기업체가 늘어 그나마 다행이다. 이스라엘에 유학하면서 내가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그들의 근면한 생활태도였다. 그것은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빡빡한 생활 속에서도 그들은 빠짐없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대부분이 고등학교 졸업을 하면 집에서 나와 독립된 생활을 하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이러한 것은 어려서부터 몸에 밴 근면한 생활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들의 대학 캠퍼스를 보면 더욱 명확히 그들의 생활 자세를 알 수 있다. 캠퍼스 내에는 실생활에 필요한 것이 거의 없다. 공중 전화도 겨우 몇 년 전에 설치해 놓을 정도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학생들도 주말이 되면 반드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주말을 가족과 함께 하면서 지친 몸을 재충전함으로써 생활의 활력을 찾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많은 학생들도 일과 학업을 병행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쉬운 일자리만을 원하는 경향이 있는 게 현실이다. 그리하여 중고등학생들의 과외 지도가 인기 직종이라는 것을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알려진 사실이다. 쉽게 번 돈은 쉽게 쓰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대학 주변의 향락적인 광경을 개탄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 중에는 아예 학업을 팽개치고 직업에 더 열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일의 신성함보다는 먼저 돈의 쾌락에 물들어 버린 학생들도 있다는 얘기다. 잘못된 교육의 희생양인 우리 학생들이 또 다른 희생양의 피를 빠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렇게 돈에 익숙해진 학생들은 졸업을 하고서도 직장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 더 큰 문제인 것이다. 돈의 편리함을 이미 알고 있고, 시간상으로도 자유로웠던 학생들이 적은 봉급과 조직적인 생활에 적응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학교에 대한 등록금 부담도 거의 없는 이스라엘 학생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여행을 하기 위해서다. 어떻게 보면 여행만이 그들의 유일한 취미이자 여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행을 좋아한다. 심지어 내가 알고 있던 한 여학생의 남자 친구는 군 복무 중임에도 휴가를 얻어 같이 여행을 떠날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의 여행 목적을 살펴보면 우리가 아는 여행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장차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하여, 자신의 직업에 관계 있는 목적 여행을 하는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경험들은 전적으로 사회 생활에서도 유용하게 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 기업의 입사 시험도 획기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그런 만큼 우리의 대학 교육도 고등 교양을 기르는 장으로서, 전문 지식을 가진 훌륭한 사회인을 양성하는 장으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어머니가 일어설 때다. "일을 하든지, 쉬든지 계획 없이 하지 말자." 이것은 2차 대전이 끝난 후, 국가를 재건하기 위하여 독일 여성들이 내건 슬로건이다. 이들은 집안에 게으른 자를 두지 말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말며, 아울러 물자를 절약할 것을 외치며 일어섰던 것이다. 모두가 좌절과 실의에 잠겨 있을 때, 여성들이 먼저 일어섰고, 또 먼저 단결하여 이를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을 전 독일 국민의 생활에 파급시켰다. 이렇게 여성들이 먼저 일어나 국가를 재건시킨 일들은 비단 외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사실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새마을 운동 과정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다. 새로운 농촌 만들기에 성공한 마을의 역사를 보면 반드시 그 마을에는 부녀자들의 활동이 크게 부각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뿐이랴. 교회가 부흥하고 복음 전파 사업이 잘 되는 곳에도 역시 여성들의 역할이 절대적인 힘이 되어 왔던 것이다. 사막을 개척하여 농업을 일으키고 인구 겨우 3백 50만 명으로 주위 아랍 공화국의 인구 1억 5천만을, 능히 막아 나라의 안보를 지켜 나가는 이스라엘에서도 여성들은 남다른 점이 있어 왔다. 특히 유태인들의 종교 교육은 반드시 어머니인 여성들에 의하여 전수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유태인의 여성들을 살펴보는 것은 큰 의의가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스라엘 공화국의 국교는 유태교이다. 이는 성경의 구약을 신봉하는 종교로서 앞으로 올 메시아를 기다리며 철저하게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이 유태인이다. 물론 이스라엘 시민권을 갖는 아랍인들은 여기서 예외로 되겠으나, 유태인의 신앙 생활은 그들의 생활과 풍속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 유태인들의 종교 의식에서 여성은 보잘것 없는 위치에 있었다. 지금도, 전통적인 유태인 회당에서는 여성들의 예배 참여가 금지되어 있고, 남자들만이 모여 예배를 보고 있다. 아이들도 사내아이만이 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회당에 따라 다닐 수 있다. 예루살렘 메아샤림 지역에 사는 정통파 유태인의 정숙한 부인은 모두 우리나라 여승처럼 삭발하여 머리의 꾸밈과 화장을 금하고, 외출할 때엔 머리에 가발 또는 스카프를 쓰고 나간다. 종교적인 유태인들간의 남녀유별은 우리나라 옛날의 '남녀칠세부동석' 같은 철저한 내외를 지키고 있어서, 버스 안에서는 정통파 유태인은 남자 곁에 여성이 앉지 않는다. 할아버지뻘 되는 노인도 남자는 젊은 여성 옆에 앉지 않는다. 이토록 내외를 하는 사람들도 이제는 그 수가 줄어들어 흔히 볼 수는 없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수천 년 이래 모든 가정에서 아들 낳기를 간절히 바랐으며 아들을 못 낳은 아내와 이혼하는 것을 정당하게 여겼고 첫아들은 반드시 돌아가신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성과 이름 전부를 계승하게 되어 있었다. 정통적인 유태민족의 풍속에서는 창세기의 말씀-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를 뽑아 이 세상 최초로 여자인 이브를 아담의 아내로 만들었다-그대로 여성은 철저하게 남자의 부속물로 취급하였다. 이처럼 여성이 남자의 부속 인간으로 여겨졌던 종교적 전통속에서 살아온 유태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으뜸가는 남녀 평등을 자랑하게 된 것은 과연 어디에서 연유된 것일까. 이것은 여성들은 스스로 활동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아 얻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회가 근대화되고 조직화되어 가자 보수적인 전통 속의 유태 여성들은 홀연히 나서서 애국하고 사회 개발 참여에 앞장섰던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유태 여성들의 사회 활동은 우리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완전한 남녀 평등 속에서 활동하고 있다. 유태교 사상의 남존여비적인 종교 의식 속에서 수천 년간 내려온 전통적인 사회가 남녀 평등의 사회로 변화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 벽을 허물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직장에서 여성 인구 분포를 보면, 각계 각층에서 이미 70퍼센트를 넘고 있다. 그 가운데 초등학교 교사들은 여성들이 98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으며, 은행이나 공무원 경찰관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의 수가 남성들의 수보다 더 많다. 그러나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그것은 바로 군대인데, 직업 군인은 남성들이 대부분이고 그 수가 많아서 일반 직장의 여서 취업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이유가 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직장에서 남성들보다 오히려 더 예민한 성격으로 사무 처리를 잘 한다는 평판을 받고 있다. 그러기에 급료도 여성이라서 덜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리하여 거의 모든 가정주부들도 취업하여 사회 각계 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대중 버스의 운전사들 가운데에도 여성들이 눈에 띄는데 이는 전시에 운전사들의 참전으로 인해 오는 불편을 막으려는 정책적인 고려에서 양성된 것이라 한다. 외무성에 여직원이 많이 눈에 띄는 것은 물론 외국 주재 여성 대사도 몇 명 되고 초등학교 교장도 여성 교장의 수가 많다. 국회 의원들, 정치 지도자들과 사회 지도층에도 여성들의 진출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으며 그 발언권은 가정은 물론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의 상식을 훨씬 벗어나고 있다. 우리 동양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때로는 한도에서 벗어난 느낌을 주는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부부 관계가 기초로 된 가정에서 여성의 위치도 사회 참여도에 따라 많은 혁신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집 안에서의 가사는 여성들만이 해야 하는 것으로 되었던 종래의 전통 사상이 거의 무너져 버리고 남녀가 공히 분담하는 것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여성이 신체적으로 연약하다 하여 남자가 더 많은 가사 노동을 분담하는 젊은 층의 가정들도 속출하고 있다. 여성들의 사회 참여도가 높아지자 남녀가 똑같이 직장에 나가 8시간씩 일을 하고, 거의 같은 액수의 월급을 받아 오고, 같은 시각에 퇴근해 집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가정부도 없는 이스라엘 가정에서 여성만이 집안일을 전담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남자들이 집안 청소를 비롯하여 세탁을 한다든지, 식사의 일부를 요리하는 것이나 설거지하는 일 등은 당연시 하고, 시장보는 일과 심지어 차 끓이는 일까지 남자들이 전담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스라엘에서 국방의 의무는 남녀가 균등하게 지고 있다. 병역의 의무는 유태인 남녀만이 지게 되는데 대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의무적으로 군대에 입대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자는 병역의 의무를 면제한다. 그래서 사병들의 평균 학력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있다. 그리고 입대하면 남녀가 모두 특기에 따라 병과가 분리되는데, 여군들은 대개 행정 사무 요원, 의무병, 통신원 그리고 부관 요원으로 배속받게 된다. 얼마 전 여군들도 탱크 운전병으로 훈련이 시도된 바 있으나, 탱크 안의 고열로 남녀가 좁은 차내에서 일을 해야 하는 불편 때문에 그 시행이 보류되고 말았다. 이와같이 남녀가 혼성된 부대 편성 때문인지 군부대 주위에 창녀들이 일절 없고 전쟁으로 인하여 점령한 이방 지역에서 약탈이나 여자 겁탈을 하지 않는 군대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스라엘군 뿐이라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사회 실습을 통하여 충분히 사회를 보고 느끼고 배우게 된다. 그리하여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 여학생들도 자립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 부모의 도움 없이 공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남녀 학생들이 모두 취업하여 일을 하면서 공부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학생은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로 모두가 근로 학생이다. 그러기에 학교에는 노동청의 노동관이 파견되어 일을 하려는 학생들의 취업 알선을 하고 있다. 지금은 그 연령이 조금 늦춰졌지만, 제대하면 곧 대학에 입학하게 되고 결혼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라 부부 학생이 상당히 많은 것도 특징이다. 그러므로 웬만한 여학생들은 다 어머니 학생들이다. 이들은 한 남편의 아내요, 학생이면서 직업에 종사하는 직업인이다. 이런 어린 아이를 가진 엄마들이 편리하도록 탁아소를 여러 곳에 두고 있다. 이스라엘의 젊은 여성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도록 밑받침하고 있다. 그러니까 1인 4역을 해내는 또순이 같은 억척스런 여학생들이 수없이 많다. 이런 이스라엘 여성들의 활동 속에서 그 사회가 발전하고, 이러한 요소들이 이스라엘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밑받침하여 온 것이다. 그들의 대학 생활은 전쟁을 방불케 한다. 학생들은 곁눈질할 사이도 없이 학업에 매달려야만 학점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수업량은 과다하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1인 4역의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내며 오히려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여성의 우수함은 그들의 교육에서 나타난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종교 교육을 비롯한 가정 교육의 대부분을 여성이 담당하여 왔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성들은 가장 먼저 아이들에게 종교 교육을 통하여 민족혼을 불어넣어 준다. 그런 이유로 이스라엘 여성들은 대부분 아이에게 모유를 먹인다. 그리고 종교를 통하여 아이들은 민족 의식과 함께 상상력을 키워나가게 된다. 이스라엘의 어머니들 또한 교육열이 세계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들을 내 새끼만으로 키우지는 않는다. 반드시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서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아이들을 구속하려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항상 자유 속에서 자연과 어우러지는 교육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들에게는 어려서부터 혼자 살아야 한다는 의무가 주어진다. 젖을 빨 때에도 어머니의 따스한 보살핌 속이 아닌, 우리가 볼 때에는 투쟁적으로 젖을 빨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어려서부터 혼자 서야 한다는 것을 느끼며 자라는 것이다. 거기에서 그들은 자율성과 강한 독립심을 배양한다. 민족 교육 이외에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지혜이다. 그들은 몸으로 일하지 말고 항상 머리로 일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어머니가 일어설 때다. 내 아이가 아닌, 우리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거창한 곳에서부터 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주변에서부터 일어서면 되는 것이다. 5. 사회와는 떨어져 살 수 없는 교육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머슴의 아들로 태어난 나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 가난은 나에게 있어서 한이었고, 비참을 뛰어 넘는 비극이었으며, 굶주림과 무지의 굴레로 씌워진 운명이었다. 오직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힘은 믿음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흙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기독교적 신앙의 힘이었다. 원래 나는 문화 류씨의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었으나 할아버지대에 와서 집안이 몰락해 버리는 바람에 아버지는 남의 집 머슴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니 하루 끼는 때우는 일조차 예삿일이 아니었다. 어느 해는 한 달이 지나도록 곡식을 입에 넣어 보지도 못하고 소나무 껍질이나 칡뿌리, 도토리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심지어 어느 날은 자동차에 치어 죽은 고양이를 삶아 먹기도 했다. 집이라고 해야 한 칸 방의 흙집에 여러 식구가 올망졸망 부대끼며 살았다. 거지와 다름없는 비참한 생활이었다. '찬물은 위아래가 있어도 끓인 물은 위아래가 없다.'는 말처럼 우리네 농촌의 처절했던 가난을 정확히 대변할 말은 달리 없는 듯하다. 우리의 미풍 양속에는 어른이 먼저 음식에 손을 대야 비로소 아랫사람이 손을 댈 수가 있다. 비록 찬물 한 그릇이라도 어른이 먼저 마신 후에야 아랫사람이 마셔도 된다는 뜻이다. 끓인 물이 위아래가 없다 함은 물이 끓을 때 아래위로 뒤섞이기 때문에 아랫사람이 먼저 마셔도 좋다는 의미다. 밥솥에 끓인 물이 바로 숭늉이다. 어른이 숭늉 밑에 가라앉은 누룽지 찌꺼기를 먹기 위해 아랫사람에게 숭늉은 먼저 먹어도 좋다는 일종의 양보(?)를 하는 예의 절차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나도 숭늉 찌꺼기를 얻어먹기 위해 형편이 괜찮은 친구 집에 일부러 자주 들렀다. 한 번은 마루에 놓인 커다란 숭늉 양푼 바닥에 두어 숟가락쯤 되어보이는 찌꺼기가 가라앉아 있는 게 보여 그 찌꺼기를 먹기 위해 숭늉 한 그릇을 다 마셔 버린 적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먹는 것도 없이 지게를 지고 일을 하면서도 나에게는 유일한 낙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었다. 아무리 힘든 생활이었지만 내 주위에서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위안이 될 수가 없었다. 다른 친구들이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도 교복 대신 지게를 짊어지고 황소처럼 일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공부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리하여 집에서 키우던 토끼 몇 마리를 팔아 중학 강의록이라는 책을 사 독학을 하기 시작했다. 품속에 항상 책을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꺼내 읽었다. 때로는 국민학교에 미 진학 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고등 공민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그런 내가 기특하게 보였던지 마침내 나에게 첫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지역 국회 의원 아들의 가정 교사로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 그 국회 의원의 배려로 중학교에 편입할 수가 있었다. 그때 내 나이 18살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다시 가슴이 답답해왔다. 하릴없이 산 속에 파묻혀 있다는 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몇 날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가기로 굳게 마음을 결정했다. 나의 이런 결심에 어머니도 어쩔 수 없으셨는지 말리기를 포기하시고 쌀 한 가마니 정도의 돈을 빚내 주셨다. 서울에서 한 달 최저 생계비도 안 되는 돈을 들고 서울로 떠난 것이다. 이 길이 비록 멀고 험할지라도 한번 세운 뜻은 결코 굽히지 않으리라. 당대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이라면 후대에서는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후대의 자손들이 그 덕을 입을 수 있다면 성실하게 살다가 죽었다는 것에 만족하리라. 절벽 앞에 섰을 때에는 하나님을 부르며 이마로 바위를 치리라. 그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면 좋은 길이 열리리라. 그렇지 않다면 이마가 터져 피를 흘리며 죽어 버리리라. 굳은 결심 끝에 서울로 올라온 나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는 결코 고향에 내려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처음에는 대방동에 있는 미군 부대에서 구두닦이를 했다. 잠자리는 영내 구석에 쳐놓은 천막이었다. 일단 고정된 수입이 생기자 고등학교에 입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길로 무작정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을 따라 흑석동에 있는 동양 공업 고등학교 서무실로 찾아가 서무과장을 만났다. 그러나 입학철이 두 주일 정도 지난 시점이라 한 마디로 거절당했다. 내친 김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무조건 교장 선생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썼다. 결국 교장 선생님을 만나 사정 얘기를 했다. 당시 교장 선생님은 김봉주 선생님이셨는데 그렇게 인자하실 수가 없었다. 그 교장 선생님의 특별 배려로 구두닦이하던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입학금은 면제 받고 등록금은 분납토록 하는 외상 입학이었다. 학교에 입학하자 필요한 건 돈이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신문 배달, 아이스케키 장사, 빨래 비누 장사 등이 내가 했던 그때의 직업들이다. 그래도 대학교에 들어갈 등록금까지 마련해 두어야 했기 때문에 자장면 한 그릇 먹기를 그렇게 소원하면서도 시장 바닥에서 파는 멀건 수제비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그나마 수제비도 아까워 주식은 10환에 다섯 개 주는 국화빵이 대부분이었다. 신문 배달을 할 때 길거리를 지나다가 길가에 떨어진 밥덩이를 주워 흙을 털어내고 먹거나, 곰팡이가 나서 버린 빵조각을 주워먹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공부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어려운 시절을 보내자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대학 시절에도 신문 배달, 공장 청소부 등을 전전해야 했다. 그러다가 후반기에는 입주 가정 교사를 하게 되었다. 대학 3학년 무렵으로 생각된다. 그때 나는 독립문 근처에서 가정 교사를 했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나를 잘 보았던지 속옷은 몰라도 내의 정도는 빨아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내게 내의가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내의가 없으면 진작부터 말을 할 것이지 사람이 어찌 그리 무디나, 원. 우리는 내의를 두 벌씩 입어도 추위를 견디지 못해 엄살인데, 학생은 도대체 강철로 된 인간인가." 그렇게 혀를 내두르면서 아주머니는 내게 내의를 두 벌이나 사주었다. 실로 태어나서 26년 만에 처음 입어보는 내의였다. 등록금을 제때 마련할 수 없었던 나는 대학을 무려 7년 만에 졸업했다. 그리고는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비웃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뜻이 있어 신학교 기독교 교육학과에 학사로 편입했다.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위해서였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고등 농민학교 교장으로 부임을 하면서 잊고 있던 흙에 대한 꿈이 새롭게 일었다. 그 당시 나에게 크게 영향을 준 사람은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코 선생이었다. 그는 나에게 '한 알의 밀알'이라는 책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끝없이 일러주었다. 바야흐로 어려서부터 막연하게 키워온 잘사는 농촌 건설에 대한 구도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지상 낙원이라는 덴마크 유학에 대한 꿈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 시절에 나는 지금의 아내이자 평생의 동반자인 이소영 씨를 만났다. 그녀의 부친은 국민학교 교장이었고, 마침 내 친구가 그 학교 교사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친구를 찾아가면서 그녀 부친의 눈에 띌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와도 자연스러워질 수가 있었고 급기야 난 청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 길로 그녀의 부친에게 청혼서를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답신이 왔다. '과분한 청혼을 한 귀의를 당장 받아들이고 싶으나, 지금은 군이 공부에 매진할 시기인 만큼 나중에 적당한 시기를 보아 이야기하자.' 난 뛸 듯이 기뻤다. 직장도, 집안도, 장래성도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이 없었던 나에게 신뢰를 보여준 그녀의 아버지가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약혼을 한 지 2년 만인 33세 때 결혼식을 올릴 수가 있었다. 결혼식날 생전 처음으로 처가에서 맞춰준 새 양복과 새 구두를 신었다. 그러나 신혼 여행을 다녀올 돈도 나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식장에서 택시를 타고 가다가 기본 요금이 오르기 전에 차에서 내려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나는 내 돈을 내고 사 먹는 음식 중에 가장 값비싼 떡만두국을 사 먹었다. 그리고는 서울역에서 안양 가는 시외 버스를 타고 안양에 내려 유원지 근처에 있는 한 여인숙에서 둘만의 산혼 초야를 보냈다. 물론 길가의 포장마차에서 된장국으로 식사를 했다. 아무런 불평도 없이 따라오는 아내가 그지없이 고맙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가슴에 담아두었던 유학의 뜻을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비쳤다. "몇 년이 걸려도 좋으니 가서 내 걱정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서 힘을 길러 오세요." 그렇게 유학의 뜻은 정했으나 당장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왔다. 편지를 쓰라는 것이었다. 그 길로 나는 한국의 농촌 현실과 덴마크의 선진화된 농업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써서 서툰 영어로나마 번역을 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누구에게 보내야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또 기도를 했다. 그리고는 덴마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인 국왕에게 보내면 내 뜻을 들어줄 것이라고 짐작했다. 곧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가 백과사전을 찾았다. 덴마크 국왕은 프레드릭 9세였다. 주소는 알 필요 없었다. 덴마크 국민이면 누구라도 국왕이 사는 곳을 알 수 있으리라. '덴마크 코펜하겐 프레드릭 9세 국왕 귀하' 겉봉투에 쓴 주소와 이름이었다. 40여 일 만에 덴마크 왕실로부터 '귀하가 보내주신 서신에 국왕께서 감동을 하셔서 행정부로 이첩하면서 귀하의 소원을 가능하면 들어주라고 당부하셨다.'라는 내용의 답신을 받았다. 곧이어 덴마크 외무성으로부터 공식 초청장이 날아왔다. '당신이 원하는 기간, 원하는 장소, 원하는 분야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지원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꿈에 그리던 유학의 길에 오를 수 있었다. 덴마크 농과대학에 입학한 후 먼저 덴마크 언어를 속성으로 배웠다. 3개월 후부터는 모든 대화를 덴마크어로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덴마크어가 유창하다는 칭찬도 많이 받아, 9개월 후부터는 여러 덴마크 국민 고등학교에 초청 받아 한국을 소개하는 강의를 덴마크어로 자연스럽게 하고 다녔다. 유학온 지 10개월쯤 되었을 때인가 싶다. 덴마크 주변의 여러 유럽 국가를 여행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 외무성 국장을 찾아갔다. "당신이 나라에서 나를 초청하여 국비로 공부시켜 주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당신네 나라의 돈으로 나를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국장에게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당신 개인보다는 당신 조국인 한국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민 총생산의 2퍼센트를 개발 도상 국가에 지원하도록 결의한 바 있다. 우리는 그 결의를 준수하여 개발 도상 국가에 학교나 병원을 세워 운영하기도 하고, 청년을 초청하여 지도자 과정을 교육시켜 그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도 한다. 당신도 그런 차원에서 초청된 것입니다." "그러면 덴마크 한 곳에 머물러 연구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비교 연구를 하는 것이 좋습니까?" "물론 비구 연구가 효과적이죠." "그럼, 내가 유럽 각국에 문화를 시찰할 수 있도록 예산 지원을 주선해 주십시오." "나에겐 그런 결정권이 없습니다." "그럼, 결정권이 있는 장관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오늘은 그냥 돌아가시요, 당신편이 되어서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끝내 2만 달러의 특별 예산을 얻어 내 개인 돈은 한 푼 들이지 않고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할 수가 있었다. 덴마크에 온 지 2년이 되어, 덴마크에서 개발 도상 국가 지원 자금을 예산에 확보해 놓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 나는 당장 외무성 차관에게 달려갔다. 그동안 구상한 한국--덴마크 농업 기술 학교 설립안도 제출했다. 덴마크 정부로부터 80만 달러의 무성 원조를 받아 한국에다 농업 기술 요원 양성 학교를 세운다는 계획이었다. 덴마크 정부의 의사는 긍정적이었다. '자연인인 당신에게는 그 돈을 줄 수가 없으니 당신 정부의 추천서나 의견서를 받아오시오.' 그러면 지원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즉시 나는 우리 정부에 편지를 보냈다. 주 스웨덴 한국 대사관에도 정부 추천을 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증빙 서류도 제출했다. 그러나 별로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 귀국하여 직접 교섭키로 마음을 먹었다. 그 길로 나는 공부를 중단하고 즉각 귀국을 서둘렀다. 귀국하는 길에 이스라엘 정부의 초청을 받아 이스라엘에 들렀다. 이스라엘 농촌 개발에 관하여 6개월간 공부를 했다. 영어로 강의하는 외국인 선생의 교육 기관에서 연구하였던 것이다. 귀국하자마자 나는 당장 추천서를 받기 위해 정부 부처를 찾아다녔지만 결국 시한을 넘겨버려 그 돈은 몽땅 탄자니아에 개발 자금으로 넘어가 버렸다. 정부측의 무성의로 계획이 무산되자 공무원들의 경직된 사고방식과 행정 자세에 분노가 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는 농촌 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여러 대학에 시간 강사로 출강을 했다. 그러던 중, 건국 대학교 설립자이신 상허 선생을 만나, 건국 대학교 축산 대학 교비 장학생들의 정신 교육을 맡아 훈련시키는 성관 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렇게 건국 대학교에 재직하면서도 틈나는 대로 농촌을 방문하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도 출연하면서 농촌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와대의 부름을 받고 들어가 청와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만들어 새마을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환경과 비슷한 이스라엘에 대한 유학 욕구가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2년간 새마을 운동에 관여하다가 마침내 1973년 봄, 나는 모든 관직을 떨쳐 버리고 이스라엘 유학길에 다시 올랐다. 히브리어 한 글자 모르는 상황에서 난 이스라엘에 간지 3개월만에 회화를 마스터하고, 7개월만에 대학원 입학 시험을 히브리어로 보아 합격했다. 어떤 상황이든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인 것이다. 5년 2개월 동안의 피나는 노력으로 나는 최단 기간만에, 최고 우수한 성적으로 박사 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이 가장 컸다는 믿음과 하고자 하는 의욕 그리고 노력에 의해 얻어낸 결과였다. 이런 나의 자세는 언젠가 세상을 다하는 순간까지 끊임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이제야 불가능함을 알았다 "과장님, 사업은 잘 되고 있습니까." "이 사람은, 사업은 무슨 사업인가. 그냥 집사람이 부업을 하는 게지. 나는 그렇고, 자네도 무슨 사업 구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예, 다 과장님 덕택이지요. 제가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아니면 제게 무슨 빽이 있습니까. 오로지 과장님만 쳐다보고 있는데, 과장님이 먼저 다른 길로 갈 생각을 하고 계시니 저라고 별도리가 있겠습니까. 짤리기 전에 일찌감치 살 궁리를 해 나가야지요." 요즘, 기업체에서는 윗사람들 모르게, 이런 대화들이 주요 화제로 오른다고 한다. 기업체마다 그간의 동양적 인사 관리에서 능력 위주의 인사관리로 전환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는 데 따른 불안 심리의 반영이라고들 한다. 그러니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조기 승진에 대한 기대감과 높아지는 보수를 계산하기에 분주해 있고, 때가 되면 자연히 대리되고 과장되리라고 생각했던, 어떻게 보면 무사안일했던 사람들은 불안하여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거다. 그나마 그동안 벌어다 준 돈을 알토란처럼 키워준 마누라라도 있는 사람은 일찌감치 짤릴 것에 대비하여 부업으로 작으나마 레스토랑이나 카페를 차려놓은 사람들도 많고 그렇게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 데서 비롯된 얘기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바람은 비단 기업체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미 공무원은 그러한 바람 속에 들어가 있고, 정치권도 그렇다. 그러니 아무런 준비도 없는 사람만 불쌍하게 된 꼴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것도 자신에게 잘못을 돌려야 할 일인지 모른다. 시대의 흐름을 간과했고, 무엇보다도 인생의 설계를 잘못한데서 비롯된 일을 누구에게 탓할 것인가. 물론, 자신의 인생 설계를 착실하게 해 놓은 사람은 그러한 바람에 꿋꿋하게 견디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결코 자신의 인생을 남의 손에 넣어두지는 않을 테니까. 배가 목표한 지점을 제대로 항해하려면 나침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침반만 가지고는 목표 지점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반드시 해도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자동차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가야 할 길을 명확히 아는 사람이라면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낯선 곳을 가야 하는 운전자들에게는 교통지도가 필수인 것이다. 그러나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을 설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생에는 명확한 해도도, 교통지도도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자신의 주관적인 목표와 신념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주관적이고 추상적일지라도 자신의 인생 설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부터 다르다. "도대체 왜 사니." 생활면에서 좀 빈둥거리거나 책임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다. 그 정도로 도대체 왜 사는지도 모르게 자신의 인생을 끌고 가는 사람이 많다. 막연히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고, 그리고 좋은 여자 만나 아이들 낳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 철학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쉽게 포기하고, 자신을 돌아보기 전에 사회를 먼저 원망한다. 내 인생의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찌어찌하여 돈을 벌었다 해도 그 사용 방법을 몰라 사회의 비난거리가 되기 쉽다. 졸부가 그렇고 오렌지족이 그렇다. 그러다가 안 되면 한 탕을 노린다. 투기를 하고 사기를 치는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큰 마음을 먹고 내 일생의 설계도를 그렸다. 어떻게 보면 그 가난했던 시절, 미래의 꿈마저 없었다면 나는 지금의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내 생의 설계도를 그리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지우고 또 그리고, 그렇게 일 주일 동안을 거듭한 끝에 나는 최초의 내생의 설계도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 보아도 매우 조리 있고 타당성 있는 것이었다. 먼저, 나는 내 인생이 가야 할 고속도로를 그렸다. 그리고 거기에는 연도를 기록했다. 그리고 현재의 시점에 세로로 선을 그었다. 그 선을 기점으로 왼편은 과거요, 오른 편은 미래였다. 그리고 시간의 고속도로 위편에는 인격 형성이든가 사상 정립 등 형이상학적인 인생 목표를 기재하고, 그 아래에는 대학 입학이라든가 결혼, 직업 등의 형이하학적인 것들을 기재해 나갔다. 현재로부터 과거를 기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반성이 더 많이 따른다는 것 이외에. 그러나 미래를 그려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막막한 상황 속에서는 대학에 진학하기는커녕, 당장 고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차례 차례 내 생의 빈 칸들을 채워나갔다. 믿음이 있고 노력을 하면 안 될 일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을 하여 책상 위 벽에 단단히 붙여 놓았다. 그리고 한 해, 한 달, 한 주일, 일일 계획서를 작성하여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그러나 실천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그럴수록 나는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매일을 반성하고 새다짐을 했다. 그러고 나면 새로운 용기가 샘솟음쳤다. 그때의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져 나는 요즘에도 천 날을 하루같이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며 은혜를 받고 있다. 아무튼 그 생의 설계도에 따라 최선을 다하며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자 인생의 큰 줄기에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 맞추기 힘든 부분들이 발생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새롭게 수정을 해나갔다. 대체로 그 주기는 4-5년 정도였다. 지금에 와서 그 당시에 작성했던 설계도를 보면 놀랍게도 지금도 타당성이 있는 것들이 많다.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 설계도에 따라 대학을 졸업했고, 유학을 했으며, 결혼을 했다. 그 당시에 작성했던 설계도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내 직업이다. 그 시절, 나는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깊숙이 빠져 있었다. 도산 선생의 사상은 지금의 내가 도산 아카데미 연구원을 운영할 정도로 나의 인생을 결정해 주는 등대였던 것이다. '힘이 있어야 일을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내게 가장 감명을 준 도산 선생의 말씀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유학을 꿈꾸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내 생활을 아는 사람들은 이러한 나의 꿈에 코웃음도 많이 쳤을 것이다. 그러나 두드리는 자에게 반드시 문은 열렸다. 뜻이 있는 자에게 길은 있었던 것이다. 구두닦이에 신문팔이를 전전하던 내가 감히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일생의 설계도 덕분이었다. 그리고 신념과 노력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였다는 것에 나는 감사하고 있다. 아무튼 도산 선생의 한 마디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힘이란 무엇인가. 힘은 어디에서 얻어지는 것인가. 그리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은 무엇인가.' 이렇게까지 생각하자 답답함이 엄습해 왔다. '힘이란 공신력이 있어야 한다. 나만 아무리 잘난 체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대통령의 아들이라면 아무리 어벙하더라도 힘이 있을 텐데... 하지만 나는 지지리도 가난한 머슴의 자식이 아닌가.' 답답하거나, 일이 안 풀릴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뿐이었다. 그것은 기도였다. 열심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저에게는 뜻이 있습니다. 이 가난한 농촌을 잘사는 농촌으로 만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저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하다보니 응답이 있었다. '그래, 사법 시험에 합격해서 변호사가 되면 되잖아. 이제부터 나의 목표는 변호사가 되는 것이다.' 검사나 판사보다 변호사를 택한 것은 장차 사회 사업을 하겠다는 내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내 일생의 설계도에는 변호사라는 직업이 당당히 적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목표에 따라, 힘을 얻기 위해 법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학 1학년 때 처음 응시한 시험에서 나는 보기 좋게 낙방하고 말았다. 나는 엄청난 실의에 빠졌다.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무엇으로 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고민하는 나를 보고 선배가 위로 겸 제안을 해왔다. "그렇게 고민하지 말게. 자네는 뜻이 있으니까, 반드시 이룰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자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변호사만이 힘이 있는 것은 아니잖나. 교수를 한 번 생각해 봐. 돈은 많이 못 벌겠지만 사회적으로는 인정을 받는 자리 아닌가. 그리고 자네가 생각하는 농촌의 발전을 위해서도 오히려 바람직한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 당장 답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내 일생의 설계도에 커다란 차질을 빚을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닌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장차 내가 해야 할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방법도 괜찮을 듯싶었다. "선배님, 충고는 고맙습니다만 쉽게 결론이 서질 않습니다. 좀더 생각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며칠을 두고 생각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나에게는 잘사는 농촌을 만들겠다는 꿈이 있고, 또 그를 위해 덴마크 유학도 반드시 성취한다는 뜻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법학보다는 농촌에 관련된 학문을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그러나 내 일생의 설계도를 수정하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굳건한 뜻을 가지고 나는 내 설계도를 수정할 수 있었다. 내 설계도에서 가장 큰 변화였다. 아무튼 나는 다시 변경된 설계도에 따라 덴마크에 유학하였고, 농촌 사회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학위를 받고 대학 교수로 임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인생 목표를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사 태풍이 분다고 불안해 하거나, 서둘러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는 것은 인생의 목표가 없거나 그것이 흔들리거나 단절된 데서 비롯된 결과인 것이다. 내 지금의 목표는 농촌 운동이 주가 된 사회 운동이다.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한 과정으로 나는 지금 농촌 문화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반드시 나는 그 뜻을 이루어 낼 것이다. 너무 힘이 들어 불가능하다는 말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 모든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다만 신념과 노력을 다한 후, 목숨이 끊어져 관 속에 들어가 관 뚜껑에 못이 박힐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말인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이제야 나는 그 일이 내게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알았다.' 누구보다도 휴지를 잘 주음 2천 년만에 조국을 다시 찾은 유태민족, 불모의 사막을 개척하여 농촌을 일으키고 온 국민이 한결같이 단결하여 국가의 안보를 지키며 민족의 번영을 이룩해 나가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뼈를 깎는 고통의 살을 찢기는 비참한 수난사 속에 점철되어 꺼질 듯하면서도 명맥을 이어와 문화의 꽃을 피워왔다. 이러한 유태민족의 씨알은 바로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사회적인 관심과 교육에 의하여 비롯되었다. 그러한 교육에 의해서 지금 그들은 세계의 학계를 비롯한 언론계, 재계, 정치계 등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있다. 유태인들에게 지혜를 열어주는 교육 제도는 어느 나라보다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짜여져 있다. 아이들은 생후 8일만에 할례라는 의식을 받음으로써 유태민족의 자손이며 세상에 태어났음을 확인 받는다. 그 뒤 아이들에게 베풀어지는 교육은 가정과 회당과 그리고 사회가 한 덩어리가 되어 이루어진다. 유태인들의 공식적인 교육은 유아 때부터 시작된다. 애굽에서 유태민족을 이끌어 냈던 지도자 모세도 바로의 궁전에서 그의 친어머니로부터 엄격한 궁중 교육을 받음으로써 그의 인격을 형성할 수 있었다. 네 살이 되면, 그 나이 아이들의 90퍼센트가 '크담호바'라는 공립 유치원에 입학하게 된다. 여기에서 아이들은 지능 교육, 성격 조성 교육을 받게 된다. 공립 유치원의 시설과 운영은 정부에서 일체 책임을 지고 보모나 교원도 문교부 공무원으로 정부의 관할 하에 있다. 운영비는 물론 국가가 책임을 지고 부담하지만 학부모들에게도 그들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일정액을 받고 있다. 아이들은 만 5세가 되면 의무 유치원에 진학하게 된다. 의무 유치원은 말 그대로 의무적이어서 모든 아이들이 입학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인력뿐만 아니라 시설까지도 모두 국가의 관할하에 완전 무료 교육으로 이루어진다. 실제적인 국민 교육의 1차년도가 되는 셈이다. 의무 유치원은 각각 평균 20명의 아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의 방을 2-4개씩 갖추고 있는데, 대부분 마을마다 몇 군데씩 세워져 있다. 여기에서는 대개 교사와 보조 교사 두 사람이 한 반을 담임하여 아이들의 교육, 생활 등 모든 것을 관할한다. 오전 8시에 시작하여 오후 1시에 끝나게 되는데 아이들은 집에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 오전 10시경에 간식을 먹는다. 이때 유치원에서는 차나 음료를 준비하여 아이들이 편하게 먹도록 배려한다. 그들의 교육은 예의 범절이나 지능 개발을 위한 그림 그리기, 만들기, 노래 부르기 그리고 재미있게 노는 것이 전부이다. 그들은 결코 글자를 가르치지 않는다. 아무리 아이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해도 초등학교 1학년 과정에서 배우는 그 어떠한 것도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실컷 놀고 재미있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배우며, 우리가 아이큐 검사 때 묻는 질문지의 내용과 같은 판단력, 이해력 등을 키워주는 일에 전념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이 바로 공동체 교육이다. 그들은 게임을 하거나 무엇을 만들거나 노래를 할 때에도 작은 그룹을 만들어 지도한다. 어려서부터 함께 하는 법을 몸으로 체험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매주 아이들의 생일 축하 행사를 열어준다. 이때는 우리의 부모들처럼 학부모들이 케이크나 음료수도 준비하는데, 우리와 다른 것이 있다면 선물의 내용이다. 그들은 결코 아이들에게 과다한 선물을 하지 않는다. 대개 선물 봉지를 준비하는데, 거기에는 사탕 서너 개, 장난감 한두 개, 과자 서너 개가 들어 있는 것이 전부이다. 아이들의 기가 죽을까봐, 아니면 선생님에게 우리 아이를 잘 보이려고 지나치게 선물하는 경우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행사도 중요한 교육 행사의 일환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학부모와 학부모들이 서로의 얘기를 주고 받으며 관심을 표현하는 이 날을 아이들도 학부모들도 모두 기다리는 것이다. 이 유치원에서 또 그들의 민족 색채에 어울리게 특별히 종교반을 운영한다. 여기에는 전통적 종교 집단의 아이들이 속하게 되는데, 남자 아이인 경우에는 '키파'라고 부르는 손바닥만한 실로 짠 모자를 쓰고 다닌다. 이 아이들은 식사 예절부터 놀이까지도 철두철미하게 종교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는다. 때문에 전통 종교인 가정에서는 반드시 이 특별반에 아이들이 편입되기를 원한다. 어떤 유치원은 아예 이러한 아이들만 수용하는 곳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아이들은 너무 지나친 계율 때문에 이 특별반을 아주 싫어한다. 한편, 유치원 교육 프로그램에는 반드시 매주 1회 이상은 소풍을 나가게 되어 있다. 그날은 선생님이 마을 근처에 있는 농장이나 각급 학교, 공공 기관 등을 데리고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여러가지를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그리고 매월 하루 저녁은 학부모 회의가 어김없이 소집된다. 여기에서는 반별로 모인 학부모들에게 담임 선생님이 그동안 아이들의 성장 과정과 문제점들 그리고 협조 사항 등을 공지하고, 학부모들은 그들의 궁금한 점들이나 새로운 교육 방법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교육에 관한 토론이 벌어지는 셈이다. 이러한 학부모 회의에 대한 관심은 모든 학부모가 모일 정도로 관심이 대단하다. 유치원을 마친 만 6세의 아이들은 모두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우리의 중학 과정까지 합친 9년제로 되어 있는데 이 또한 의무 교육이다. 여기에서는 교과서, 노트, 연필 심지어 지우개까지 학용품 일체를 학교에서 무료로 지급한다. 그들은 2학년 때부터 음악, 미술, 공작, 무용, 체육 등의 예능계 과정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교사에게서 교육을 받는다. 그만큼 다양한 아이들의 재능을 계발해 주기 위한 배려일 터이다. 그리고 3학년이 되면서부터 제1외국어로 생활 영어를 가르치고, 4학년부터는 아랍어를 시작하게 된다. 이는 대단히 효과가 커서 중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대개가 두 개의 외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게 된다. 특히, 이들 초등학교에서 눈여겨 볼 것은 암기식, 주입식 교육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는 점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되기를 가르친다. 그리고 지혜와 창의력을 길러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성적이나 등수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한 것은 그들의 성적표를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그들의 성적표에는 점수를 기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처럼 '수우미양가'가 표시되어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등수는 더더구나 생각할 수 없다. 그것 때문에 아내와 나도 한 번은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이스라엘에 유학하면서 처음 딸아이의 성적표를 받아보았을 때였다. 아이는 성적이 좋아 기뻐하는 모습도, 성적이 나빠 기가 죽은 모습도 아닌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불쑥 내 앞에 성적표를 내밀었다. 아이한테서 처음으로 성적표를 받아보는 나로서는 당연히 그 어떤 설레임과 기대감에 차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산수:두 자리 숫자까지도 덧셈과 뺄셈을 아주 잘함.' '도덕:누구보다도 휴지를 잘 주음.' 그래서 가만히 성적표의 앞쪽을 다시 한 번 살펴봤다. 틀림없이 성적표는 성적표였다. 옆에서 기대에 차 지켜보던 아내도 의아한 듯, 내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이웃집에 갔었는지 똑같은 성적표를 들고 들어왔다.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내용이 조금 다를 뿐이었다. '산수:한자리 숫자까지의 덧셈과 뺄셈을 아주 잘함.' '도덕:봉사 정신이 아주 강함.' 한참을 비교해 보고서야 나는 겨우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이랬다. 옆집 아이는 뺄셈과 덧셈에 있어서 한 바리 숫자만 할 수 있지만 우리 아이는 두 자리 숫자까지도 잘한다. 결과적으로는 내 딸이 더 잘한다. 이렇게 해석을 하고, 그래도 내 딸이 더 잘한다는 흐뭇함이 생겼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그 선생님의 표현 속에서 아이들에 대한 배려를 생각하고는, 그들의 교육 방침에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에게나, 조금 못하는 아이에게나 똑같이 잘한다고 한 그 선생님의 표현은 아이들에게 공부를 못한다고 기를 죽이는 말은 완전히 배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 뜻에는 잘하고 있으니까 자신감을 가지고 조금 더 노력하라는 격려가 담겨 있었다. 그만큼 그들은 모든 것을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7학년이 되면 이스라엘 아이들은 진학반과 취업반으로 분류한다. 우리의 인문계와 실업계 형태로 나누어 가르치게 되는데, 인문계 반을 졸업하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 대학에 들어가게 되고, 실업계 반에서 공부한 아이들은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졸업하면 곧바로 사회에 참여토록 하고 있다. 이러한 유치원이나 초등교육의 정규 교육 과정 이외에도 아이들은 학교 밖에서 과외 수업으로 예능 교육을 받는다. 건반악기, 현악기, 타악기를 연주하거나, 무용이나 체육 그리고 그림 그리기 등을 지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학원들은 모두, 우리와는 다르게 공립으로 운영하고 있어 교습비는 무척 저렴하다. 그러므로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이 학원을 다닌다. 그렇다고 무조건 입학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학원에서 실시하는 적성 검사에 반드시 합격해야만 하고, 적성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사정을 해도 입학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최소한 자기가 공부하는 악기는 반드시 자신이 가지고 있어야 하나는 조건이 붙어 있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 아이는 피아노에 관한 적성 검사를 통과해야 하고 반드시 집에 피아노가 있어야만 입학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집에서 매일 한 시간 이상씩 연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능 특기 공부를 하는 아이들은 매주 1회 반 발표회, 매월 1회 공동발표회, 그리고 1년에 두 번씩 합동 발표회를 연다. 매주 발표하는 것은 몇 사람씩 돌아가면서 악기별로 하고, 월 1회 발표회는 몇 개의 악기반이 공동으로 발표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수한 사람을 뽑아 합동 발표회를 갖게 된다. 이 합동 발표회는 실로 무용, 연극, 합창 등 갖가지 반들이 총동원되어 대규모의 공연장에서 수백 명의 학부모, 친지들이 관람하는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된다. 그리고 학원에서는 교육의 수준을 높이고 지도 선생님의 태만을 방지하기 위해 감독자들이 지도 선생님을 순회하면서 장학 지도를 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3개월에 한 번씩 담임이 아닌 다른 선생님에게 아이들의 테스트를 맡김으로써 나태하거나 무능한 선생님은 스스로 사퇴하게 한다. 그러므로 선생님들은 항상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 지도할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학부모들은 전혀 신경 쓸 것이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열한 이스라엘의 유아원이나 초등학교 교육의 특징은 어떤 제도적인 것에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어느 나라이건 큰 틀의 교육 제도는 모두가 비슷하다. 다만 교육의 목적과 그것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그 나타나는 결과가 달라진다. 물론, 이스라엘의 교육도 중등학교 이상부터는 철저하게 기능 습득 위주, 성적 위주, 경쟁적 관계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러나 모든 인성이 결정되는 초등학교까지의 교육만큼은 인간을 만드는 데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아이들은 경쟁적인 사회 속에서도 건전하게 생활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과 다른 것은 단지 이뿐이다. 사브라와 사람의 아들 "역시 그 녀석은 신의 아들이야. 그 멀쩡한 덩치에 면제라니... 그래 넌 어떻게 됐니?" "나야, 뭐 별 수 있겠니.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게 죄지. 야, 한 3년 썩을 생각을 하니까 끔찍하다, 끔찍해." 얼마 전, 휴식 시간이 되어 우연히 학생 회관에 갔다가 들은 얘기다. 처음에는 무슨 신의 아들이다, 사람의 아들이다 해서 무슨 영화나 책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곧 군 입대에 관한 얘기라는 것을 알고는 참, 세상 변해도 많이 변했다는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얘기인즉슨, 군 입대를 완전히 면제받은 사람을 '신의 아들', 그리고 이제는 사라질 방위 입소 판정을 받은 사람을 '장군의 아들', 그리고 현역병으로 입대하는 사람을 '사람의 아들'이나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부른다는 거였다. 뭐라고 욕설이라도 튀어나오려는 것을, 예끼, 이놈들아, 하고 웃어넘기고 말았지만 뒤가 개운치 않았다. 도대체, 젊은이라면 당연한 의무이자 동시에 자발적이어야 할 군 입대 문제가 이처럼 자조적인 농담으로 비유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회 의식의 변화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현역 입영을 못 하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조금은 미흡한 사람으로 취급되어 취직이나 일상적인 활동에서도 제약을 받았다. 그리하여 아들이 군에라도 입대하는 날이면 우리 부모들은 잔치까지 베풀며 그 헤어짐의 서운함을 달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다른 자식들은 멀쩡하면서도 안 가는데 내 자식만 군에 가게 되었다고, 차라리 돈 몇 푼 들더라도 빼낼 걸, 하고 후회까지 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역 입영 대상자에게 베풀어 주던 사회의 약간의 배려는 없어진 채, 오히려 학업이나 직업의 성취 기회만 더 줄어든다는 피해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또 하나를 든다면 그것은 사회의 비리가 주는 상대적인 소외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보아도 멀쩡한 운동 선수나 연예인들이 군 입대 면제 판정을 받았다거나 방위 입소 판정을 받았다고 자랑한다. 그것은 주위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한 동안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것처럼, 일부러 무슨 연골 제거 수술을 해서 면제를 받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진단서를 제출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지금은 많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금전이나 힘에 의한 청탁으로 면제를 받는 경우가 가장 흔한 경우일 것이다. 오죽하면 신체 검사에 임하려는 아들 앞에서 부모가, '방위로 빼는 데 얼마라는 데, 너 그렇게 해줄까?' 하는 말까지 유행했을까. 언젠가는 유력 정치가나 관직에 있는 사람들 아이들의 군 경력 문제를 일제히 조사하자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그러니 소위 빽없고 돈없는 우리네 일반 '사람의 아들'들이 겪는 박탈감은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회에 대한 개인 의식의 변화를 들 수가 있다. 핵가족으로부터 시작된 개인주의 성향은 남을 위하고, 우리를 위한다는 생각을 그만큼 감소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탈이데올로기 성향으로까지 이어져 젊은이들로 하여금 도대체, 왜 군대에 가야 하는지조차 명확한 대답을 못하게 만들었다. 민족을 위해서라든가, 국가를 위해서라는 어쩌면 다분히 감상적으로 수행되었던 군 입영 문제가 여러가지 사회 의식의 변화로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또 하나의 상실감을 유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사람의 아들'이라서 현역 입영을 할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은 따라서 군입대를 나라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로 여기는 경우도 많다. 언젠가 이스라엘 학생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너는 왜 전쟁터에 나가기를 원하지? 죽을지도 모르는데." "나를 위해서입니다. 내가 나가 싸우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또다시 비참한 역사 속에 놓이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저의 장래도 보장되지 않겠지요. 그것은 죽는 것보다 나을게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당연히 나라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라고 대답할 줄 알았던 나는 그 뜻밖의 대답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렇지 않겠는가. 어느 나라보다도 민족 의식이 투철하고 안보 의식이 강한 그들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나를 위해서 싸운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철저한 현실적 의식에서 비롯된다. 행여 부정적인 생각이 조금이라도 끼여들 틈이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잘못된 환상이 있을 수 없도록 그들은 가르침을 받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를 위해서라든가 하는 말로써 자칫 비롯될지도 모를 막연한 대가에 대한 기대를 나를 위해서라고 단정적으로 교육함으로써 처음부터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남녀를 불문하고 의무적으로 입대를 해야 하는 그들에게서 소외감이나 박탈감을 찾아볼 수는 더더구나 없다. 오히려 그들은 군대 생활을 통해 장차 사회에서 보다 뚜렷한 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그만큼 군대의 정신 교육 프로그램도 잘 갖춰져 있다. 이스라엘의 군사 교육은 어려서부터 시작된다. 만 14세가 되면 의무적으로 '가드너'라는 청소년대에 가입한다. 여기에는 만 18세까지의 모든 소년, 소녀들이 가입돼 일정 기간 동안 군사 훈련을 받게 된다. 이러한 '가드너'애서는 조국의 역사와 당면한 현실에 대한 교육을 통하여 조국애를 배양하고 언제나 국가에 헌신 봉사하게 충성심을 고취시키고, 한편으로는 최대한의 인내력과 용기를 발휘할 수 있도록 체력을 단련시킨다. 사격술을 포함한 군사 교육을 가르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청소년들은 훌륭한 시민인 동시에 군인의 자질을 양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의 문교성과 국방성의 공동 책임하에 군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는 이러한 '가드너'는 순수한 군사 훈련 단체라기보다는 감수성이 강한 소년, 소녀들의 과외 활동에 군사적 성격을 더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러한 '가드너'에 귀속된 청소년들은 일 년에 2주간씩 훈련소에 입소하여 집단 훈련을 받는다. 사격술, 체력 단련을 위한 각종 훈련, 야간 훈련 등을 집중적으로 실시하여 이들이 군에 입대할 무렵이 되면 사격 명중률 80퍼센트에 육박할 정도로 훈련 효과도 매우 높다. 또한, 그들은 역사적인 유적지나 전적지를 찾아 행군함으로써 국가와 민족의 전통과 안보 의식을 높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캠핑을 하면서 노래와 춤과 놀이를 통해 젊음의 낭만도 발산토록 하는 배려를 잊지 않고 있다. 일반 학기 중에는 한 달에 하루씩 이와 비슷한 훈련이 실시되고, 특별 학기 중에는 각자의 소질과 취미, 희망에 따라 공군, 해군, 기갑, 공수 및 토인 등의 각 과외 서클 활동에 참가하는 데 공군 '가드너'의 경우, 졸업 이전에 이미 글라이더 훈련을 거쳐 경비행기 조종훈련을 마치게 된다. 또한 '가드너'회원들은 매년 2주간씩 집단 농촌에 들어가 농촌 주민들과 똑같은 생활을 함으로써 노동의 신성함을 몸소 배우기도 한다. 이러한 '가드너'회원들은 6일 전쟁과 10월 전쟁 때 그러했듯이 비상시에는 참전한 시민의 자리를 인계받아 교통 정리나 우체부 등 공무에 동원되어 일도 하고 군대의 보조 부대로서의 기능을 맡기도 한다. '가드너'회원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는 그들이 '가드너'회원들을 부르는 명칭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가드너'회원들을 '사브라'라고 한다. '사브라'는 사막에서 자라나는 선인장 열매의 이름이다. 사막이나 건조 지대, 심지어는 돌산 등 아무 곳에서 뿌리를 내려 자란다. 이 선인장은 온 몸의 가시로 스스로의 몸을 방위하여 굳건히 살아남아 결국엔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게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이스라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소년, 소녀들을 이스라엘 사막의 꽃으로 결실된 열매, '사브라'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드너'를 거친 이스라엘의 청소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군에 입대하게 된다. 남녀가 다른 것은 남자가 3년, 여자가 2년으로 되어 있는 군 복무 기간만 다를 뿐, 어느 부분에서도 차이점은 없다. 우리처럼 대학에 진학한다고 하여 입영을 연기해 주는 일은 없다. 그리고 이들은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대학의 진학이나 사회의 취업을 결정하기 때문에 군대에서 비롯되는 갈등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오히려 진로 문제에 대해 다각도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이다. 국토도 작고 인구도 적다. 따라서 그들의 안보 체제는 대단히 효율적일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최소의 상비군만을 유지한 채, 제2국민역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제2국민역으로 '밀루임'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 속한 제대 군인들은 매년 5일간을 현역에 복귀하여 복무하게 되어 있다. '밀루임'은 소집 영장을 받고 가기도 하지만, 유사시에는 대개 라디오를 통한 암호 체제로 소집한다. 이스라엘의 국민들은 항상 라디오를 휴대하고 들어야 한다. 심지어는 밭에 나가는 농부들까지도 라디오를 휴대하고 일을 한다. 실로 이스라엘의 안보 체제는 철두철미하게 짜여져 있다. 그러므로 어느 집을 가든, 아버지는 예비역 상사, 어머니는 예비역 병장, 맏아들은 예비역 중위, '밀루임' 소속 맏딸은 현역, 둘째 아들은 '가드너' 회원이라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만의 독특한 군사 제도 중에 '나할'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국방과 생산의 유대를 위해 마련된 것인데, '전투 개척 청년대'라고 칭할 수 있다. 이것은 1년 전에 자원 입대하는 제도로써 일반 현역병들과 다른 점이 많다. 여기에 속한 청년들은 집단 농촌에 들어가 농촌 건설을 돕는 한편, 스스로 농촌과 노동에 대해 직접 체험하게 된다. 이들은 기초적인 군사 훈련을 마친 뒤 군인의 신분으로 기존의 집단 농촌에 파견된다. 약 1년 동안 집단 농촌 전반에 관한 교육을 받고 군의 지시에 따라 일반 민간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국경 지대의 전략적 지역에 위치한 집단 농촌으로 파견된다. 말하자면 개척과 국토 방위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 이들의 의무인 것이다. 복무 기간이 끝나면, 희망하는 사람은 계속 그곳에 남아 민간인으로서 새로운 집단 농촌의 일원이 되기도 한다. 또 하나의 집단 농촌이 형성되어 국가에서는 결국 농촌의 개척과 방위라는 두 가지를 동시에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의 병역 제도와 비교해 볼 때 이스라엘의 제도는 실로 빈틈이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무런 불만이 없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것은 그 나라의 젊은이가 선천적으로 더 충직하게 태어났다거나 부지런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의 교육에서 비롯되는 집단 의식일 것이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자기 민족의 수난에 대해 뼈저리게 느끼며 자란다. 그들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미처 알아듣기 이전인 갓난아이 때부터 그들의 민족 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세계 어느 곳에서 자라든 민족적 동질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상호 가족 방문이 유일한 취미인 것처럼 이웃간의 관계가 긴밀하다. 그리고 종교가 있다. 그들은 이렇게 복합적으로 서로간의 공동체 의식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요즘, 선진국에서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나 홀로 병'이 유행이라고 한다. TV, 오디오, 컴퓨터 등 온갖 가전 제품을 방안에 가득 채워놓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려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얘기다. 그들은 한결같이 좋은 직업이나 경제적인 부도 마다한다고 한다. 일순, 일상적 삶으로부터 해탈한 사람처럼 들린다. 그리고 그들은 가족이나 친구들 만나기도 꺼려 한다. 오직 자기만의 공간 속에서 자기만의 꿈을 꾸며 지내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강변한다.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다, 우리가 언제 누구에게 피해를 주었는가, 언제 우리가 무엇을 요구한 적이 있는가 라고. 실로 틀린 말은 없는 듯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빠져 있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함께 더불어 나누는 행복한 삶이다. 같이 나누는 삶 속에는 더 큰 행복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 개발 교육을 최우선으로 중동의 조그마한 땅, 그것도 사막의 한 귀퉁이에 자리잡은 이스라엘은 근대 세계사 속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여러가지 특징을 갖추고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건조한 사막을, 엄청난 신념과 노력으로 옥토로 일구어 세계적인 농업 선진국으로 발전한 첨단 농업 기술의 나라, 사면초가격으로 숙적 관계의 나라와 대치하고 있음에도, 수많은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해 가고 있는 나라, 이스라엘의 민족 정신은 언제나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세계적 석학들이 유태민족 속에서 쏟아져 나오고, 인류 문명을 개발시킨 수 많은 과학자들 또한 이들 민족에서 배출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세계적 지도자들도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하고, 세계의 상권 또한 그들 손아귀에 들어있지 않은가. 이런 불가사의한 일들이 현실로 바뀌어 나타난 이면에 바로 그들의 교육이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유태민족이 오늘날까지 민족적 공동체를 유지해 온 것도, 나라를 잃은 지 2천 년 만에 조국을 되찾은 것도, 그리고 국난을 극복하며 세계적 각광을 받는 것도 바로 그들의 교육에서 싹튼 것이다. 유태민족은 종교 생활을 통하여 민족적 전통을 계승하여 왔다. 수천 년간의 역사 속에서 사라질 듯하면서도 뚜렷한 선을 그을 수 있는 유태민족의 특성을 고스란히 유지해온 것도 어디까지나 그들의 종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는 또한 그들 특유의 종교 교육에 의하여 이루어졌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종교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유태민족에게 있어서 종교는 중요하다. 그러므로 종교는 생활이다. 이렇듯 생활과 밀착된 그들의 종교 교육은 그들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교육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 어디서나 유태인 의식을 강조하여 세계 각국에 유랑하면서도 유태민족으로서 일체감을 갖게 하여, 국가 통합을 이룩하는 데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해 오고 있다. 그들의 종교 교육은 어린 유아 시절부터 시작된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라는 무수한 질문을 통하여 스스로를 확인하고 다짐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우주관, 신앙관, 인생관, 민족관 등의 가치관을 형성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많은 상상력과 지혜를 계발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종교와 교육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밀접한 관계 있는 것이다. 종교 교육의 주요 내용은 몰론, '토라'와 '탈무드'라고 할 수 있다. 토라는 모세 오경의 율법을 말하고, 탈무드는 율법서의 주역서라고 말할 수 있는데, 유태민족의 구전과 그 해석,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의 율법에 대한 가르침들이 기록된 것이다. 그들은 토라 공부를 연령 제한 없이 교사와 부모의 지도 아래 평생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 교육을 바탕으로 한 유태민족 교육의 특징으로는, 가장 먼저 인격 교육을 들 수 있다.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도 매우 깊은 인격적 유대 관계로 이어져 있음은 물론이다. 접촉을 통하여, 대화를 통하여 그리고 실제 어떤 일을 함께 함으로써, 그들은 보고 듣고 실천하는 교육을 아이들에게 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 방법은 우리의 획일화된 주입식 교육 풍토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학생을 가르칠 때 그들은, 학생 개개인을 민족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선물로 또는 하나님의 자식으로 대하여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있는 것이다. 인격과 인격의 접촉 속에서 교육의 불이 붙고 인격과 인격의 수학에서 인간의 산 교육의 싹이 발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격 형성의 중요 기간을 유년 교육과 소년 교육 기간으로 잡고, 그들은 그 기간만큼은 경쟁 위주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아주 자유스럽게 그리고 자연과 어울리게 아이들을 교육한다. 그러기에 어린 아이들의 성적이나 등수를 학적부나 성적표에 기록하지 않는다. 기술 교육의 성적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게 되면 인간적인 교육, 즉 인격 교육에 등한히 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유태인들은 학과 교육이나 실기 교육 등을 가르치는 기술 교육은 교육의 제일 마지막 순위에 두고 있다. 언어, 과학, 수학 등의 기술 교육은 인격 교육을 어느 정도 달성하고 난 후, 인간 개발 교육을 한 뒤에 해도 늦지 않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철저하게 창의력을 계발하고, 인내심과 용기를 키워주고, 분석력과 판단력을 길러주는 등 인간의 잠재력을 키우는 일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중등 및 고등 교육에서는 철저하게 기술 교육, 경쟁 교육을 실시하여, 최대한의 기량을 계발토록 하고 있다. 이 결과가 세계적인 석학들을 수없이 배출해낼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된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교육 제도는 독특한 부분이 많다. 그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교육을 실시한다. 그것도 의무 교육으로 진행한다. 만 세 살이 되면 이스라엘의 아이들은 '간'이라고 부르는 국공립 교육 가관에 들어가 교육을 받게 된다. '간'이라는 낱말의 뜻은 '정원', '공원'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구미 각국의 킨더 가튼(Kinder Garten)이라는 말과 비슷하다. '간'이라는 유아원은 마을 가운데 2백여 가구마다 1개소씩 세워져 있으며, 대개 1반 또는 2반 정도가 평균적인 규모이다. 한 반의 수용인원은 10명에서 15명 정도로, 아주 이상적인 규모로 편성되어 있다. 네 살이 되면 '크담호바'라는 유아원에 진학한다. '크담호바'는 의무 교육 전의 유아 교육 기관으로 역시 '간'과 비슷한 교육 시설을 가지고 있으며, 큰 것은 4__5반 정도의 규모도 있다. 다섯 살이 되면 의무 교육 기관에 보내어 교육을 시킨다. 다섯 살에 가는 학교를 '간호바'라 한다. '간호바'로부터 실질적인 의무 교육이 시작되는데 어린이들은 100퍼센트 입학하게 된다. 역시 이 학교도 마을 중심부에 1__2반 내지 4__5반 규모의 작은 시설로 되어 있다. 이 다섯 살 때까지 교육에는 아이들에게 그리기, 만들기, 노래 부르기 등의 놀이에 속하는 교육만 할 뿐, 결코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산수라든가, 문자 등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섯 살이 되면 아이들은 '베잇 하세펄 아마밋'이라는 학교에 가게 된다. 이는 초등학교라는 뜻을 가진 보통 교육 기관이다. 초등학교 또한 소규모로 이루어져 있다. 대개 농촌에는 3__4마을 당 1개교 정도로 설립되어 있는데, 도보로 5분 정도의 거리에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평균 학급수는 9__18학급 정도로 이루어져 있다. 초등학교는 우리의 중학교를 합친 과정으로 8년제로 되어 있다. 의무 유아원 1년을 합쳐 초등교육은 실질적으로 9년으로 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던 것을 최근 4년 전부터는 초등학교 5개년, 중등학교 3개년으로 학제를 개편하였다. 학급 당 아동수는 최고 30명을 정원으로 하여 2명만 넘어도 분반하게 되어 있다. 만 15세가 되면 우리나라의 인문계 고등학교와 비슷한 '틱혼'이라는 중등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되는데, '틱혼'은 초등학교와 달리 큰 규모로 20__30학급씩 편성되어 있다. 이 중등학교는 농촌에는 8__10개 마을마다 1개교씩 설립되어 있는데, 학생수는 역시 학급당 30명이 정원이다. 이때부터는 바지는 상관 없이 상의만 제복을 입게 된다. 물론 학교마다 제복의 색깔이나 모양이 다르게 되어 있다. 18세가 되면 남자나 여자 모두 의무적으로 군에 입대해야 한다. 고난의 역사, 지리적인 불리함이 빚어낸 결과인 것이다. 물론 대학은 제대 후 입학이 가능하다. 남자는 3년, 여자는 2년간의 복무 기간이 끝나야 대학 진학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약간의 예외는 있다. 장기 복무를 원하는 사람은 군의 장학금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입대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원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대학 입학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을 치러 합격한 사람만이 대학 입학 시험을 치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우리나라의 대학 수학 능력 시험과 비슷한 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서 일정한 수준에 들지 못하면 영원히 대학에 들어갈 자격을 잃게 되는 점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기회를 박탈한다는 논란도 많을 것 같지만, 실제 그들은 그러한 불만이나 항의를 하는 경우가 없다. 그것은 학생이나 부모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나에게는 공부에 대한 능력이 없다 하고 판단하고, 곧바로 진로를 바꾸는 것이다. 이러한 것도 사회적인 공감대와 약속이 필요한 것인데, 실제로 이스라엘에서는 학력의 차로 인한 불평등한 대우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아뭏튼, 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합격하고, 대학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그대로 대학에 진학하게 되지만, 여기에서 떨어진 사람에게는 다시 한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이렇게 떨어진 학생은 모든 대학에서 운영하는 대학 예과생으로 입학, 6__8개월 동안의 교육을 받게 된다. 이때의 교육 과정은 우리 나라의 대학 입시 재수 학원처럼, 고등학교 과정의 주요 과목과 우리나라 대학의 교양 과목 등으로 편성되어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평균 80점 이상의 학점을 취득하게 되면 그 대학에 1학년으로 정원외 입학을 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서도 떨어지면 영원히 대학은 포기해야 한다. 그들은 취미와 소양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 기술이나 서비스업으로 진출하도록 전문 대학 또는 전문 기술 학교 입학을 권하고 스스로도 마음을 결정하게 된다. 학부모들도 이의 없이 받아들이고 있음은 우리의 교육 여건에 비추어 매우 독특한 경우이다. 이스라엘 대학은 정부에서 정한 정원이 따로 없다. 입학 정원은 학교 스스로, 수용 능력이라든지 교수 확보율, 실습실의 규모나 시설 형편에 따라 자율적으로 결정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교육 제도의 또 하나 특징은 단선적인 제도가 아니라, 이원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점이다. 초등교육 과정의 6학년이 되면 아이들은 진학반과 졸업반으로 나뉘어지는데, 진학반은 인문계 중학교 과정을 교육 받고 '틱혼'이라는 중등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졸업반은 기술 중학교 과정을 교육 받고 고등 기술 학교에 진학하거나 바로 사회에 진출하도록 하고 있다. 고등 기술 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사회에 진출하거나 전문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농과 대학과 교원 대학을 들 수가 있는 데, 농과 대학은 실제로 농사 경험이 없는 사람은 입학 원서를 낼 수도 없다. 물론 우리와는 사정이 다르겠지만 그렇게 입학 자격을 제한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학생이 농과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1년 내지 2년의 농사 경험을 반드시 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농업 전문학교나 농업학교를 졸업해야 한다. 교원 대학은 초등계와 중등계로 나누어져 있는데, 초등계는 고등학교 졸업 후 2년, 중등 교원은 3년을 수학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대학은 3년제로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대학교 1학년 과정에서 배우는 교양 과목은 고등학교 과정에서 이수하게 된다. 교원 대학도 일반 대학과 마찬가지로 3년으로 편성되어 다른 대하보다 교과목이 많은 교원 대학은 교과 과정이 집약적으로 짜여져 일반 대학보다는 시간 상 매우 빡빡한 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교직 과정 이수자에게 교원 자격증을 주는 것과 비슷한 제도가 있는데 이것은 대학을 졸업한 후, 교육과정 등 8학점을 추가 등록하여 취득하면 교원 자격을 주는 제도이다. 이렇게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교육 제도는 우리와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는 않다. 다만, 다른 점은 그 내용에 있다고 노는 것이 옳을 것이다. 초등학교 과정까지는 그 어떠한 기술 교육보다 우선으로 창의력과 자율성을 길러줘, 중등학교 이상의 과정에서 비롯되는 기술 교육과 경쟁 교육으로 인한 폐단을 철저히 막고 있는 것이 그들 교육의 특징이자 장점인 것이다. 그리고 사회와는 긴밀한 협조로 운영하는 취업반 제도는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젊음은 그렇게 길지 않다 이스라엘의 유년 교육과 초등 교육은 인간의 기본적인 인간성 형성 교육에 중점을 둔다. 중등 교육은 사회의 일원이 되게 하는 사회 성원화 교육과 기술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여기서 중등 교육은 우리나라의 고등 학교 교육 과정을 말한다. 중등 교육 과정에서는, 성적표나 학적부에 성적이나 등위를 기록하지 않는 초등 학교와는 달리, 성적표와 학적부에 엄격하게 성적을 점수로 기재하고 성적 통지표에도 점수 표시를 확실하게 하며, 자주 시험을 치러 경쟁 의식을 유발시키는 특징을 발견할 수가 있다. 여러 특징 중에서도, 중등 교육 과정의 가장 특기할 만한 사항은 사회 실습 과정이다. 모든 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시행되는 사회 실습 과정은 사회화 과정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현장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실습은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2주간씩 실시하는데, 담임 교사와 학부모의 연계로 학생들을 사회 각 기관, 가정, 상점, 농장 등에 보내어 사회 성원이 하는 일들을 실습케 하고 있다. 아무리 부잣집 딸이라도 남의 집 파출부로 일하거나 제과점 또는 음식점 점원, 농장에서 일을 하거나 사무실에서 사환역을 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일을 맡아서 열심히 하게 된다. 이렇게 학생들을 받아들이는 업체들의 자세도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학생들이 어리다고 해서, 그리고 그들이 학생이라는 이유로 결코 편안하게 배려해 주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장래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들이 충실히 사회를 익힐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대가는 충분히 고려해서 주고 있다. 이렇게 하여 학생들은 평생 처음으로 자기 노동의 대가를 받게 된다. 어린 나이에 농장에서 일을 한다든지, 상점의 점원으로 일을 하면서 사회와 접하는 이들은, 우리의 아르바이트 학생들과 달리, 돈을 번다는 생각도 없고, 학교의 강제성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행하고 있다는 생각도 절대 갖지 않는다. 그들은 장차 가지게 될 직업에 대한 경험장으로서 이러한 사회 실습을 유용하게 선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해마다 다른 분야를 택하여 실습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자기가 미래에 갖게 될 직장에 대한 예비 진단을 하여 가치관과 적성을 점검해 가는 보람찬 기회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농촌의 중등 교육은 도시와는 좀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다. 농촌의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농민들의 자제로 구성되어 있음을 감안하여 농번기에는 모두 농장에서 일을 하게 한다. 따라서 수학 연한도 다른 중등학교에 비해 일 년이 더 많다. 일반적으로 도시 중등학교 3년으로 되어 있으나 농촌에서는 4년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추가된 1년이라는 기간은 연간 농번기에 균등하게 배분하여, 농장 현장 실습을 한다. 물론 이때에도 담임 교사들은 학생들이 일하는 농장에 반드시 순회하면서 농촌 지도자처럼 지도한다. 농장에서 2년 이상 일을 한 경력이 있는 학생만이 농축산 대학에 입학 할 자격이 있기 때문에, 도시 출신이 농축산 대학에 진학하려면 농촌 고등학교에서 수학하든지, 아니면 졸업 후 농장에 들어가 2년간의 농사 경험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농촌 사회 실습은 장차 농과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에게는 더없는 기회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스라엘 교육은 사회와 유기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학교를 졸업하면 재교육을 받아야 하는 우리와는 전혀 달리, 바로 현실과 연계하여 학교에서 배우는 이론과 실제는 사회와 매우 깊은 관련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 사회 초년생이라는 말을 듣는 일이 전혀 없다. 이러한 것에도 실제 사회 생활의 한 과정으로서 실시되는 사회 학습이 주는 영향은 지대하다. 이스라엘 중등 교육의 특색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국방 의식을 길러주는 군 예비 교육 프로그램으로, 중등학교 학생들은 남녀 구별없이 야영 유격 훈련을 2주일씩 하게 되어 있다. 이 훈련은 국방부 정훈국과 학교간에 긴밀한 협조 체제를 가지고 실시하는데, 군 지휘관의 지도 아래 야영 시설을 갖추고 그곳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사격 훈련과 유격 훈련은 물론 적진에 뛰어들어 공격하거나 침략군을 격퇴하는 실전 훈련까지 교육시킨다. 이렇게, 이스라엘 청소년들에게 강인한 애국심, 안보 의식과 가치관을 다져주고 사회에 적응하여 훌륭한 국민이 되도록 하는 교육도 있는 반면, 그들은 전통적인 교육인 학과 교육도 과학적인 방법으로 실시하고 체득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고등 교육으로 분류되는 이스라엘의 대학 교육은 학문의 진수를 경험할 수 있는 영재 교육 제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은 모든 교육을 국가에서 관장하고 있는데, 대학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학 운영비의 85퍼센트를 국가에서 지원하고, 학생 등록금과 기부금으로 나머지 15퍼센트를 충당해 왔다. 국가 경제가 어려워진 최근에도 학교 운영비의 65퍼센트를 국비로 충당하고 나머지 30퍼센트의 예산은 모금 등으로 충당한다. 그러므로 15퍼센트에 불과한 비용만이 학생들의 수업료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장학금의 액수가 많아서 학생들이 낸 수업료는 거의 다 장학금으로 나간다. 이스라엘의 고등 교육은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텔아비브 대학교, 하이파 대학교, 바일란 대학교, 벤구리온 대학교, 하이파 테크니온 과학 기술 대학교 그리고 바이즈만 연구원 등이 맡아 하고 있다. 그리고 각종 전문 대학이 있다. 비록 고등 교육의 기관의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학교 시설 규모가 방대하고 인구수가 적으므로 대학생의 총인구에 대한 비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대학에 입학하는 제도적 장치가 독특하며 졸업하게 되는 규정들이 그들의 영재 교육 제도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성적이 모자라 퇴학이나 탈락시키는 제도는 없다. 그러나 교수들이 성적을 절대 평가하여 백점 만점에 15점, 20점 정도의 낮은 점수를 계속 맞게 되면 자진하여 학교를 떠나게 된다. 이들은 사회에서 자기 적성을 찾거나 타과로 전과할 수도 있다. 수학 연한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만, 열심히 하는 사람은 대학을 1__2년에 졸업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되어 있다. 앞서갈 수 있는 사람이 늦게 따라오는 사람을 위해 기다리지 않도록, 영재 교육의 기본을 튼튼히 다져 놓고 있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의 개방 대학처럼 수년간에 걸쳐 학점을 이수해도 되도록 하고 있다. 이는 평생 교육의 일환으로 우리가 한 번쯤 고려해볼 만한 제도가 아닌가 싶다. 또한, 대학에서는 모두 복수 전공을 하고 학위를 2개씩 받도록 되어 있다. 복수 전공으로 상호 관련이 없는 문학과 경제학 등을 동시에 전공으로 채택하는 학생들도 꽤 눈에 띈다. 이는 그들의 어린이 교육에서 비롯하는 상호 연계에 의한 창의력의 배양이 그 모토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는 대학 예산 때문에 혜택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장학금 제도가 다양해서 장학금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고 있다. 군에서 제대한 사람이 전투에서 공이 있는 경우 장학금을 받기도 하고, 대여 장학금도 많아서 신청만 하면 거의 모두 받을 수 있을 정도다. 또한, 대학교 안에는 학생들의 취업 알선을 위한, 정보 관리인 노무관이 파견되어 있다. 여기서 취업이라 함은 대학생의 부업을 말하는데, 이스라엘 대학생의 90퍼센트 이상이 무엇이든 시간제 취업을 하고 있다. 단 학생 신분으로 취업하는 경우는, 매일 6시간 이내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고 일체의 면세 혜택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 대학은 완전히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대학총장은 원로 교수 회의에서 선출된 단과 대학별 위원들이 선출하고, 중임을 불허해 단임제이며 특수한 경우, 즉 사업을 시작하여 그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유지할 수 없을 때만이 1년 간 연장할 수 있다. 학장도 단과 대학 교수들이 선정하되 대개 원로 교수로부터 돌아가면서 맡게 되며, 학과장도 모두 단임제로 누구나 다 경험할 수 있다. 이스라엘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우리나라의 대학생들이 학기말 고사 시간 동안 하는 정도로 평소에도 그렇게 공부하고 있다. 교수들도 매주 6시간 강의만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도서관에 묻혀서 연구를 계속 한다. 그래서 가르치는 대학이 아니고 연구하는 대학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스라엘 국민처럼 국제화 시대에 잘 적응하는 민족도 또한 드물 것이다. 나라 잃은 지 2천 년 동안 세계 각국을 방랑해서인지, 아니면 세계 각 민족의 피가 섞여서인지 그들의 얼굴 모양도 가지각색이요, 가족 구성 또한 국제적이다. 아버지는 이스라엘 출신, 할아버지는 폴란드계 유태인, 어머니는 러시아계 유태인, 이런 식으로 그들은 다양한 지역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도 3개 국어 이상의 언어가 통용되고 있다. 어머니는 불어로, 아버지는 러시아어로, 그리고 아이들은 히브리어를 서로 배우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의 세계화는 어쩌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싸라기 한 알만 하거늘 일생을 통하여 사람들은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진다. 가깝게는 부모, 친척을 비롯해 멀리는 길거리에서 한 번 스치고 지나는 인연까지 수도 없이 만나고 헤어짐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만남이 한 사람의 인생을 살찌우게 하기도 하고 고통과 회한 속에서 좌절하게 하기도 한다. 어찌보면 인생이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의 과정이란 생각도 든다. 나에게도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볼 때면 문득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나이를 먹어서일까. 나에게 아픔을 준 사람보다는 사랑과 믿음으로 나를 지켜보아 주시고 격려해 주신 분들이 더욱 생각나는 것은. 초등학교 시절, 나는 무척이나 어려운 가정 속에서 자라나 교과서도 제대로 준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노트, 연필 등 학용품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 방학으로 기억된다. 방학 과제물로 선생님께서는 지금의 방학 생활과 비슷한 방학 과제장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모두가 설레임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돌아올리 만무였다. 노트도 제대로 살 수 없던 내가 그것을 어찌 구입할 수 있었겠는가. 당시 나의 노트는 달력이나 광고지를 엮어 만든, 그야말로 잡기장이 고작이었다. 달력의 뒷면이나 광고지의 뒷면을 노트로 사용했던 것이다. 개학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과제장을 구입하지 못한 나로서는 여간 고민되는 것이 아니었다. 과제장은 살 수 없었어도 방학 과제는 해야 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나는 친구의 과제장을 빌렸다. 그것을 모두 필사하여 제출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우선 달력이고 광고장이고 한 면이라도 쓸 만한 종이들을 모두 두툼하게 엮었다. 그리고 밤을 세워 꼼꼼하게 베껴 나갔다. 마침내 개학날이 다가오고 나는 그 과제장을 제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며칠 밤을 세워 만든 그 과제장을 제출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은, 성취해냈다는 자랑스러움도 있었지만, 부끄러움이 더 앞섰던 것이다. 선생님 앞에 나가서도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류태영, 너는 과제장 준비해 오지 않았니?" 겨우 선생님 앞에 과제장을 내놓자, 선생님도 좀 의아했던 모양이다. 먼저 앞 표지를 살펴보고는 몇 장을 유심히 넘겨보았던 것이다. "류태영, 너는 참으로 훌륭하게 과제장을 해왔구나. 아주 잘 했어." 오히려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뒷날, 과제장을 돌려주시며 선생님은 열 권 정도의 노트까지도 함께 주셨다. 과제장에는 빨간 붓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참 잘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꿋꿋하게 살아라.'라고. 그 선생님은 신현구라는 선생님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과 함께 있어도 쉽게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키가 작고 몸집이 왜소한 분이었다. 그러나 눈만은 언제나 반짝이는, 속된 말로 정신만은 살아계신 분이었다. 그 후, 나는 선생님을 친형님처럼, 때로는 아버지처럼 의지하며 따랐다. 힘들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그 선생님을 찾아 하소연을 하곤 했다. 선생님은 어떤 하소연도 기꺼이 받아주셨다. 그러한 관계는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서울로 떠나 있을 때도 계속 이어졌다. 선생님을 찾아뵐 시간이 안 되면 편지라도 올렸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런 나에게 끊임없는 격려를 주셨다. 찾아뵈올 때면 박봉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용돈 주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무 어려운 고학 생활을 하던 시절이라서 염치불구하고 금일봉을 받곤 했지만, 선생님께서는 내가 돈을 벌 때에도 그 용돈 주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그런 선생님이 너무 송구해서 하루는 물어본 일이 있다. "선생님, 이제 저도 다 컸는데 선생님께 보답할 기회를 주셔야지요." "그런 생각일랑 아예 말거라. 그리고 네가 다 컸다는 생각도 가져서는 안 된다. 사람이란 일평생을 뜻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 법이다. 나는 네가 더욱 자라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베푼 것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것은 너의 후배나 사회에 베풀어라. 그것이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이다." 그 선생님의 말씀이 아마도 지금 농촌을 위해 설립한 대산 농촌 재단이나, 안창호 선생의 혼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도산 아카데미 연구원을 통해 내가 미력이나마 사회에 봉사하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런 선생님에게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물질적으로 무엇을 보답한다는 것은 선생님의 뜻이 아니어서 다른 방법을 물색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가 생각해낸 것은 내가 이만큼 컸음을 보여드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기회만 엿보고 있던 중, 마침 전라북도 도지사 초청으로 전북 관내 지도자급 인사 5백여 명을 모아놓고 특강을 할 일이 생겼다. 강연이 끝나자 도지사는 반응이 아주 좋다며 식사 대접을 원했다. 그래서 그 도지사에게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 "제가 평생을 두고 존경하는 선생님이 계십니다. 그 선생님께서 이 자리에 함께 하신다면, 제가 그분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이 되고, 선생님도 무척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지사님께서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신다면 저에게는 더없는 영광이겠습니다." "참, 요즘 보기 드문 생각이시군요. 제가 존경하는 류 박사님의 은사님은 저도 당연히 존경해야지요. 비서에게 연락하게 하여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 도지사는 점점 각박해가는 세상에 참으로 뿌듯한 모습이라며 당장 그 선생님을 모시도록 기꺼이 응낙했다. 선생님은 당시 전주시내 모 고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으로 재직하고 계셨다. 초대되어 온 선생님은 가장 윗자리에 모셨다. 뿌듯하게 바라보시는 선생님의 눈과 마주치자, 선생님의 보답을 바라지 않는 그 끝이 없는 사랑에 그만 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도지사도 감격에 찬 모습으로, 부러운 듯한 눈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성을 쏟고, 희망을 가지고, 참으로 혼과 힘을 기울여 공부할 수 있는 여건과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넣어주신 선생님, 항상 '아는 것이 힘이다.' 라고 사랑의 매를 아끼지 않으시던 선생님, 아마도 그분의 은혜를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그만큼 나에게는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길을 안내해 주신 고마운 분들이 계셨다. 이미 고인이 되신 박시중 선생님도 그 중 한 분이셨다.(묵자책 321쪽 참조) 이것은 고문진보에 나오는 '심잠'이라는 한시인데 내 연구실 연구에 큰 족자로 걸려 있다. 중학교 2학년 시절, 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항상 희망을 잃지 않고 학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국어 과목을 가르치시던 선생님이 박시중 선생님이셨는데, 그분은 아이들이 지루해질 만하면 항상 칠판에 한자 숙어나 한시를 적어 아이들에게 가르치시곤 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했었다. 이 '심잠'이라는 시도 그 선생님께서 칠판에 적어주신 글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어리와 마음뿐, 아무것도 없던 나에게 이 시는 마치 구원을 주는 듯했다. 아득하고 아득한 하늘과 땅을 우러러 보거나 굽어보아도 끝이 없거늘, 사람만이 그 사이에 묘연히 몸을 가지고 있구나. 사람 몸의 작기가, 거대한 창고에 가득 찬 쌀 가운데 싸라기 한 알만 하거늘, 삼재(천, 지, 인)에 참여할 수 있음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리. 지나간 옛날이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람인들이 마음이 없을까마는, 마음이 여러가지 형상으로 역사하여 금수와 같은 사람이 되는구나. 오직, 입과 귀, 눈과 손발을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는 동작들이, 작은 틈만 주면 마음에 병을 일으키는구나. 이 작은 마음을 온갖 인간의 욕심들이 쳐들어와 앗아가니, 그 나머지 인간다운 마음은 얼마나 될까. 슬프고 슬프구나. 그 나머지는 거의 없구나. 그러나 사람이 된 자는 성실함과 경건한 마음으로 극복하여, 온몸이 태연하며, 온몸의 조직들이 마음의 명령을 따르게 되리라. 사람이 사람됨은 역시 사람마다 마음이 있기 때문이니, 마음에 등불을 켜 미래의 꿈을 간직하고 그 목표를 향해 꾸준히 달려간다면 그 꿈이 이루어지리라는 의미의 이 한시는 당시 어려웠던 시절의 나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나는 이 시를 노트에 써놓고 몇 번을 읽고 또 읽어 암기했다. 그리고 이 글귀를 마음 속에 새기면서 가끔 혼자서 주문을 외우듯이 외우곤 했다. 삶의 힘듦에 지쳐 눕고 싶을 때마다 이 시는 나에게 위안을 주고 용기를 주었다. 순수한 자기 마음을 속된 욕심에 침공 당하지 않고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을 할 때, 인격이 형성하고, 하고자 하는 일들이 정당하게 이루어지리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마음 씀씀이를 바로 하는 데 무엇보다 신경을 썼다. 그럴수록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과 같이 나에게는 좋은 날들이 더 많아졌다. 부모와 자식간의 살인, 스승과 제자간의 폭행, 요즘 신문지상을 통해 접하는 소식들은 한결같이 참담하다. 도덕성이 땅에 떨어진 결과이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 교양이라고 할 수 있다. 매일같이 하루 일을 자성하고 교정해 나가면서 인격을 쌓아가는 것이 삶의 바른 자세인 것이다. 옛날에는 수신이라는 학과목이 있었다. 초등학교에서도, 서당에서도 참으로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웠었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은, 이론만 무성할 뿐, 인성 교육은 뒷전이다. 사회가 어지러울수록, 마음이 복잡해질수록, 스승의 모습이 더욱 떠오른다. 한 10년쯤 되었을까. 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러웠었다. 한창 배움의 즐거움에 빠져들어야 할 학생들은 길거리로 나섰다. 배움의 터전인 교정도 온통 최루 가스에 뒤덮이고, 학생들은 스승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 둘씩 멀어져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나는 선생님께 긴 편지를 올렸었다. "...작금은 모두가 마음을 빼앗긴 듯합니다. 누구도 제자리를 지키려 하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언행일치, 지행합일의 모범을 보이신 선생님이 더욱 간절하게 뵈옵고 싶어집니다. 기억하시겠지요, 선생님께서 칠판에 적어주셨던 수많은 고사성어들, 그리고 한시들을. 지금 저에게 떠오르는 것은, '심잠'이라는 한시입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마치 주문처럼 외우곤 했던 시이지요...." 편지를 올린 지 며칠 후에 나에게 커다란 액자가 배달되어 왔다. 그 액자에는 놀랍게도 선생님의 자필로 쓰여진 '심잠'이 들어 있었다. 그 액자를 받아들고 나는 선생님의 한없는 관심과 사랑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선생님을 대신하여 연구실에 걸려 있는 액자를 바라 보면서 나는 지금도 나의 마음과 나의 길을 돌아보곤 한다. 그러면서 나는 지금도 매년 종강할 때면 종강사로 학생들에게 이 한시를 가지고 강의를 하곤 한다. 셋이서 길을 가면 반드시 스승은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겸허히 나를 돌아보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또한 그런 사람만이 사람과의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를 위해 살아왔는데 아이가 대학 입시를 치르고 무난히 대학에 입학을 하면서부터 대부분의 우리 어머니들은 심한 우울증과 무력감에 시달리게 된다고 한다. 물론 모든 힘과 관심을 아이의 입시에만 기울였던 어머니들에게서 나타나는 병이다. 모든 긴장과 구속으로부터의 갑작스런 해방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증세가 비단 아이들 입시에만 매달렸던 어머니들에게서만 나타나는 증세는 아니다. 생활이 안정되어 갈수록 그동안 집 장만을 위해, 아이들 교육을 위해 잊고 살아왔던 자아를 생각하면서부터 문제는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아이들의 사소한 반항에도 서운함을 갖게 된다. "내가 누구를 위해 이렇게 살아왔는데...." 그러다가는 곧바로 자신을 반성하기도 한다. '나는 왜,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 거지?' '도대체 나는 누구야.' 아이들로부터 무시라도 당했다 싶으면 살기조차 싫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엄마는 그런 것도 몰라."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지. 예전에는 똑똑하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할 정도였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갱년기 증세일 뿐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더 큰, 다른 문제가 개입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아를 상실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뒤늦게 그것을 알고 찾으려 해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편한테 그런 얘기를 했다가는 대부분 핀잔을 듣기 일쑤다. "무슨 헛소리야, 당신 바람 났어?" "왜, 자다말고 봉창을 뜯고 난리야. 빨리 잠이나 자라구." "이 사람이, ...이제 먹고 살만 하다 이건가?" 사실은 남편도 이러한 부인의 말을 듣고는 꽉 짜여진 내일의 일과를 위하여 잠을 청해 보지만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남편도 이미 그러한 무력감에 휩싸일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누구를 위하여 남 밑에서 죽도록 일한 것일까. 그리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이 나이에 눈치나 보며 살아야 하는 내 팔자도 참 한심한 팔자야.' 그러면서도 직장을 계속 다닐 수밖에 없는 자신을 한탄할 것이다. 물론, 모두가 이렇다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그러한 경우는 잠시일 뿐이다. 곧바로 마을을 추스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심각한 지경에 처하는 경우도 우리는 매우 흔하게 볼 수가 있다. 얼마 전, 신문 기사에 실린 일이다. 나이 60을 넘긴 할머니가 남편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했다는 거였다. 이유인즉 한 평생을 남편으로부터 아무 이유 없이 구박만 당했다는 거였다. 그러면서도 자식들 때문에 한 마디 못 하고 살았는데, 자식이 다 출가한 이 마당에 더 이상 그런 남편과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용기에 박수를 쳐야 하는 걸까. 아니면, 다 늙은 사람이 주책없다고 코웃음을 쳐야 할까.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의 울타리라고 믿어 왔던 남편으로부터, 가정으로부터 벗어나 이렇게 혼자 서려는 여성들이 점차 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을 상실하면서까지 희생을 하진 않겠다는 의지이리라. 아무튼, 경제적,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훨씬 이러한 위기에서 벗어나기가 쉬울 것이다. 조용히 여행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체념한 채, 인생을 마감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 인생이 처량해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사회 교육, 평생 교육은 필요한 것이다. '국가는 학교 교육과 평생 교육을 진흥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헌법에 나와 있는 문구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헌법에 평생 교육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교육에 대한 투자는 가장 열악한 나라 중의 하나가 또한 우리나라라니 참으로 아이러니컬 하다. 평생 교육이라 함은 개인이 태어나서 묻힐 때까지 사회에 적응하고 자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모든 교육 행위를 말한다. 급속한 기술의 발달로 평생 교육의 필요성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미리 가정된 세계에 대해 기초 지식을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학교 교육으로는 그것을 감당하기가 힘들다. 그만큼 세계는 급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사회 교육이 필수적이다. 또한 그것이 담당해야 할 부분도 무척이나 넓다. 우선, 한 번뿐인 교육의 기회를 놓친 사람들에게 다시 교육의 기회를 줌으로써 그들에게 생활의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평생 교육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대학 입시 위주로, 파행적으로 흐르고 있는 교육의 정상화에도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학 입학에 실패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재수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이들을 직장에서 수용하고 사회 교육을 통하여 배움의 길을 열어준다면,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의 입시 문제도 조금은 숨통이 트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도 지금의 졸업장 위주에서 능력 위주로의 인정 체제가 정립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게 하기 위한 기능 인력의 재교육이 필요하다. 사무 자동화로 인해, 컴퓨터를 모르는 사람은 이미 업무 처리를 못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신기술을 익혀 재배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신기술의 도입으로 인한 인력의 감축도 무시할 수 없다. 해마다 몇 백 명씩 상업 고등학교 졸업자를 뽑던 은행들도 업무의 전산화로 그 인원을 대폭 감축했다고 한다. 그리고 좋든 싫든 그 자리를 떠나야 하는 사람들도 꽤 많을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직종에 대한 재활 교육도 사회 교육이 맡아야 하는 것이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치맛바람에 찌든 우리의 교육 풍토를 개선하기 위해서도 이런 사회 교육은 필요한 것이다. 젊은 어머니들부터 의식의 대전환을 위한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만의 아이가 아닌 공동의 아이임을 인식하게 할 때, 치맛바람도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2차적으로 장애를 입은 사람들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것도 사회 교육이 담당해야 할 부분이다. 장애를 입은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자살을 생각해 보았거나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여기에 갑자기 남편을 잃은 평범한 가정주부들을 위한 직업 교육 프로그램도 반드시 더해져야 할 것이다. 물론, 자아의 발전을 꾀하는 많은 사람들의 욕구도 충족시켜 주어야 하는 것이 사회 교육이다. 이렇게 사회 교육의 필요성은 그야말로 막중하다. 그에 따라 사회 교육의 수요도 점차 늘고 있다. 그러나 그 수용할 시설이나 기관은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실제로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다가도 막상 행동으로 옮기려면 어디를 찾아야 하는지조차 떠오르지 않는 것이 우리의 실정 아니던가. 평범한 사람들이 기껏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무슨 방송국이나 신문사의 문화 센터가 고작이다. 그러나 시간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곳을 찾아가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또한 교육 프로그램도 다양하지 못하다. 취미나 여가 선용 프로그램이 고작인 것이다, 사회 교육 기관은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의 사회 교육 기관은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은 모든 정규 교육 기관이 사회 교육 기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게는 유치원에서부터 대학 교육 기관까지가 모두 사회 교육 기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직장인임을 감안하여 야간 시간에 강좌를 개설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는 시설들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인적자원이 필요한 것 난점이라면 난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력의 양성에도 많은 투자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는 훌륭한 교육 기관보다는 지역 주민이나 학부모들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써 더없는 시설임에는 틀림이 없다. 새로운 시설 투자에도 이러한 점을 적극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 교육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어쩌면 기능이나 교양 교육 같은 단순 교육보다는 자발적 학습의 태도를 길러주는 것이다. 타의성을 띠는 것보다는 자발적인 교육이 효율면에서도 훨씬 뛰어나겠지만, 교육의 연속성에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리고 자발적 요소가 강해질 때는 그만큼 투자면에서도 부담을 줄일 수가 있을 것이다. 방송 매체를 통해 다수의 교육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개개인의 관심이 중요한 것이다. 아이들이 물어오는 사소한 것에도 얼굴을 붉혀야 하는 것은 자라 개발에 게으른 탓이다. 할머니가 멀리 있는 손자와 컴퓨터 통신을 한다면 이 얼마나 멋진 일이 되겠는가. 그러한 날을 앞당길 수 있는 것도 결국은 개개인의 열정인 것이다. 수요가 있을 대, 공급은 반드시 창출되는 것이 이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가 아니던가. 사회와는 떨어져 살 수 없는 교육 이스라엘 산업 발달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중요하게 취급되어 온 것은 누가 뭐래도 건국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해온 농업이다. 습곡과 사막과 황야, 게다가 여름철엔 건조하며 겨울이면 우리가 계속되어 11월부터 4월까지 비가 내리는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은 한 마디로 농업에는 적합치 못한 국토를 가지고 있다. 농사 지역이라 해도 곡식을 뿌려 보았자 가뭄에 견디지 못하며, 견딘다 하더라도 토양이 사토여서 뿌리를 내리고 살 수 없다. 이러한 소택지와 모래알 땅을 피와 땀으로 옥토화한 것이 이스라엘이다. 습지를 건조시키고 관개시킨 결과,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농업국이 되어 매년 해외 각국에서 농업 기술자들의 견학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자연적인 악조건 아래서도 세계 최고의 전천후 농업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한 줌의 흙을 자기 생명과 같이 사랑하였다. 그 불모의 땅을 한치 한치 개척해 나갔던 그들의 신념은 5__6천년 전부터 여호와 유일신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가나안 복지로 들어갈 것을 예언 받아 그것을 반석같이 믿으면서 수십 세기를 살아오는 동안에 굳어진 신념인 것이다. 그들은 사막 위에다 풍만한 과수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농작물이 풍요롭게 자랄 수 있는 옥토는 지금도 날이 갈수록 확장되어 가고 있다. 또한 농업용 관개 용수는 지하에 핏줄과 같이 크고 작은 파이프로 연결되어 여름철 건조기에 밀려오는 가뭄도 능히 이겨낼 수 있다. 이러한 관개 용수는 지하 2백여 미터의 깊은 곳에 있는 지하수를 개발한 곳이 많다. 실로, 그들의 피땀어린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농촌을 일으켜 농업을 발전시킨 후, 다른 산업 발전을 도모했다. 물론 오늘날,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수는 극히 적은 수준이다. 대다수의 인구는 상업 및 공업 그리고 서비스업에 종사하게끔 산업 구조가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해마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 들어온 유태인들은 국가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대부분 해외에서 3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음에도 농업과 축산업 등 1차 산업에 투신하여 조국을 부흥시켰다. 즉 1차 산업을 넘어 2차, 3차 산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다시 1차 산업에 투입된 것이다. 이는 분명히 경제 발전사에는 역행하는 일이었지만, 그들의 조국에 대한 열정이 이를 거뜬히 이겨낼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건국 후 30년이 흘러간 오늘의 1차 산업의 결과로 말미암아 2차, 3차 산업이 엄청난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으니 그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교육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의 인력 분포를 보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전인력의 약 8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는 덴마크의 선진 농업국과 같이 농업이 고도로 기계화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며 대다수의 인력이 농업외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스라엘 산업은, 먼저 농업으로 나라를 일으키는 기반을 닦고 공업으로 국부를 다져나가는 선진 공업국의 형태를 밟았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산업 발전에 해외 교포 재벌들이 적극 참여한 점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교육이 산업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음은, 1948년부터 1975년까지 집권당이었던 노동당의 주요 지도자들이 조직한, 전 노동 인력의 80퍼센트를 수용하고 있는 이스라엘 노동 연맹 총 연합체가, 노동자들의 건강 관리와 사회 보장을 위하여 기금을 제공하고, 사회 복지 활동을 주도하고 교육 과정을 설치하여 노동자들의 교육 훈련을 맡아 큰 공헌을 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즉, 이스라엘의 산업 발전은 자연적인 농업 교육에 뒤이은 공업과 과학 교육을 실시하여 이룩했다. 그들은 키부츠나 모샤브 같은 농촌에서 자체적으로 학교를 세워, 그 지역 실정에 맞는 교육을 담당한 것은 물론, 이들 학교 농장 및 실습장을 지역 주민의 학습장으로 활용하여 농업 기술을 보급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같이 농업을 주축으로 공업화를 지향하여 나가면서 정부에서는 공업 기술 학교와 훈련 실습원을 계속 건립하여 필요한 교육을 시켜나갔다. 한편, 고등 기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공과 대학을 세우고, 우리나라의 KAIST와 같은 연구 기관과 대학원 과정만 있는 바이즈만 인스티튜드 등의 연구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는데, 이같은 고등 교육 기관들의 연구와 교육에 의하여 고도의 기술과 인력이 개발되었던 것이다. 이외에 실습을 바탕으로 한 실기 교육을 시키는 직업 학교와 농업 학교 등을 관계 기관들과 긴밀히 연계시켜 효율적으로 운영해 감으로써, 국가 산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는 점이 이스라엘 교육의 주요한 특징이다. 이것이 곧 산학 연계에 의한 교육의 참된 모습인 것이다. 사회 경제적 발전에 따라 교육 역할의 중요성이 높아질수록 이에 따른 교육의 과제 또한 많아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특히, 건국을 맞은 이스라엘은 무엇보다 교육 수혜의 균형 불화, 선택성 낙제생 등 교육의 장해 요소가 극심하였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이스라엘 정부가 가장 고심했던 부분은, 교육을 국민 전체에 개방 하느냐, 일부 선택된 사람에게만 한정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둘째는, 경제 발전을 주도할 인적 자원을 어떻게 충분히 공급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다른 민족에게서 발견하기 어려운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동양에서 이민온 사람들과 서구에서 이민온 사람들 사이에는 성격, 사고방식, 가치관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런 문제는 현실적으로 취학 아동의 비율과 고등 학교에의 진학률에서 현저한 차이로까지 나타났다. 동양과 아프리카 등 후진국이나 개발 도상국에서 이민온 아이들은 평균적으로 지능도가 낮았던 것이다. 따라서 취학률, 진학률도 평균을 밑돌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들을 수용할 준비가 제대로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자연히 선택적인 교육을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즉, 일정한 국가 고시에 합격한 자에게만 정부가 지원하는 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진학을 위한 인문계 중등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는 학생들은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에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들은 경제적 여유가 있어도 인문계 학교에 진학할 수가 없었고 직업 기술 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 또한 지역적인 격차의 문제로 이어졌다. 그리고 동양과 아프리카 출신의 아이들은 지적 수준이 낮고, 심리적 성향도 바르지 못하여 인문계 학교에 겨우 진학한다 하더라고 중퇴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이들 낙제생들과 중퇴생들을 어떻게 선도하느냐 하는 문제가 사회적으로 크게 대두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회 교육적 여건 때문에, 결국 사회의 지도층은 대부분 구미 선진국에서 이민온 사람들이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원인들은 물론 이민오기 전의 지역에 따른 교육 수준과 문화적 배경 등이 다른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육 당국이 이주민 집단의 모든 양상과 이질성으로 생기는 문제들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도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직업 학교에서도, 고등 교육 기관에서도 일어났다. 당시, 직업 학교에 대한 문제점으로 지적된 내용을 보면, 첫째가 학생들의 불합리한 선발 방법, 둘째가 직업 고등학교에 대한 부모들의 인식 부족, 셋째가 실업 학교의 불합리한 교육과정, 넷째가 경제적 곤란, 다섯째가 각급 학교의 개인에 대한 불만스런 대우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실업 학교와 농업 학교에 대한 문제점이 대두되고 직업 교육이 과소 평가되자 인문계 학교에 진학하려는 경향은 더욱 높아졌다. 따라 수많은 수험생들이 입시 준비를 위한 교육 과정을 수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경향은 결국 기능 인력과 고급 기술 인력 양성 제도의 개편과 그에 따르는 여러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먼저, 과거의 도제 제도를 탈피하여 교육, 훈련된 전문 기능 인력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꽤 효과가 있어서, 기술 교육에 대한 인식이 점차 달라지게 되었다. 물론, 고등 교육의 확충에 있어서는, 발전하는 경제 사회에 필요한 고급 인력을 충당하기 위한 투자와 교수 요원의 확보 문제가 대두되었다. 즉, 인구의 증가와 경제 발전에 따른 교육된 인력 자원을 어떻게 계속 효율적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교육이 균형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느냐 하는 과제가 발전의 단계마다 새로운 문제로 제기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국가 경제 발전에 따라, 초등 학교, 중등 학교 그리고 고등 기술 학교 시설을 계속 확충하여 98퍼센트의 청소년들이 각급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이렇게 산업 발전에 따라 거듭 발전한 이스라엘의 교육 제도는, 국민 교육을 6년에서 2년 연장하여 농촌 학교에서는 농업 교육을, 도시에서는 기술 교육을 받도록 하고, 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 중 일정한 시험에 합격한 자에게는 진학반을 만들어 따로 교육을 시킬 수 있도록 바뀌었다. 물론, 농업반이나 기술반들도 같은 계열의 대학 진학을 위한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게 길을 터 놓고 있다. 또한, 신체 장애자들에 대한 특수 교육 제도가 잘 갖추어 학습 부진아에 대한 과외 특별 수업으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이스라엘의 교육 제도가 산업의 발전에 따라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를 살펴보았다. 이밖에도 그들은 지속적인 교육을 위하여, 모든 국민들에게 평생 교육의 장을 만들어 놓고 있다. 그들은 남녀 대부분이 직장인이면서도 그러한 교육에 참여하는 비율이 매우 높다. 거기에는 각종 전문 기술과 취미, 교양까지도 교육하는 대학 부설 교육원을 우선 들 수 있다. 이 교육원은 그 지방의 성인 교육을 맡고 있는데, 퇴근 후에 강의 시간을 배치하여 그 호응도가 매우 높다. 그리고 각 학교마다 운영되는 학부모 모임 또한 이러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협조나 지도 사항, 건의뿐만 아니라, 강사를 초빙하여 특별 교육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에는 유태인이 아닌 외국인들의 단기 교육을 맡아서 연수 교육을 하는 기관도 많다. 이들은 대개 국제 연합에서 운영비를 지원받아 운영하고 있는데, 이들은 본래의 교육 이외에 자기 민족, 국가를 선전하는 것도 중요한 프로그램으로 삼고 있다. 일례로, 텔아비브에 있는 아프로 아시안 연구원에서는 개발 도상 젊은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이스라엘의 협동 조합과 노동 운동에 관하여 가르치는데, 이 연구원은 매년 영어 강의 과정과 불어 과정으로 3개월씩 2회 개원한다. 여기에 있는 연구원, 교수, 직원들은 모두 3개 국어 이상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 연수생들에게는 매우 바람직한 교육을 할 수가 있다. 그리고 하이파에 있는 골다메어 국제 여성 훈련원은 세계 각국의 여성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유아 교육과 여성 조직 운동, 농촌 여성 지도자 훈련, 여성의 여가 지도 과정 등을 지도하고 있다. 정규 유학중인 외국인 학생 이외에도 국제 연수 기관들이 활발하게 사업을 추진함에 따라 민간 외교의 구실까지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국제 문화 개발에도 기여해 이스라엘의 위상을 높여주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사회의 급변에 따라, 사회 교육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학업을 계속 할 수 없었던 사람에게는 다시 배움의 기회를 주고, 사회의 흐름에 따른 인성을 재교육할 수도 있으며, 또한 국민의 건강한 여가를 위하여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 사회 교육이다. 바야흐로, 우리도 사회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일 때인 것이다. 자식을 팔아먹는 장사꾼이어야 하는가 요즈음 흔히 말하기를, 선생은 있어도 참 스승은 드물고, 학생은 있어도 참 제자는 없다고 말한다. 이런 말들은 사도가 땅에 떨어졌다는 말로 강조되기도 하고, 진정한 사제지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비판으로도 들린다. 사람이 직업을 선택하는 데는 여러가지 심리적, 사회적 요인이 개입되게 마련이다. 오늘날, 교직에 투신하고 있는 이들의 교직 선택 동기들을 종합해 보면, 직업의 안전성이 있다든지, 긴 방학이 있는 등 다른 직업에 비해 시간적 여유가 많다든지, 간섭을 덜 받는 직장이라는 점들을 우선으로 꼽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 사회에서 존경 받는 직업이라고 생각하거나,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직업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어떤 사람들은 가르치는 것이 성격과 적성에 맞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이렇게 경제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까지 영향을 미쳐 교직 선택의 이유들은 퍽 다양하게 복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옛날에 비하여 최근에 들어와서는 그 특색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훌륭한 스승이 되어 보겠다는 이상적인 이유나, 교육을 통하여 사회 개혁을 해보겠다는 것보다, 일반적인 요인으로 교육 분야를 택하는 경향이 짙게 되었고, 그 직업을 통하여 생활의 수단인 생활비를 조달하는 것이 주목적이 되고 만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때에는 아주 쉽게 교직을 떠나 버리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봉으로 인한 생활의 어려움과 사회에서 예우를 경박하게 해도, 묵묵히 순수한 마음 가짐으로 교육에 전념하는 스승들도 수없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교직을 선택하는 동기에서부터 순수성을 찾을 길이 없고, 교육에 임하는 자세도 가볍게 여겨서 세상의 빈축을 사는 이들도 많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여기에는 교직자들의 사회적 신분이 이질적으로 변화된 요인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에는 교직자가 되기 위한 사범 학교에 사범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들의 농촌의 중상류 계층이나 도시의 중류층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과 정서 속에서 가정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지방 대학에 있는 교육 대학이나 사범 대학을 제외하고는, 농촌 출신이 줄어들고 도시의 근로자층 가정 출신이 월등히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변화와 함께 교직원 수요의 급증, 경제 생활의 향상 등으로 엘리트들이 교직 선택을 기피하여, 이상적인 교직 선택 동기가 많이 약화된 것이다. 그리하여, 지역 사회의 발전을 위한 개척자 정신이나 교육자로서 이상 구현을 추구하는 순수성이 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결국,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하여, 봉건 사회에서는 교육계에 투신하던 엘리트들이 경제적 부를 좇아 다른 산업 분야를 선호하게 됨으로써 발생된 문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윤리라 함은 본래 사람을 가르치는 도리, 즉 오륜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교사로서 직업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갖추고 행해야 할 몇 가지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교사는 교육을 행하면서 인격 형성자로서 그 본질적 사명을 다하여, 학생들을 보호 양육하는 사람으로, 전문적인 교육 기술자인 동시에 직업인으로서 그 임무를 행해야 한다. 교육을 통하여 교육이 목표로 하는 인간을 형성해 나간다는 것은 가정과 학교와 사회 집단 내에서, 여러 사람과 상호 접촉을 통해 한 개인의 인간됨을 형성하는 동시에 모든 생활 양식 즉, 문화를 올바르게 보고 습득케 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동에 특성이 있어서, 사물을 관찰하는 태도, 감지 경향, 그리고 사고 방식이 다르다. 그러므로 교육은, 교육을 받는 사람들의 개성을 어떻게 형성해 가느냐에 따라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교사는 이러한 인간 형성자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 개인이 사회적 환경에 적응해 가면서 사회에서 인정받는 또 사회에서 꼭 필요로 하는 유능한 사회 구성원이 되도록 인간 형성을 바람직하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교사인 것이다. 이러한 교육의 기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인간을 형성한다는 원래의 동기는 사랑에 있으며, 인간을 형성하도록 도와주는 힘도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기능인으로서 교사 이전에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인간 스승이 진정한 스승인 것이다. 역사상 위대한 교육자들이 우리의 귀감이 되는 것도 오직 그 사랑의 실천적인 업적 때문인 것이다. 예수의 사랑이 그러하고, 페스탈로치의 인간애 또한 그러한 것이다. 오늘날의 교직자 가운데도 이렇게 숭고한 정신을 가지고 실천가로서 묵묵히 일선에서 생애를 바치고 있는 사람들은 많다. 반대로 교직자의 본분을 망각한 채, 교육애와 인간애의 발현보다도 금권에 정신적 지주가 치우쳐 있는 사람도 또한 많다. 그러나 오직, 먼 장래를 바라보며 교육의 초석을 다진다는 신념만으로 나를 희생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기에 개정되는 교육법에 따라 선출된 교육 위원들의 뇌물 공여를 지켜보는 마음은 누구나 아팠을 것이다. 민주 사회에서 사제지간의 관계는 교직자 스스로의 인격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단언에 대해 많은 비판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교사들도 많을 줄 안다. 올바른 교육을 하려고 해도 강압적인 학교 운영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학부모 또한 진정한 교육에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교사들의 의견도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교사의 한 사람으로서, 외부적인 교육 여건 이전에 교육의 실제 담당자인 교사의 자질만을 반성적으로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스승과 제자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교직자들의 뼈를 깎는 자기 반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인간 형성을 위한 도덕성을 앙양하는 것이 교사의 기본 사명이라고 할 때, 진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교직자의 과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학문적 열의와 진리의 추구가 피교육자의 가슴 속에 부딪힐 때 비로소, 감화와 영향을 주며 참된 교육적 작용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현재 발견하지 못한 것을 찾아보고자 하는 동경과, 미래에 대한 신념이야말로 교사의 길과 생애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여기에 사랑이 무르녹아 들어갈 때, 교직자 상은 성스럽게 회복될 것이다. 교직에 몸을 담는 것은 아무나 할 일이 못 된다. 인격적인 자질과 기술자로서의 교육 기술을 해박하게 갖추고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인간 형성의 기술자인 교사의 기술은 다른 직업에서 보는 기술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다른 직업의 기술이 무생명의 물체나 물리적인 것인 데 비해, 교직자의 기술은 그 대상이 형이상학적인 것이고 인격적인 것이기 때문에 더 어렵다. 그러므로 실수에 의한 파손은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교육 기술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피교육자의 내면적 발전에 연결되어 있는 교육 기술은 교사의 교육학적, 교육 심리학적, 교육 사회학적 교양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지는 미묘한 기술인 것이다. 여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육 사회학에 대한 교양이다. 이는 향토 교육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교사의 교육관과 교사 자신이 갖는 교양을 배경으로 하여 피교육자를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가는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연구나 사고 방식을 통달하지 않은 교직자는 중요한 자격을 상실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현대 교육자들은 모름지기 자기 힘으로 교과 과정을 작성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것도 교육 사회학적 견지에서 피교육자들의 향토 사회를 조사하고 학생들의 성장 과정을 연구하여 구체적인 교과 과정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부단히 변천하는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시대적 감각에 맞도록 교수법에도 능통해야 하고 교육사나 교육 철학에도 연구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며, 자주적으로 교육을 실천하기 위해서 항상 이상적으로 사색하는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교사 자신이 자기 인격의 완성과 향상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수신적인 사람이 될 때, 교사의 사명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교육자들도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사는 한, 평범한 인간이어야 하며, 직업인으로서 위치를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현대 직업인으로서 사회적 지위를 지켜야 하며, 스스로의 고매한 인격을 갖추어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교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지도자로서 사회적 존경과 대우를 받아왔다. 그러나 항상 경제적으로는 부족함이 많았다. 외형적으로는 존경받는 인품을 지키면서 내면으로는 비굴하게 만드는 이러한 사회의 이중 구조가 종종 교직을 천박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교직자들이, 사회가 기대하는 성직자로서 사명을 다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경제적인 빈곤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사회의 배려가 필요한 시점이다. 교사의 경제생활이 교육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경제적 빈곤은 교사의 사회적 지위마저 위태롭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천직으로 여겨지던 교사라는 직업을 현대의 경제는 아주 일반적인 직업으로 몰아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교직자들이 천부적인 사명감에서 직업적인 사명감으로 바뀐다고 하여 단순한 노동자라고 하기에는 좀 어색한 것도 사실이다. 교직자들이 물욕에 빠지거나 또 명예욕에 눈이 어두워서도 안 되겠지만, 직업인으로서 일정한 급료를 받고 일을 하기 때문에, 교직은 전문적이며 정신적인 직업으로서 아주 특별한 직업 윤리가 적용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직은 인격 형성의 과업을 완수라는 목적 달성의 과정에서 참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직업이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민족의 양심이며 세계 인류의 양심이라는 긍지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또한 직업인으로서, 교직자들은 같은 동료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어갈 의무가 있다. 개인적인 교양과 주관적인 사상이나 이념만으로는 충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 중심적인 교만과 자부심은 오히려 참 교육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공동 연구와 토론을 통하여 직장의 풍토를 교육의 도장으로 조성해야 할 것이다. 교사는 자신의 직능을 위하여 항상 연구하는 자세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연구들은 특히 향토 사회와 관련을 갖고 협력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국가와 사회가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는 현명한 지도자를 찾는다. 그러나 지도자는 자연 발생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참교육자를 통해서만이 육성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스승이 새 역사를 창조하는 동량들을 다듬어내기 위해서는 또한 그만큼 힘과 정력을 쏟아야 한다. 교직자들이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스스로의 사명을 다할 때, 비로소 새 역사는 창조되는 것이다. 세상이 흔들리고 있다. 그것은 교육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교사는 교사대로 사회의 교육 여건을 탓한다. 가정은 가정대로 극한적인 이기심으로 교육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교육은 어느 한 부분의 완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는 동안 우리의 아이들은 점차 어두운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사회의 비리가 발생할 때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고 반성하기 이전에 그 사람만을 탓한다. 마치 모든 잘못은 나와는 무관하다는 듯이, 하지만 우리의 교육이 이러할 때,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교육 개혁이 시작되는 아침에, 교사의 한 사람으로서 스스로를 반성하기 위해 이 글을 적어 보았다. 그러면서 지식만을 파는 장사꾼이 아닌, 참된 인간성을 주고받는 교직자가 될 것을 다짐한다.